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먹을 수 있는 여자』(The edible woman)
마거릿 애트우드(이은선 역, 2020), 『먹을 수 있는 여자』(The edible woman), 은행나무
드라마 <킬링 이브>(Killing eve) 시즌 2 에피소드 5에는 다음과 같은 대사가 등장한다.
"Did you know that babies literally steal the calcium from your teeth? Little bastard is eating me alive."
이 대사를 한 사람은 임산부다. 그녀의 저 말이 잔인하거나 무정하거나 혹은 이상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사실 그렇다. 뱃속의 아이는 엄마를 빨아먹음으로써 자란다. 그것도 산 채로. 결혼, 임신, 출산, 육아는 생각처럼 그렇게 아름답지 않다. 이것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여자를 먹어 삼킴으로써 완성된다. 『먹을 수 있는 여자』는 1960년대 캐나다를 배경으로 사회가 어떻게 여자를 음식으로 치환해 먹어치우는지를 결혼을 통해 적나라하게 그린다.
총 3부로 이루어진 소설은 주인공 메리언이 피터로부터 청혼을 받기 전후로 나뉜다. 친구 클래라의 표현에 따르면 메리언은 "거의 비정상에 가까울 정도로 정상"(289쪽)인 인물이다. 남들 입에 오르내릴 일은 하지 않고 일이든 인간관계든 갈등 없이 무난히 해내려고 한다. 그래서 결혼한 B사감 버전 같은 집주인 여자와도, 제멋대로 자유분방하게 사는 룸메이트 에인슬리와도 큰 마찰이 없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메리언은 눈치가 빠르다. 덕분에 외모도 직업도 꽤 훌륭한 피터와 꽤 오랜 기간 동안 데이트하는 관계를 유지했고 끝내 그로부터 청혼을 받게 된다. 그런데 이때부터 메리언은 혼란을 겪기 시작한다. 만날 일 없던 남자를 만나고 전에는 절대 하지 않았을 일을 한다. 비밀이 생겨나고 일탈하는 상황이 벌어진다. 그리고 먹을 수 없게 된다. 고기에서부터 시작된 거부 반응은 채소에까지 이어져 먹는 행위 자체를 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른다.
메리언의 거식증은 소설의 서술 시점 변화와 함께 일어난다. 시종 메리언의 1인칭 시점에서 서술되던 소설은 그녀가 청혼을 받고 난 뒤부터는 3인칭 시점으로 진행된다. 결혼과 직접 연관되기 시작하면서 "나"는 "메리언"으로 분리되고 이 분리된 "메리언"은 음식에 이상 증세를 보인다.
1인칭은 주체를 드러낸다. 메리언이 자신을 '나'로 지칭할 때 그녀는 '메리언'과 '나'를 동일시한다. 주체는 소외되지 않고 호명된 이름과 일치한다. 정체성은 흔들리지 않고 무의식은 안전하게 억압된다. 반면 3인칭은 '나'를 소외시킨다. '내'가 사라진 자리는 '메리언'이라는 이름이 차지한다. 여기서 '나'와 '메리언'은 일치하지 않는다. 이 불일치가 무의식에 틈을 만든다. 의식의 층위로 올라온 무의식은 '내'가 이해할 수 없는 일을 '메리언'으로 하여금 하게 한다. 거식증이 대표적인 증후(symptom)다. 자기 자신과 괴리된 몸은 음식을 먹고 씹고 삼키기를 거부한다. 동일성을 상실한 몸은 "정상"의 범주에 머물기를 멈춘다. 그렇다면 왜 소외된 몸은 먹기를 거부하나? 먹는다는 건 어떤 의미인가?
먹는다는 것은 대상을 파쇄하여 흡수하는 행위다. 입 속에서 부서진 음식물은 식도를 거치고 위장으로 내려가면서 유동체로 바뀐다. 영양분은 섭취되고 찌꺼기는 버려진다. 본래의 구체적 형태는 입 안에서 부서져 사라지고 그렇게 분해된 대상은 몸에 흡수된다. 그러니까 먹는다는 것은 동화되는 것과 연결된다. 메리언의 거식증은 동화되는 것에 대한 거부 반응이자 자기 소외에 대한 강한 부정으로 해석할 수 있다. 그녀의 거식증은 결혼식이 다가올수록, 피터의 통제와 지배가 강해질수록 심해진다. 가부장적 사회는 메리언의 이러한 증세를 '히스테리'라 명명하고 비하했다. 히스테리는 여성을 음식처럼 소비하는 가부장적 사회에 대한 증후이자 거부 반응이다. 가부장적 사회는 사실상 이러한 상징적 식인 행위를 통해 지탱되어 왔다.
인류학자 나카자와 신이치는 '식인'을 "구체적인 형태를 지닌 대상을 삼켜서 파괴함으로써 추상적인 유동체로 바꾸어버리는 능력을 가진 존재를 표현한 원시적인 개념"(김옥희 역, 2013, 『곰에서 왕으로』, 동아시아, 217쪽)이라고 했다. 이때 먹는다는 것은 삼킨다는 파괴 행위를 통해 추상적 유동체를 재생산하는 과정을 지칭한다. 메리언이 사회라는 제도에 속하기 위해선 피터라는 남성에게 먹힌 뒤 재생산되야만 한다. 이 동화 과정을 통해 여성은 아내와 엄마로서 가부장적 사회에 성공적으로 순응한다. 메리언은 도중에 알레르기 반응이 일어난 경우라 할 수 있다.
메리언의 첫 일탈은 일하는 중 우연히 만난 영문학과 대학원생 덩컨과의 밀회였다. 덩컨은 자기 세계에 매몰된 채 살아가는 학생으로 빨래방을 좋아하고 다림질에 집착한다. 전형적인 가부장적 남성인 피터와 달리 그에겐 남자다운 구석이랄 것이 전혀 없다. 피터는 메리언을 수동적으로 만들고 덩컨은 능동적으로 만든다. 메리언의 분열된 자아는 양극단에 있는 두 남자 사이를 오가며 방황한다. 그러나 어느 쪽이건 불안하기는 매한가지다. 마초인 피터나 아무것도 책임지려 하지 않는 덩컨이나, 둘 다 메리언의 불안과 혼란만 가중시킬 뿐이다. 문제는 두 남자 모두 "메리언"을 원하는 게 아니라는 점이다. 피터는 완벽한 아내를, 덩컨은 완벽한 엄마를 메리언에게 요구한다. 수동적이건 능동적이건 이들은 오로지 자신만을 위한 여성성을 메리언에게 강요할 따름이다. 그러니 메리언은 어느 쪽도 편할리 없다.
그리고 메리언은 케이크를 만든다. 며칠째 아무것도 먹지 못한 채, 자신을 꼭 닮은 여자 형상의 케이크를 만든다. 피터가 이 케이크를 먹으면 자신의 거식증도 사라질 거라 희망하면서. 하지만 피터는 맛있게 먹으라며 케이크를 건네는 메리언을 등지고 나간다. 피터는 손도 대지 않은 케이크를 메리언은 입맛을 다시며 입 안으로 집어넣는다. 케이크를 먹으며 메리언은 음식 거부 반응이 일어나지 않음을 느낀다. 그렇게 피터를 위한 만든 "먹을 수 있는 여자"를 메리언이 먹어치운 후 소설은 메리언의 1인칭 시점으로 다시 돌아간다. 물론 메리언은 피터와 파혼하고 덩컨과도 정리한다.
『먹을 수 있는 여자』에는 네 명의 주요 남자 인물이 등장한다. 약혼자였던 피터와 외도 상대였던 덩컨, 클래라의 남편인 조, 메리언의 친구이자 순결하고 어린 여자만을 찾아다니는 렌. 이 네 남자에게 여자란 적당한 장식물이거나, 심리적 안정을 위한 수단이거나, 보호하고 숭배해야 할 연약하고 아름다운 존재거나, 정복 내지 혐오의 대상이다. 욕망과 결핍과 증오가 뒤죽박죽인 이들 남성의 시선 속에서 메리언을 비롯한 에인슬리와 클래라 같은 여자 인물들은 각자의 방식으로 돌파구를 찾는다. 독립을 하건 결혼을 하건 엄마가 되건, 어쩌면 방식은 상관없을지도 모른다. 소화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가 소화하는 것이라면 어떤 이름으로 호명되든 괜찮지 않을까. "여성성"이 뭔지는 아무도 모른다. 실체가 없는 그것이 나를 잡아먹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면 사실 뭐든 "여성성"이 될 수도 있을 것이다. 먹힌다고 한들 어떤가. 엄마는 아이가 자신을 산 채로 잡아먹어도 행복할 수 있는 인간이다. 애초에 여성이란 끊임없이 먹히고도 생존한 존재이지 않나. 동화될 듯 끝내 동화되지 않아서 그토록 가부장제는 오랜 세월 애를 태웠을 것이다. 지금도 여전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