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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리 계좌

내 돈과 네 돈은 다르다

by 깜이집사

저녁 회식이 사라진 지 오래다.


이십 대 중후반이나 서른 언저리 젊은 친구들이 회사 인력의 절반을 넘었다. 점심이라도 같이 하자면 시큰둥한데 금쪽같은 저녁 시간을 낼 리가 없다. 회식도 업무의 연장이라는 말은 안 통한다. 자칫 강요라도 하면 괴롭힌다느니 갑질한다느니 하며 사내 익명 게시판에 글이 올라오기도 한다.


삼 년 넘게 이어진 코로나 시국도 한몫했다. 대면 활동이 줄어들다 보니 회식 없는 저녁이 대세로 자리 잡았다. 1차에서 회사돈으로 먹고 마신 뒤, 2~3차는 자리를 옮겨 질펀하게 놀았던 지난날에 비하면 격세지감이다.


내가 신입사원 땐 회사돈이 쌈짓돈이었다. 먹어보지 못했던 음식을 공금으로 자주 먹었다. 서른 살에 곁반찬과 코스 요리가 나오는 회세트를 처음 먹었다. 등심은 평범한 축이었고 해외 출장을 가면 우리나라에 없는 산해진미도 맛보았다. 외국 공무원들을 연수시킬 때는 호텔에서 며칠 먹고 자기도 했다.


물론 모두 근거가 있는 지출이었다. 워크숍이나 간담회, 업무 협의 등을 이유로 위로부터 사전 결재를 받았다. 나도 먹고 너도 먹으니 누가 누굴 나무라지 못했다. 내 돈도 네 돈도 아니니 좋은 게 좋은 거였다. 비싼 고급 음식이 회식과 행사에 빠지지 않은 이유였다.


이젠 그러기 힘들다.


정부의 예산 통제도 심해졌고 업무추진비 자체도 쪼그라들었다. 뭐 하나 먹으려 해도 안팎으로 쳐다보는 눈이 많다. 업무용 카드가 있더라도 그냥 제 돈으로 사 먹거나 아예 공식 행사를 자제하는 분위기다. 안 주고 안 받아먹는 '김영란법'도 영향이겠고.


만 원이면 만 원, 십만 원이면 십만 원, 내 주머니에 있든 네 주머니에 있든 돈의 가치는 같아야 한다. 그런데 실제로는 그렇지 않다. 내 돈 주고 꽃등심 먹긴 움찔해도 남 돈으로는 얼씨구나 한다. 힘들게 한 달 일해서 번 돈은 피 같고 길에서 주운 몇십만 원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진다. 로또 1등 당첨자가 몇 년 후 파산하거나 쪽박을 차는 보도는 지나친 비유일까? 이렇게 표면적으로는 똑같은 돈이라도, 돈에 대한 태도는 상황과 맥락에 따라 달라진다.


심리 계좌(mental accounting)는 사람들이 경제적 의사결정을 내릴 때 마음속에 나름의 계좌를 만들어 놓고 이익과 손실을 계산한다는 개념이다. '심적 회계' 또는 '심적 계좌'라고도 한다. 직원들에게 회사의 업무추진비는 등심과 회를 부담 없이 먹을 수 있는 계좌이다. 자기 주머니 돈으로는 등심과 회를 사 먹기 꺼려한다.


현실에서 이런 일은 한둘이 아니다.


내가 소비를 가장 많이 하는 달은 1~2월이다. 내 카드로 긁은 만큼 선택적 복지비 명목으로 회사에서 그대로 돌려준다. 때문에 사고 싶거나 사야 할 물건을 두고 나는 머뭇거리지 않는다. 지금 못 사면 늦게라도 사야 하기 때문에 이때다 하고 지른다. 자기 계발비로는 주로 책을 사들인다. 킥복싱 도장비 지원도 가능하다. 큰돈이 필요했던 아이패드도 자기 계발비로 딸에게 기분 좋게 사줬다. 선택적 복지비나 자기 계발비 모두 심리 계좌의 일종인 셈이다.


지난달 노동조합은 직원 화합 행사를 벌였다. 최대 네 명까지 점심을 같이 먹고 영수증을 제출하면 1인당 2만 원씩 지원해 주는 거였다. 들어오는 영수증 금액을 보니 40,000원, 43,000원, 59,000원, 80,000원... 2명, 3명, 4명씩 식사한 걸 단박에 알 수 있었다. 인당 점심 지원비가 2만 원으로 정해진 상황에서 어떻게든 4만 원, 6만 원, 8만 원으로 소비하는 게 유리하기 때문이다. 1,000원 또는 500원이 남는다면 풍선껌이라도 하나 사서 끼워 맞추는 게 옳다. 이러한 의사결정도 합리적인 방식의 심리 계좌라 할 수 있다.


신분증을 들고 은행에 가거나 스마트폰 인증을 해야만 계좌를 만드는 게 아니다. 이렇게 마음으로도 계좌 계설이 가능하다. 우리의 머릿속 계좌는 여러 개다. 계좌의 종류, 성질, 크기, 중요도는 사람마다 다르다. 심리 계좌는 올바른 소비생활을 하고 인생을 재미있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된다.



지난 코로나 시국, 국가는 초등학생을 둔 학부모들에게 10만 원어치의 온라인 상품권을 쏘아 준 적이 있었다. 명목은 아이의 급식비 지원금이다. 구입 품목이 샌드위치, 우유, 어린이용 음료수에 한정되어 있었지만 어느 편의점에서나 결재가 가능했다. 실제 구매한 제품이 아이들 입에 들어가는지 여부는 중요하지 않다. 지원금은 나에게 손실은 전혀 없고 이익만 있는 '공돈'이다. 10만 원은 내 머릿속에서 이미 내 돈이 아닌 셈이다. 똑같은 10만 원 이어도 정부가 나누어준 초등학생 급식 무료 바우처 지원금과, 내가 시간과 노력을 들여 어렵게 벌어들인 10만 원은 이렇게 다르다.


심리 계좌는 돈뿐만 아니라 시간이나 상황에도 적용 가능하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가장 빠르다'라는 속담도 시간 탓만 하지 말고 당장 행동하라는 뜻이다. 화가 나서 어이가 없거나 죽을 만큼의 고통을 겪을 때, 스스로 "일주일 후면 나는 죽는다"라고 되뇌어보자. 어떤 느낌이 드는가? 분노나 고통이 나를 지배한다고 생각하는가? 죽음 앞에서는 모든 게 무릎을 꿇는 마당에 순간의 분노는 우스울 뿐이다. 고통 또한 부질없을지 모른다. 지나버린 시간과 눈앞에 닥친 어려움은 내가 어떻게 해보지 못한다. 하지만 그런 시간과 상황은 새롭게 '해석'할 수는 있다. 한 마디로 뇌를 속이는 것이다. 마음을 바꿔서!


우리는 자신에게 주어진 돈을 은행 계좌뿐만 아니라 심리 계좌에 보관하며 산다. 생활비, 저축 자금, 주식 투자금 또는 아이들 교육비나 비상금 등으로 나누어서 말이다. 그렇게 하고 있음을 의식하지 못할 뿐이다. 시시각각의 필요에 대응하려고 이런 항목들에 심리적으로 '계급'을 정해 놓았음이 분명하다.


비용과 편익을 순간적으로 계산하고, 백화점 내 수만 가지 물건들의 효용가치를 단번에 비교해 내는 합리적이고 경제적 인간이라면 어느 항목에서나 돈을 꺼내 쓰면 그만이다. 항목에 상관없이 결국 다 내 돈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이렇게 항목별로 쓰임새의 정도와 중요도를 다르게 인식한다. 알게 모르게 갖가지 항목을 마음으로 만들어 놓고 거기에 '신성불가침'성을 부여한다. 이 돈은 절대 건드려서는 안 된다며.


돈에 쪼들려서 여행하기 어렵다고 볼멘소리 하는 사람들이 있다. 한 달에 한 번, 조금씩 강제로라도 여행경비를 적립해 보는 게 어떨까? 마음속에 여행경비 항목을 만들어 보자는 거다. 그렇다면 이 여행경비에 함부로 손대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일이 년이 지나면 여행 갈 가능성은 커진다.


다른 용도로 쓰이지 못하는 '서로 다른 계좌'는 우리 머릿속에 분명 존재한다. 계좌 속 돈이 적으면 적은 데로 많으면 많은 대로, 즐겁고 소소하게 소비한다면 더 바랄게 뭐 있겠는가.


심리 계좌의 힘은 생각보다 강하다. 돈뿐만 아니라 마음먹기에도 적용해 보자. 내 머릿속 생각을 누가 이래라저래라 할 것인가. 오직 당신에게 달려있다.




이것만 알자!


뇌를 속일 수 있다.

우리 머릿속에는 심리 계좌가 여러 개다.

심리 계좌의 종류, 크기, 중요성은 사람마다 다르다

심리 계좌는 돈뿐만 아니라 시간이나 상황에도 써먹을 수 있다

심리 계좌는 올바른 소비생활을 하고 인생을 재미있게 만드는 데 도움이 된다.

돈이나 시간의 손실, 벌어진 상황은 어찌하지 못하지만 이를 긍정적으로 해석할 수는 있다.




커버 사진 출처: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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