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 동료 한 명이 출장을 가는 바람에 둘이 점심을 먹었다. 우중충한 하늘에서 비가 쏟아질 듯했지만 몸을 움직여야 한다는 마음은 같았다. 여느 때처럼 한강 쪽으로 걸어 나갔다. 가양역 사거리에 들어설 무렵, 유모차에 개를 싣고 걸어오는 여인이 보인다. 이른바 개모차다.
차장이 한마디 한다.
"뭔가요 저거, 개가 탔네.... 난 어릴 때 유모차도 못 타봤는데..."
무심코 나도 한마디.
"그럼 차장님은 개만도 못한 건가요?"
"하하하 하하하"
워낙 격이 없는 사이라 서로 깔깔댄다. 그러면서 차장이 혀끝을 차며 몇 마디 더한다.
"쯧... 우리 처 O 과장은 개 유치원도 보낸다네요, 난 유치원도 못 다녔는데..."
"개 유치원이라고요?" 고양이 집사인 내게, 개 유치원은 생소하다. 들어본 적이 없다.
차장 왈, 개를 맡기면 조련사가 행동 훈련을 시켜준단다. '또래' 개들과 놀게도 해주는 데, 유치원을 다녀온 개의 태도가 눈에 띄게 좋아진다고 한다.
어찌 되었든 차장은 졸지에 유모차도 못 타고 유치원도 못 다녀본, 개보다 못한 사람이 돼버렸다.
차장의 학창 시절 이야기는 일전에 들었다. 미군이 떼로 지어놓은 구호(救護) 주택 단칸방에 다섯 남매가 부대끼며 살았다고 한다. 학교를 마치고 집에 들어가기 너무도 싫었다면서. 그게 한스러웠는지 자연스레 집에 집착하였다. 입사 초기부터 부지런히 발품을 팔고 공부했다. 오백만 원으로 경매부터 시작해서 몇 번을 갈아탄결과 지금은 서울과 인천에서 다주택자가 되었다. 뼈저린 고달픔이 스스로를 일으켜 세운 동력이 된 셈이다.
개모차, 개 유치원이 나올 거라 누가 생각이나 했을까? 개 보험, 개털 건조기, 개발 세척기, 개 화장장은 또 어떻고. 반려동물과 함께 사는 인구가 천만 명이 넘어 그런가 보다 하지만, 참으로 놀랄만한 세상이다.
수요가 있는 만큼 이를 놓치지 않고 기업들은 신제품을 내놓는다. 수요를 부추기는 일등 공신은 광고다. TV부터 SNS까지 보이고 들리는 게 광고다. 광고의 습격은 끝이 없다. 눈을 감고 귀를 막지 않는 이상 광고에서 벗어나기 힘들다. "날 사세요. 날 봐주세요. 이리 좀 와 보세요"라며 달콤한 유혹을 한다. 광고를 보고 머릿속 한편에 손톱만큼의 인상만 남아도 기업은 성공이다. 광고가 소비를 부추기고, 소비는 또 다른 수요와 욕망을 불러온다. 그만큼 '있는 자'는 수없이 많은 제품과 서비스를 소비함으로써 자기를 드러낸다.
하지만 20세기 말 무렵까지는 살만한 제품과 서비스가 부실했다. 그만큼 광고도 뻔했다. 부자는 그때도 있었지만 소비를 통해 부를 '플렉스' 하기가 쉽지 않았다.
냉장고면 냉장고지 김치 냉장고, 와인 냉장고, 양손형 냉장고가 없었다. 화장품이면 화장품이지 선크림, 주름개선 크림, 보습 크림, 영양 크림이 없었다. 휘황찬란한 모던풍 헬스클럽은 무슨 얼어 죽을! 학교와 직장에서 국민체조로 몸을 풀었고, 학교 철봉을 잡아 올리고 운동장을 냅다 뛰는 게 전부였다. 채널이라고 해봐야 KBS, MBC 등 다섯 손가락 안이었다. 지금은 각종 스트리밍 서비스부터 OTT까지 보고 싶은 대로 트는 시대지만 그땐 부자든 빈자든 틀어주는 대로 보았다. 국내에 쓸만한 재화와 서비스가 부족하니 돈 있는 사람들은 일산이니 미제니 하면서 수입품에 눈을 돌렸다. 돈을 싸 들고 있어도 해외에 마음대로 나가지 못했다. 1989년이 되어서야 해외여행이 자유화되었기 때문이다. 기껏 궁궐 같은 대저택에 살고 박스 그랜저 안에서 벽돌 휴대폰을 사용한 게 보통 부자들의 모습이었다.
지금 우리는 어떤가. 이웃과 나라의 손길이 필요한 소외 계층이 여전하지만, 대부분의 국민이 밥은 굶지 않을 정도는 되었다. 경제적 파이는 과거와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커졌다. 그럼에도 다들 빠듯하고 너도나도 쪼들린단다. 맞벌이를 해도, 아이들 학원 보내고 외식을 하며 놀이공원을 가려면 따져봐야 한다. 아침 독서하랴 저녁 독서하랴 성장 모임 참석하랴 파이프라인 구축하랴 정신이 없다. N잡러, 갓생러를 목표로 너도나도 달려 나간다. 좀 조용히 살기 어려울까? 가만히 있으면 뒤처지는, 아니 뒤처진다고 여기는 시대가 되어 버렸다.
마음이라도 굳게 먹어야겠다. 물질은 진보해도 사람의 정신은 수만 년 전이나 지금이나 크게 달라진 게 없다.
밑도 끝도 없는 비교, 이기심과 시기심, 우울감과 열패감, 아침저녁으로 달라지는 마음이다. 어쩌랴. 이게 사람이다. 시도 때도 없이 불쑥 올라오는 감정은 막기 어렵다. 맞서지 말고 요령껏 억눌러 어떻게 하면 긍정 에너지로 바꿀지 집중하자.
더 나은 내일을 위해 달려 나가는 건 좋다. 흥부네 집 저리 가게 쪼들리며 살았던 차장도 해냈다. 번듯한 집을 여러 채 마련하는 데 25년 가까이 걸렸지만, 어릴 적 한을 풀었다. 그러니 너무 조급해하진 말자. 느려도 세상은 안 무너진다.
그러니 사랑하는 사람들을 잘 살피고 자신의 몸을 챙기자. 그런 다음 돈이든 자유든 좇자. 건강을 잃는 순간 모든 게 멈추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