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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레저 여행가 Jan 04. 2024

러시아 식품회사가 만든 김치 사발면에 대한 고찰

출장러가 해외 출장을 즐기는 방식

저는 해외 출장을 가면 현지 음식과 문화를 최대한 즐겨보려고 노력하는 출장러입니다. 자칭 블레저 여행자(Bleisure traveller)죠.


  제가 하는 업무의 특성상 해외 출장을 갈 때 기간은 길어봐야 일주일 정도인 경우가 대부분인데요. 그러다 보니 저는 출장기간 동안 가능하면 현지 음식을 최대한 즐겨보려고 노력하는 편입니다. 그러다가 다행히 슬슬 고향에 있는 마누라의 음식맛이 그리워질 때쯤 되면 한국행 비행기를 타게 되고는 합니다.  


몇 달 전에 중앙아시아 지역에서도 중앙에 위치한, 이중내륙국인 우즈베키스탄으로 업무상 출장을 다녀왔습니다. 중앙아시아 국가로의 출장은 처음이었는데, 이번 출장에서도 지역의 싱싱한 토착 식재료들과 향신료들을 이용하여 만들어진 음식들을 최대한 즐겨 보려고 노력했던 출장이었습니다. 우즈베키스탄은 물가가 우리나라와 비교할 때 상대적으로 저렴한 편이라, 착한 가격으로 맛있고 즐거운 음식들을 많이 경험해 볼 수 있었습니다. 다만 우즈베키스탄이 이슬람 문화권에 속하는 국가라 밥 먹을 때 반주를 곁들이기에는 한계가 있는 점은 조금 아쉬웠습니다. 그렇다고 무슬림을 제외한 사람들에게까지 술이 금지된 것은 아니라, 귀국할 때 우즈베키스탄 산 보드카 한 병 사가지고 왔네요.


모든 계획된 일정을 모두 마치고 한국으로 출발하기 전날, 뭐라도 좀 살까 해서 일행들과 함께 숙소 근처에서 가장 큰 마트로 향했습니다. 마트는 꽤 넓고 물품도 많았지만, 어느 나라에서나 만날 수 있는 공산품들 외에 뭐 딱히 살만한 게 보이지 않아 마음이 약간은 조급해졌습니다. 그렇게 방황하던 제 눈에 작은 꿀병들 몇 개가 눈에 띄었습니다. 현지인으로부터 우즈베키스탄은 비단, 견과류, 꿀 이런 것들이 유명하다는 말을 들었던 말이 떠올라, 작은 꿀병들을 종류별로 몇 개씩 집어서 장바구니에 담았습니다. 가족과 회사 동료들 얼굴을 떠올리며, 일단 급한불은 껐다 싶은 마음으로요. 


슬슬 구경하다가 문득 라면들이 놓여있는 매장에 눈길이 갔습니다. 읽을 수 없는 현지어가 쓰여있는 컵라면들. 대한민국의 위상을 알게 해주는 여러 종류의 한국산 라면과 사발면들.  20여 년 전 제가 처음 해외 출장을 갔을 때와 비교하면, 정말이지 감동받아서 눈물이 핑 돌 정도입니다. 이젠 어느 나라에 가더라도 큰 슈퍼마켓에 가면 대한민국의 라면 정도를 찾는 것은 정말 일도 아니죠. 대한민국이 국력, 경제력, 문화 등 다 방면에서 선진국이 된 것을 실감할 수 있습니다. 저도 국내에 있을 때는 여러 기업들에게 불평을 좀 하는 편인데, 이렇게 한 번씩 외국에 나와보면 대한민국 기업들의 선전을 응원하는 애국자가 되는 것 같습니다.   


한편 K-culture가 전 세계를 휩쓸면서 불편해진 것도 있는데요. 그건 바로 한국어를 알아듣는 외국인이 늘어났다는 것입니다. 스타벅스에서 아아(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을 마시기 위하여 영어로 떠듬거리며 간신히 주문했는데, 주문을 받던 직원이 대뜸 "여기서 마실꺼니?"라고 묻는 정도는 이제는 흔한 일입니다. 자랑스러운 일 아니냐구요? 물론 자랑스럽습니다. 하지만 불편한 점도 있는데, 무심결에 한국어로 불만을 내뱉거나 욕설을 했을 때 주위 외국인들이나 현지인들이 알아들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어느 분이 친구랑 런던 여행을 하던 중 레스토랑에 가서 점심 식사를 했는데, 별로 맛이 없더랍니다. 

"친구야~ 여기 음식 비싸기만 하고 맛은 별로지 않니?"

했더니만 옆 테이블에서 식사를 하시던 흑인 여성분께서 대뜸 한국어로 이러더랍니다.

"너가 이해해. 여긴 런던이잖아."

라고 했다는 이야기를 들으면, 제가 외국을 돌아다니면서 했던 불평들이 떠올라 살짝 아찔해집니다. 뜬금없지만 영어밖에 못하는 미국인들은 해외에서 얼마나 불편할지 갑자기 안쓰러워지네요. 제 영어 실력을 고려하면, 오지랖 넓게 제가 미국인들의 어학 실력이나 걱정하고 있을 상황은 아닌 것 같기도 합니다만.


여하튼 타슈켄트의 시내에 위치한 대형 마트 라면 매대에 한글로 '김치'라고 쓰여있는데 뭔가 어색한 사발면 하나를 발견하였습니다. 다가가서 자세히 보니  Rollton사라는 곳에서 만든 김치 사발면이었습니다. 인터넷에 검색해 보니 Rollton사는 러시아의 라면 회사라고 합니다. 여러 정보들을 모아본 결과, 이 회사에서 만든 라면들이 카자흐스탄, 우즈베키스탄, 벨라루스 등 CIS 국가들에서 상당히 인기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러시아 라면 회사에서 만든 김치 사발면이라. 뭔가 좀 특이한 걸 보면 경험해보고 싶어 하는 기질이 있는 저로서는 그냥 넘어갈 수 없는 상황입니다. 대한민국 대표 음식 중 하나인 김치를 주제로 한 즉석 라면을 만들기 위하여, 러시아 사람들은 대체 김치의 특성을 어떻게 해석해서 라면의 맛으로 재구성했을까? 몇 개 사고 싶었지만 이미 캐리어가 포화 상태인 점을 고려하여, 어쩔 수 없이 하나만 사 왔습니다.




 집에 와서 짐을 풀고, 특이하기 짝이 없는 러시아 라면회사가 만든 김치 사발면은 주방 싱크대 선반에 다른 한국 라면들과 함께 두었습니다. 귀국하고서 여러 일들로 정신없어서 우즈베키스탄에서 사 왔던 김치 사발면의 존재를 한 달 정도 잊고 지냈습니다. 날씨가 꽤나 쌀쌀했던 토요일 이른 오전, 식구들은 아직 수면 상태이고, 저 혼자서 배는 출출하고. 간단히 뭘 먹을까 고민하던 저에게 싱크대 선반에 보관해 두었던 러시아제 김치 사발면이 번뜩 생각났습니다. 사발면 표지에 적힌 조리 방법을 해석해 보았습니다. 프로 출장러의 경험으로 대략 유추해 보니, 건더기와 분말 스프를 넣고 뜨거운 물을 부은 다음, 5분 정도 기다렸다가 먹어라. 뭐 이런 내용인 것 같았습니다. 5분이라. 우리나라 사발면들이 보통 3~4분 정도인 것을 고려하면 살짝 긴 시간입니다. 과감하게 포장을 뜯었습니다. 외국 대부분의 사발면이 그렇듯이, 이 제품에도 일회용 포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여튼 시키는 데로 분말 스프와 건더기를 넣고, 뜨거운 물을 붓고 나서 5분간 설레는 마음으로 기다렸습니다. 5분이 지난 후 떨리는 기대감과 함께 조심스레 사발면 뚜껑을 열었습니다. 두둥~ 흠 비주얼은 제가 상상했던 김치 사발면에서는 거리가 조금 있어 보였습니다.   



먼저 라면의 국물 색깔이 뭔가 애매한 느낌입니다. 빨간 국물도 아니고, 맑은 국물도 아닌 애매하게 불그르죽죽한 색. 뭔가 활력이 조금 부족해 보이며.. 뭐랄까 맛있겠는걸? 뭐 이런 교감이 라면과 저 사이에 생기지 않았습니다. 검붉은 건더기 덩어리들도 김치라고 보기에는 무리가 조금 있습니다. 하지만 타슈켄트에서부터 가지고 왔던 저의 노력을 생각하면서, 사발면 용기를 들어서 뜨거운 국물을 한 모금 마셔보았습니다. 혀를 스치고 나서 목구멍을 타고 흘러내리는 국물은 김치의 매운맛 이라기보다는 뭐랄까 김치맛을 인위적으로 흉내 내려고 하는 듯한 시큼한 느낌의 국물맛입니다. 사발면 용기에 내장되어 있던 일회용 포크를 이용하여 면을 돌돌 말아서 입에 넣었습니다. 너무 탱글탱글한 느낌이 살짝 어색합니다. 국물과 면과 건더기가 어울리지 못하고 따로 노는 느낌. CIS 지역 현지인들 입맛에 맞춰 현지화가 된 맛인지는 모르겠습니다만, 한국인들이 즐기기에는 재미가 없었습니다. 이탈리아 분들이 한국에 와서 냉동 불고기 피자를 사서 오븐에 데워드셨을 때 이런 느낌일까? 여러 가지 생각을 하며 마지막 국물 한 방울까지 마셨습니다. 그제서야 우즈베키스탄 출장이 마무리된 기분이 들었습니다.


해외 출장을 다니시는 방식에 정답이라는 것은 없고, 단지 각자의 길이 있을 뿐입니다. 우즈베키스탄을 비롯한 중앙아시아 지역으로 떠나실 출장러 분들 중 새로운 맛에 도전해 보는 것을 즐기시고, 예상치 못한 맛을 만났을 때도 당황하지 않고 즐거워하시는 분들께 이 김치 사발면을 권해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외국회사에서 김치 사발면을 만들어서 팔고 있다는 것에 대하여, 한국인으로서 자랑스러워하며 글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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