유소년기 1970-1988
1. 소년은 딸부잣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버릇없는 아이는 용납하지 않았던 부모님 때문인지 주변에서는 예절 바르고 의젓하다고 했다. 남아선호 문화에 찌든 시절 '귀한 아들' 딱지를 얼굴에 붙이고 태어났지만, '그럼 딸들은 자식도 아니란 말이냐'라고 외치는 개성이 강한 누이들이 4명이나 있었던 탓에, '귀한 아들'이란 말은 집에서 금칙어가 되었다. 소년은 하나를 알려주면 열을 깨우치는 스타일이어서, 비범하다는 소리를 많이 들었다. 한글은 말문이 트이기도 전에 이미 깨우쳤다고 하던데, 이 정보의 출처는 그의 모친이니, 독자들은 알아서 해석하시라. 밖에서 뛰어노는 것보다 책 보는 것을 더 좋아했는데, 학교 들어가기 전에 베개만 한 옥편을 펴놓고 한자공부하는 걸 좋아했다. 집에서 빈 종이가 굴러다니면 한자를 써놓고, 아니 그리고, 다녔는데, 그럴 때마다 그의 부모는 '우리 아들 신동이다' 라며 흐뭇해하셨다. 어린 시절 부모로부터 받았던 사랑은 이후 인생에서 큰 힘이 된다.
2. 소년은 국민학교에 들어가서는 지극히 평범한 시기를 보내게 된다. 당시에는 깨닫지 못했지만, 가세가 많이 기울어서 돈에 쪼들리는 환경에서 자라게 된다. 성장기에 있는 아이들이 그렇듯 그도 공상을 많이 하고, 아무리 생각해도 답이 안 나오는 생각을 하면서 시간을 보냈다. 예를 들어, 누이들이 너는 이 집 자식이 아니다. 집에서 아들이 필요해서 고추 달린 아기를 어디서 데려다 키우고 있는 거라고 놀렸다. 진짜 부모님은 어디에 계실까? 혼란을 겪는 와중에, 엄마가 나타나서 '애한테 웬 쓸데없는 소리!' 누나들을 혼냈다. 진실의 전달과 오해에 대한 해명보다 말을 아얘 막는 엄마를 보며 더 당혹감을 느꼈다. 아기 때에는 누나들처럼 벌거벗고 목욕했는데, 언제부턴가 혼자만 소외되었다. 한 번은 누나들이랑 고무줄놀이하다가 엄마한테 엄청 혼난 적도 있다. '고추는 띠어버려라' '이제부턴 치마 입고 다녀라' 소리를 듣고, 꿈에서 치마를 입고 고추가 떨어지는 가위에 눌리기도 했다.
3. 5학년 2학기, 성적표를 나누어 주기 전에 담임선생이 소년을 부르더니, 이번에 '올 수'를 맞을 거라 했다. 엄마한테 꼭 말씀드려. 한 턱 내시라고 해. 집에서 그 얘기를 전하다가 당혹한 경험을 하게 된다. 이거 좋은 소식 같은데 옆에서 머리가 굵은 누나들은 분개하고 있었다. 어머 얘 담임 너무 돈 밝히는 거 아냐? 이렇게 노골적으로 나오다니. 소년의 어머니는 이후 며칠 동안 돈을 꾸러 여기저기 다녀야만 했다. '올 수'가 담긴 성적표와 돈봉투를 주고받으며(이게 뭐냐? 포로 교환? 인질 몸값 지불?), 담임은 능글맞은 목소리로 어머니를 위로했다. 얘가요, 앞으로 서울대학교 갈 겁니다. 그는 헷갈렸다. 이게 좋은 거야 나쁜 거야? 어른들로부터 칭찬은 들었는데 꺼림칙했다. 무엇보다도, 그때까지도 소년은 아빠가 나왔던 연세대학교가 최고로 멋있는 대학이라고 알고 있었기에 서울대학교라는 말을 들으니 아쉬웠다. 그럼 연세대학교는 못 간다는 거야?
4. 소년은 국민학교 때 남들과 다른 점이 많았다. 사람들은 얘는 특이한 애라고 했다. 예를 들어 TV를 매우 싫어했다, 특히 어린이프로. 너무너무 유치해서. 공상에 젖어있는 시간이 많으니 언제나 1등을 한 건 아닌데, 맘먹고 공부하면 성적은 잘 나왔다. 한번 본건 웬만하면 잊어버리지 않았다. 중학교 들어가서는 영어단어를 외워본 적이 없었다. 그걸 도대체 왜 외워야 하지? 한번 보면 그냥 머릿속에 들어오는 거 아냐? 남들은 아닌가 봐? 수학시간에도 한 번만 설명하면 되는 걸 왜 그리 여러 번 반복하는지 지겹게 도대체... 이런 소리하다가 친구들로부터 욕을 싸질러지게 먹고는 다시는 이런 얘기 입밖에 내지 않았다. 아무 생각 없이 생각나는 대로 표현하는데, '문자 쓰고 앉았네, 잘난 척하지 마라' 비아냥을 들었다. 그는 자신과 비슷한 사람이 없어서 외로웠다. 안드로메다에서 뚝 떨어진 왕자라 생각했다. 비밀을 터놓고 말할 상대가 없었다. 지구에서 지구인들과 살기 힘들었다.
5. 소년은 원래 글짓기를 싫어했다. 쓸 말이 없는데 억지로 써야 하다니. 작문에 재주를 보인 적도 없는데, 중2 때 우연하게 서울시 독후감 백일장에 학교 대표로 나가서 우수상을 받았다. 아마 그를 내보낸 국어 선생은 자신의 뽑기 실력에 흐뭇했었을 것이다. 그 후 한두 번 더 비슷한 대회에서 입상을 하면서 학교 내외에서 '글짓기 잘하는 아이'로 알려졌다. 등 떠밀려 시작했지만, 이후 글쓰기에 재미를 들였다. 누구도 그의 글을 보고 "너 왜 이렇게 잘난 척 하니?"라고 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욕먹을 고민 안 하고, 마음속에 있는 그대로 쓰면 되었다. 일상생활에서 구어체보다 문어체가 저절로 튀어나오는 특이한 기질을 가진 이 소년에게 글을 쓴다는 것은, 마치 자신의 몸에 딱 맞는 옷을 입고 끼를 맘껏 부리는 것과 같았다.
6. 고등학교 때는 시, 수필, 단편소설, 자기만의 수학 물리학 해설서 논문까지, 장르를 가리지 않고 신나게 써댔는데, 특히 그가 가장 정열을 바쳤던 장르는 연애편지였다. 다만 그 편지들이 실제 좋은 결과로 이어지지 않았다. 당시 그는 독자의 눈치를 보는 글쓰기를 하지 않았기에, 수신자 입장에서 이해하거나 받아들이기 힘든 내용이 많았기 때문이다. 글의 내용이 너무 진지하거나 조숙한 것도 큰 핸디캡이 되었다. 예를 들어, 그가 고3 때 같은 교회의 고1 여학생에게 쓴 편지에 이런 구절이 있었다. (전략) 이 방정식 속에 세상 이치가 속속들이 스며들어 있음을 깨닫는 것은 너무나 큰 기쁨이다. 난 내 마음을 방정식으로 표현하고, 이걸 너와 공유하고 싶다. (중략) 내가 오늘도 기쁜 마음으로 공부를 할 수 있었던 이유는 앞으로 너의 훌륭한 남편이 되고자 하는 소망 때문이야. 너 내 마음 이해하지? (후략) 그 여학생은 이후 더 이상 교회에서 보이지 않았다.
7. 한국에서 80년대에 고등학교를 다녔던 이들 중에 '난 고등학교 때가 제일 좋았다'라고 말할 이는 거의 없을 것 같다. 소년은 예외다. 가세는 기울고 그에게 신경을 써줄 여력이 없던 부모. 자율을 인정해 주었던 학교. 집과 학교에서 '공부해라'라는 소리를 별로 듣지 않았다. 이런 호강을! 다른 학교를 다녔던 친구들은 부러워했다. 다른 학교들은 안 그랬단다. 1, 2학년 때, 교회학생회, 학교서클활동--여름수련회, 봄가을 문학제, 음악제에 많은 노력과 정열을 바쳤다. 공부는 하고 싶을 때 집중해서 했다. 수학은 매력적이었다. 미적분을 이해한 것은 중학교 때였는데(누나의 정석을 몰래 욕먹으면서 보다가 깨쳤다. 원래 하지 말라고 하는 거 하는 게 더 재밌는 거다), 고2 때는 폭넓은 수학적 관점에서 에세이를 많이 썼다 (예: 자연로그는 왜 존재해야 하는가). 그렇다고 수학시험 보면 맨날 만점이냐 그건 아니었다. 그래도 성적을 위한 공부가 아니고 수학 본질을 탐구하는 것이 더 즐거웠다.
8. 고3이 되어서는 마음먹고 성적 내기 위한 공부를 했다. 집안 사정 때문에 우여곡절이 좀 있었다. 이사를 계속 다니다 이젠 별 집 같지도 않은 이상한 곳에서 고3 수험생활을 보냈다. 그래도 크게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그는 스스로 이런 환경에서도 공부하는 것을 즐기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학력고사 준비를 했다. 서울대의 모든 과에 합격할 정도의 성적을 내었는데, 그냥 공대에서 수학 물리를 제일 많이 할 것 같은 과로 진학을 하게 되었다. 사실 그는 운이 좋았다고 생각한다. 준비한 대로 문제가 나와 주었으니. '그때 난 문제 푸는 기계였다'라고 아직도 간혹 회고한다. 국어는 언제나 운빨에 의존해야 했는데 다행히 찍은 게 대부분 맞았고, 영어는 원래 잘 안 틀렸고 수학은 최대한 암산해서 풀었다. 다른 과목 여기저기서 한둘 틀린 것 같다. 여기가 그의 인생의 정점이다. 원 없이 고등학교 시절을 보내고, 멋모르고 가장 행복했던 시간을 보냈다. 이후 그의 삶은 상처투성이가 된다.
9. 실패로 큰 좌절을 겪은 사람들은 주변에서 어느 정도 신경을 써준다. 대학 떨어진 애한테 바로 싫은 소리 잘 안 한다. 마음을 더 다칠까 봐. 그런데 대부분 사람들 잘 모르는데, 성공한 사람들 역시 케어가 필요하다. 성공 직후는 위험하다. 여차하면 다쳐서 이후 삶에 불행한 결과를 초래할 수도 있다. 흥분해서 날뛰다가 발을 헛디딜 수도, 성공을 시샘하는 눈초리가 아프게 찌를 수도, 성공을 이용해 먹으려는 검은 손길이 뻗쳐 올 수도 있다. 소년은 그전까지 선생님 복이 있다고 생각해 왔다. 다 좋은 분들이셨다고 생각했다. 선생님들도 소년을 좋아했다. 가끔 삐딱하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모범생이었고 학교에서 학력고사 1등으로 졸업할 정도였으니 많은 선생님들이 눈여겨보았다. 이중에 악마가 있었다. 악마는 소년을 타겟으로 잡았다. 똑똑하고 위기 대처능력도 있어 보이는데 가난한 집 출신이라 사회에 대해 적당히 불만도 있다. 포섭하기 딱 맞는다. 서울대 합격 직후, 88년 1월에 큰 사건이 소년에게 닥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