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희가 시간의 씨앗들을 들여다 볼 수 있다면, 어떤 씨앗이 자라고 안 자라는지를 알 수 있다면, 말해다오."
- 윌리엄 셰익스피어 <맥베스, 1606>
눈이 매섭게 내리는 겨울의 날이다. 길을 헤쳐 공간에 도착해 차가운 공간에 따뜻한 공기를 불어넣고 자리에 앉아 바깥을 내다 보았다. 눈이 쌓인 새하얀 들녘은 눈이 부실 정도다. 색이 사라진 겨울의 들판은 이곳을 지나가는 겨울 철새의 보금자리가 되곤 한다. 어제까지만 해도 수십마리의 쇠기러기들이 모여 앉아 남아있던 곡식을 먹으며 추위를 피하고 있었는데, 하늘길이 추워진 탓인지 다들 어딘가로 날아가고 보이지 않는다. 한 마리도 보이지 않는 것이 내심 걱정이 된다.
모든 새가 둥지를 틀 수 있는 곳까지 무사히 날아가지는 못할테다. 그런데도 그들은 날갯짓을 멈추지 않는다. 지구의 움직임을 느끼며 바람과 구름의 흐름을 따라 헤메지 않고 자신들의 곳으로 날아간다. 풍요롭던 숲이 개발되어 겨울마다 쉬던 장소가 없어지기도 하고, 잠시 들러 허기를 채우던 여울은 어느새 8차선 도로가 되어버리기도 한다.
삶의 변화와 자연의 변화가 일치하지 않는 순간은 늘 어쩔 도리가 없다. 그저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묵묵히 이름 모를 철새들의 이름을 기억해주고 그들이 날아간 곳에서 또 다시 살아가기를 바랄 뿐이다.
초겨울, 트랙터가 거대한 탈곡기를 끌고 깨끗이 곡식을 수확한 뒤로 황량해진 들녘에는 반쯤 잘린 줄기만이 남아 있다. 모든 것이 겨울잠을 자는 듯 내려 앉은 풍경을 보고 있으면 마음 깊숙한 곳이 먹먹해지기도 한다. 거대한 자연 앞에서 다시 봄을 기다리고 있는 자연의 순간을 나는 운이 좋게도 이 공간에 앉아 가장 먼저 눈으로 담고 있다.
성장과 수확, 그리고 기다림의 모습을 탐구하며 오늘의 자연은 어떤 변화를 안겨줄까 관찰을 하면서도 문득 앞으로 또 어떤 것들이 얼마나 다른 모습으로 변화하게 될 지를 생각하면 자연 앞에서 무력하게 겸허해지기도 한다.
눈이 내려 앉은 무채색의 들판은 곧 얼었다가 녹아 내리고, 그 뒤로 땅은 한참을 질펀해질 것이다. 4월이 되면 푸릇한 생명들이 보란듯이 올라오겠지. 겨울을 보내고 있으면서도 한여름의 습기 가득한 그 뜨거운 공기 속 여름 냄새가 아직도 선명하게 느껴진다. 내게는 이것이 눈과 입, 그리고 온몸으로 맞이하는 계절의 자연스러운 인사라고 여겨진다.
겨울의 한 순간을 지나는 쇠기러기들이 자유롭게 하늘을 날다가 같은 계절이 돌아와 다시 이곳에서 만날 수 있기를, 색이 사라진 하얀 들판에 생명을 불어넣어 준 철새의 마음을 기억할 수 있어 참 다행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