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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보보 Feb 28. 2024

[2-11] 책이 내게 남긴 이야기


9살의 봄이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아빠의 아픔은 어떻게 손을 써볼 겨를도 없이 일찍 가족의 곁을 떠나게 했다. 9살. 9살은 슬픔이 뭔지 죽음이 무언지 손에 닿지조차 않던 나이였다.




강해져야 했다. 당연했던 존재가 사라진 자리는 시간이 지날수록 진하게 드러났다. 농도가 진해질수록 나에겐 더 큰 공허함과 슬픔이 밀려왔지만 겉으로 보여지는 것이 두려웠다. 꼬리표처럼 따라다닐 이야기를 끝내기 위해 나는 더 꼿꼿해져야만 했다. 한참 물렁물렁할 고작 그 나이부터 단단해지기 위해 나는 무얼 결심하고 무얼 행해야 했을까. 아직도 그 시절의 내 마음을 돌아볼 때면 흐릿하고 아리다.




그때마다 내가 했던 일은 책 속으로 힘껏 더 깊이 파고드는 것이었다. 꼿꼿한 허리를 시원하게 눕히고 싶었다. 원할 때 원하는 만큼 한없이 말랑해졌다. 페이지를 넘기는 시간은 온전한 나일 수 있는 순간이었다. 차곡차곡 참아왔던 슬픔을 책 속에서만큼은 억누르려고 하지 않았다. 깊숙한 페이지 속에서 나의 슬픔을 보살피고 소중히 쓰다듬었다. 그때 내게 책이 있었다는 사실이 얼마나 다행이었는지 모른다. 




살면서 아빠가 남긴 것은 책과 사람이라 여겼다. 고마운 마음마저 벅찬 인연을 만날 때면 아빠가 내게 남겨두고 간 선물과도 같은 사람들이라 여겼고, 나의 감정을 이렇게 정성껏 표현하며 사랑할 수 있었던 건 책이 안긴 위로였다고 믿는다. 내 삶의 많은 부분은 이게 아니고는 어떻게 더 설명할 길이 없다.





카페를 열기 전부터 줄곧 이 공간에 가득 찬 책을 상상했다. 읽고 또 읽으면서 누군가도 나와 같은 힘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랐다. 잠깐이라도 현실 밖의 자신을 만나고 슬픔을 돌보고 공허함을 달랠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는 막연한 생각을 했다.




나는 책에게 빚을 졌다. 한참을 그리고 평생을 빚졌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가 살아가는 이 작은 세계에, 내게 언제나 큰 존재였던 책을 남기는 일이 찾아온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짧지만 결코 가볍지 않았던, 나를 지나간 수많은 문장에게 받은 귀한 마음을 어떻게든 바깥으로 꺼내고 싶었던 것일 테니까.





내가 꾸린 카페 바로 위, 10평 남짓한 작은 공간이 있다. 그곳이 책방이라면 좋을텐데 카페를 열고 나서도 한참을 그렇게 생각했다. 다른 것을 해볼까 궁리를 하다가도 나는 또 마음 속으로 책이 가득 들어찬 이 공간을 상상했다. 그렇게 작은 비밀의 공간에 책방을 꿈꾸게 됐다. 누군가의 삶 속 깊숙이 질문을 던져내기를 바라면서.



언젠가 나의 아이가 조금 더 자라 어린 시절의 내 마음에 새겨졌던 책들을 함께 꺼내 주원이의 속도에 맞추어 넘겨보는 삶을 상상하기만 해도, 상상만으로도 행복하다. 충분하다.




책이 아니어도 현실의 답을 찾을 수 있는 곳이야 얼마든지 많겠지만 우리를 더 짙은 사람으로 만드는 길 앞에 결국 책이 있다는 사실을 이제 내손으로 마음껏 증명할거다. 지금의 나와 말랑하고 싶었던 9살의 나에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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