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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록 Sep 01. 2024

자존감

증명할 필요 없는 것

친구 V가 본인의 자존감이 낮은 것 같다고 말했다. 그 말을 듣은 나는 생각했다. 

'뭔 헛소리지?'

이 친구를 만나면서 자존감이 낮다고 느껴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일단 입을 다물고 친구의 말을 들어보기로 했다. V는 말했다. 

"능력이 입증되지 않으면 어떻게 자존감이 높을 수 있어?"

능력을 증명하려면 결과물이 필요한데 자기에게는 결과물도 없을뿐더러 결과를 만들어낼 의지도 없다는 것이다. 


새롭고 또 충격적이었다. 자존감에 결과물이 필요한가? 




'능력'이란 타이틀은 타인에 의해 부여된다. 그러므로 '능력 있는 사람'으로 불리기 위해서는 친구의 말처럼 결과물이 필요하다. '능력'이란 단어가 타인으로부터 부여되기 때문에 그 단어를 얻으려면 타인의 검증이 필요하고, 그러려면 나 혼자 보는 것이 아닌 타인도 볼 수 있는 가시적인 결과물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V의 말이 어딘가 이상하게 느껴졌던 건, 정확히 그 반대가 내가 생각하는 자존감이었기 때문이다. 


세상 밖으로 꺼내놓을 수 있는 능력들은 대개 타인에 의해 이름 붙여진다. 누군가에게서 '수학을 잘한다'는 소리를 들으려면 그 사람에게 먼저 나의 수리 능력을 보여줘야 하고, '그림을 잘 그린다'는 소리를 들으려면 먼저 그림을 보여줘야 한다. V의 말이 맞다. 타인에 의해서 능력을 인정받으려면 그들의 눈에 보이는 결과물이 있어야 한다. 다른 사람들은 내 내면에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매번 결과물을 가져오는 것은 힘든 일이다. 힘든 것뿐만 아니라 결과물을 만들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리는 일 또한 존재한다. 바로 그게 자존감이 필요한 이유다. 타인에게 능력을 인정받으려면 결과물이 필요하지만, 나에게 인정받으려면 그렇지 않기 때문이다. 


매번 건강한 음식을 챙겨 먹는 건 꽤 어려운 일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렇게 다른 사람에게 말한다면 그런 게 뭐가 중요하냐고 말할 수도 있고,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다. 식단 챙기기가 어려운 일이라는 것을 '인정'받으려면 먼저 그 일을 증명해줘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 언쟁의 결과가 어떻게 나든 간에, 한 가지 진실은 '나'에게 있어서는 식단 챙기기가 어려운 일이라는 점이다. 그 점은 바뀌지 않는다. 그러므로 건강한 식단 인생을 사는 데 성공한 나는 대단한 일을 한 것이다. 설령 다른 사람이 인정하지 않더라도, 혹은 그 힘듦의 정도에 동의하지 않더라도 말이다. 


애당초 다른 사람들은 내 식습관에 관심도 없다. 그러나 나는 다르다. 식단을 챙긴다는 어려운 일을 해낸 나는 멋진 놈이고, 그런 나에게 박수를 보내주는 것이다. 나 자신이 나에게. 증명은 필요 없다. 

다른 사람들은 동의하지 않을 수 있지만 나는 내 눈이 마음에 든다. 혹은 내가 예쁘거나 잘생겨 보일 때가 있다. 그런 내가 좋다. 이 감정은 다른 사람에게 평가받지 않아도, 인정받지 않아도 된다. 


내가 글을 쓰는지 안 쓰는지 다른 사람은 알 게 뭐람? 내가 방 정리를 했는지, 오늘 하루 하고자 하던 일을 다 마쳤는지, 초콜릿쉐이크를 안 먹기로 한 나 자신과의 약속을 지켰는지 알 게 뭐란 말인가? 그러나 이 알 바 없는 일들이 나에게까지 아무것도 아닌 것들은 아니다. 나는 내가 얼마나 노력했고, 얼마나 대단한 일을 해냈는지 알고 있다. 

나는 내가 어떤 삶을 살아가는지 다른 사람보다 훨씬 잘 알고 있고, 다른 사람들이 알지 못하는,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은 장점과 잠재 능력도 알고 있다. 세상에 모든 것을 꺼내놓고 공유하려 할 필요는 없다. 나는 그들이 모르는 내 세세한 능력을 알고, 그것들을 축복받았다 표현할 수 있다. 


자신과 이야기할 때 우리는 자유의 몸이 된다. 타인의 시선 혹은 평가에서 잠깐 벗어나 쉴 수 있는 곳을 만드는 것이 나를 사랑하고 아끼는 방법이 아닐까. 

나는 나의 최고의 친구다. 그런 나 자신의 조그마한 성취를 함께 기뻐하는 것. 이것이 내가 생각하는 자존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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