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의 씨도 뿌린 대로 거두어지는가?
문순태 작가의 대하소설 「타오르는 강」을 유튜브로 완독한 후 작품의 라스트신이 애잔하지만 그래도 따뜻하여, 힘겹게 살아가는 우리에게 희망을 준다는 점에서 작가에게 감사한 마음이 들었다. 그리고 이 소설의 시대 배경인 우리나라 근대의 역사를 이끌어오느라 뼈를 깎고 목숨을 바쳐 삼천리 방방곡곡에 누워 계신 그 많은 영혼들에 대한 최소한의 도리를 하는 의미에서 주인공 장웅보와 그의 가계를 중심으로 이 작품을 돌이켜보려 한다.
1975년 『전남매일신문』 연재를 시작으로 여러 차례 연재와 중단을 거듭하다가 2012년에 총 9권으로 완성된 책이라 한다. 「타오르는 강」은 양진사 댁 노비인 웅보가 같은 집 여종 쌀분이와 함께 도망을 가다가 잡혀 와서 동네 어귀의 팽나무에 하루종일 묶여 살과 피가 말라 들어가는 것으로 시작한다. 노비의 자식은 당연히 그 집의 노비였던 시대이기에 웅보의 아버지도 할아버지도 양진사 댁 노비였다. 할아버지도 세 번이나 도망을 가다가 잡혀서 평생을 이마에 노비 ‘노’ 자 불도장이 새겨진 채 살았는데, 웅보는 살면서 자신의 신분에 대한 부조리함, 울분이 생길 때마다 이 할아버지를 떠올린다.
나주의 지주 계급인 양진사는 부인 유 씨와의 사이에 자식이 없어서, 아들이 둘 있으나 남편이 영산강에 빠져 죽은 이후 살길이 막막한 막음례라는 과부를 별당에 씨받이로 들여놓고 있었다. 그러나 이 별당에서도 자식이 생기지 않자, 나 씨 부인은 그 원인이 양진사에게 있지 않을까 생각하고 특단의 조치를 취하는데, 그것은 웅보에게 가진 생사여탈권을 이용하여, 웅보를 이 별당에 들이는 것이었다. 돼지 새끼를 얻기 위하여 종돈을 씨내리로 이용했던 자신의 과거 일을 떠올리며 웅보는 막음례 방에서 하룻밤을 보내고 나온다, 쌀분이가 눈물을 훔치며 밤새 그 방을 지켜보는 가운데.
19세기 후반 노비세습제가 폐지됨에 따라, 웅보는 종 문서를 받아 들고 쌀분이, 그리고 동생 대불과 함께 진사댁을 떠난다. 웅보의 아버지와 어머니는 상전댁을 떠날 결단을 내리지 못하여 양진사 댁에 당분간 그냥 남는다. 웅보처럼 노비의 신분에서 벗어난 사람들은 당장 입에 풀칠하기도 어렵지만, 그들이 얻은 ‘자유’로 도저히 농사를 지어먹을 수 없어 영산강변에 버려진 땅을 개간하여 삶의 터전을 만들어 나간다. 손이 발이 되는 고역을 감수하지만 황무지가 논으로 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남녀노소가 초근목피로 연명을 하여 해골 같은 모습이 되어도 내 논이 생긴다는 희망으로 버티려 하는데, 무심한 하늘은 폭우로, 또는 가뭄으로, 근처의 박초시와 관가는 부당한 조세법으로 목숨보다 귀한 땅을 빼앗고 그들의 생존을 위협한다.
이 작품에는 우리가 역사 시간에 들었던 동학농민혁명, 의병운동, 만민공동회 사건, 일진회, 독립협회, 광주독립학생의거, 목포와 제물포의 개항, 노량진과 인천 제물포 사이의 철도 부설 등에 등장인물들이 깊숙이 개입하여 활약하는데, 마치 우리가 그 시대, 그 장소에 함께 있는 듯한 착각에 빠지게 한다. 그래서 우리가 이 부분의 공부에서 놓쳤던 역사적 사실 앞에, 그 현장에서 무지막지하게 폭력을 당하고 끝내 유명을 달리하신 영령들의 실제 이름이 낭독자 조영심에 의해 하나하나 불릴 때마다 경건함을 느낄 정도이다.
농민들은 보릿고개에 굶어 죽을 수는 없어서 장리쌀(가을에 갚겠다고 춘궁기에 부잣집에서 빌리는 쌀)을 얻어서 연명을 한다는데, 이들처럼 땅뙈기 한 뼘 없는 이들에게 장리쌀을 주는 사람은 없다. 아내나 딸을 담보로 곡식을 꾸어 먹다가 못 갚으면 아내나 딸을 노비로 또는 첩으로 뺏기기도 하고, 가난한 집에서는 아예 딸을 쌀 몇 가마니에 파는 일도 귀한 일이 아니다. 같은 처지의 판쇠네 딸 방울이가 쌀 일곱 가마에 팔려 가게 된 일이 있었는데, 웅보는 차마 그럴 수는 없다고 내가 어찌 쌀을 구해 보겠노라 하고 옛 상전 양진사 댁을 찾아가 도움을 청한다. 사정을 들은 유 씨 부인은 씨받이 막음례가 웅보의 씨를 받아 수태를 한 것처럼 자신도 웅보의 씨를 받아야겠다고 생각하고 웅보를 방으로, 이불속으로 들어오라 한다. 너의 무엇을 믿고 그 큰돈을 변통해 주겠냐고 하면서. 씨받이 막음례나 찬물 한 그릇 떠 놓고 혼사를 치른 쌀분이와는 다른 비단결보다 보드라운 마님과 살을 섞은 웅보.
이후 막음례에게서 태어난 아들은 장개동으로, 유 씨 부인에게서 태어난 아들은 양만석으로 살아간다. 마님이 씨의 값으로 던져준 패물을 모두 막음례에게 주기도 했지만, 막음례는 수완이 좋아 지역의 유지급으로 부를 이루고 아들 개동은 시를 쓰는 소학교 훈도(교사)가 된다. 일제 강점기에 일제가 우리 민족을 수탈할 때, 같은 동포이면서 더 표독스러웠던 친일파, 또는 앞잡이, 동양척식회사, 일진회 간부로 살아가는 만석은 당시 민중을 괴롭히는 정도가 최악이었고, 심지어는 생부를 직접 고문하는 만행까지 저질렀으니, 아비 웅보의 그 깨어지는 몸과 마음을 어찌 짐작이나 할 수 있으랴.
어느 날 방문 온 막음례로부터 양만석과 장개동의 아비가 같다는 사실을 자기도 알고 있다는 말을 들은 유 씨 부인은 그 충격에 몸져눕게 되고, 어쩔 수 없이 만석도 자신의 출생의 비밀을 알게 된다. 만석은 어머니를 불결하다 하여 모자의 연을 끊고, 유 씨 부인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하필이면 박초시네 딸과 만석은 결혼한 사이였는데, 만석의 아내는 만석을 벌레처럼 경멸하면서 아들 순식이와 함께 친정으로 돌아가 버린다.
양만석의 아들 순식도 장개동의 아들 백 년과 백석처럼 광주고보에 다니게 된다. 학생 의거가 광주뿐만 아니라 전라도 일대에서 오랜 기간 이어지고, 광주고보의 학생들이 동맹휴학을 결의하거나 퇴학을 당하고 하는 일이 일어날 때, 개동의 아들들은 우리나라 학생들과 함께 의거에 직간접으로 참여하는데 반하여, 만석의 아들 순식은 이들을 ‘불령선인’(일제 강접기에 불온하고 불량한 조선사람이라는 뜻으로 일본 제국주의자들이 조선사람을 이르던 말)이라 하면서 정보를 캐내어 학교나 경찰에 밀고하는 일을 한다. 순식은 그 옛날 만석처럼 지독한 친일분자가 되어 우리 민족에게 해악을 끼칠 뿐만 아니라, 동경 유학에서 돌아온 이후 과거와 180도 달라진 생활을 하는 아버지 만석의 면전에서 자기 생각을 아무 거리낌 없이 말할 뿐만 아니라, 아버지는 자기 인생에 방해가 되니, 자기가 살아가는 광주에서 떠나라는 말까지 한다. 노비로 태어났으나 같은 처지의 이웃들과 함께 끈질긴 생명력으로 부당한 권력에 저항하면서 살아온 아버지 웅보, 그의 아들답게 변모하여 사회에 선한 지도자로 살아갈 준비가 된 만석이었으나, 자신이 그러했듯이 핏줄로 인한 열등감과 분노로 완전히 잘못 성장한 아들 순식 앞에 절망한다. 자신이 생부 웅보에게 주었던 고통을 그대로 돌려받고 있다.
만석이 동경 유학에서 돌아오는 길에 우연히 알게 된 조선애, 내 딸이 죽어 나가도 사회주의 사상을 가진 놈에게 줄 수 없다는 지주 계급의 딸 조선애와 마음을 주고받던 만석은, 이 땅에서의 신산함을 벗어나 간도에서 새 삶을 살려한다.
이제는 형님이라고 자연스럽게 부르는 개동과 막음례의 간절한 만류에도 불구하고 본가의 논 스무 마지기를 막음례에게 판 돈을 가지고 조선애와 간도로 떠난다, 아무 상의도 없이 몰래 무작정 따라온 개동의 둘째 아들 백석과 함께. 식민지 백성으로서의 설움 외에 핏줄로 인한 지독한 운명까지 더해진 억울하고 슬픈 이들의 뒷모습은 같은 핏줄 개동의 아들, 백석이가 따름으로써 읽는 내내 짠했던 독자들의 마음에 따뜻함, 그리고 희망을 전해준다.
깊은 겨울을 지나고 있다. 그래도 봄은 어김없이 올 것이므로, 작년 가을 수확 후 갈무리해 놓은 씨종자들을 챙겨 보아야겠다. 내 자그마한 주말농장도 뿌린 대로 거두어지므로. 2025.01.1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