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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보 Feb 23. 2024

[2-07] 가끔 어떤 일들은 우연처럼 찾아온다.

"먼길을 돌아오던 길에 나는 나의 공간을 한눈에 알아본다. 다른 상점과 달리 느릿하고 어둑한 빛이 번지고 있는."






시작을 앞두고 짧은 여행을 떠났다. 어디를 여행해야 할 지, 어떤 음식을 먹을지, 어떤 장소에 방문할지조차 계획하지 않은 여행이었다. 걷는대로, 주어지는대로 마음을 정리하고 앞으로 내가 만들어 갈 공간에 대한 생각을 다져보기로 했다. 가끔 어떤 일은 아무리 노력해도 우리가 생각하는 결론에 도달하지 않기도 하고, 또 가끔 어떤 일은 우연처럼 찾아오기도 한다. 내게 공간을 꾸리는 일은 후자에 가까웠다. 그래서 더 어려웠다. 치밀하고 완벽한 계획을 그 어느 것도 짤 수 없었다. 마치 아무 계획없이 떠나 와버린 이 여행처럼 말이다.





여행을 하면서 나는 나의 감정이 자연 안에서 꽤나 크게 움직이고 있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이전까지 내가 전혀 알지 못했던 세상을 경험하고 있다는 사실과 더불어 거대한 자연 속에서 내가 이렇게 작은 존재인 것을 느끼는 것에 큰 감흥을 느끼곤 했다. '나'라는 개인이 발을 디디며 행하는 일들이 나 자신을 넘어 과연 어디까지 갈 수 있을지에 대한 궁금증을 키워 나갔다. 죽기 전까지 보지 못할 수많은 자연과 더불어 수십 만의 사람들, 그것과 얽히고 섥힌 시간들에 뒤섞여 질 나의 모습은 감히 상상조차 불가능했다.





주어진 시간 안에서 공간을 꾸리기로 결심한 뒤로, 줄곧 나는 공간에 나를 이입했다. 나라는 작은 존재를 느끼면서 동시에 그 작은 존재가 과연 어디까지 뻗어 나갈 수 있을 지에 대한 고민 따위의 것들을 하고 있었다. 자연이 건네는 순간의 거대한 느낌에 한없이 겸허해 지다가도, 지금 이곳에 내가 온전한 생각으로 서 있다는 사실이 느껴지면 마음이 벅차 올랐다.





그런 의미에서 내가 만들어 나갈 공간이 가진 눈앞의 자연은, 그냥 그 자체로 하나의 작은 우주에 가까웠다. 아무런 정비조차 되지 않은 들판과 한 가운데 울뚝 솟은 공장마저 그냥 그 자체로 이 도시가 내게 보여주는 자연이었다. 사계절을 느끼기에 들판만큼 다채로운 자연이 더 있을까.





계획과 무계획 사이 짧았던 지난 5일이 내게 준 결론이 완전한 답일리는 만무하겠지만 그럼에도 전하고 싶은 작은 이야기 하나에는 도달한 듯 보였다. 나에게는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하면서도, 걸음과 순간에 느끼는 생각과 감정을 소중한 사람들과 함께 오래도록 나누고 싶은 마음 역시 절실하다는 사실이었다.





많은 카페에 있을 법한 시그니처 메뉴가 없더라도 어느 날, 어느 계절에 찾아와도 그 순간을 오롯이 맞이해 삶 속에 꽤 오래 기억될 수 있는 공간이 되어가는 것, 한적하고 평화로운 가운데 그 사이의 간격을 메꾸어 줄 따뜻하고 고소한 커피를 내어드리는 것, 그리고 그것을 욕심을 조금 내려놓고 꾸준히, 성실히, 오래도록 만들어 가는 것이 나의 몫일 것이다. 이 공간에서 자연을 맞이하는 순간을 만들기를 바라면서.





날이 따뜻해서인지 며칠 전 벤 논의 그루터기에서 벌써 초록의 싹이 올라온다. 따사로운 몇 번의 월요일을 더 보내고 나면 아마 언제인지도 모르게 불쑥 가을이 찾아올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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