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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록 Sep 04. 2024

야매주의자

영생 pt.2

어느 날 지인과의 대화에 우연히 같은 주제가 올라왔다.


"영생은 좋을까?"


나는 앞서 말한 이유로 유한성 때문에 삶이 소중하다고는 못하겠다 이야기했다.


"다들 무한한 삶은 살고 싶지 않다고 말해. 무한한 삶을 살면 순간의 소중함을 알지 못할 거라면서."


인간은 죽고 싶어 하지 않는다. 삶을 더욱더 이어나가고 싶어 한다. 영생을 손에 넣기 위한 여정의 이야기, 인간 수명을 늘리다 만들어진 디스토피아의 이야기, 영생을 살기 위해 노력한 인류의 흔적들. 이야기의 주인공들은 항상 영생을 쫓지만 이야기들의 교훈은 항상 영생을 바라지 말라는 내용이다. 그리고 말한다. 삶이 무한하다면 순간의 소중함을 알지 못할 거라고 말이다.


"그 말에 동의할 수 없어. 어떻게 확신해?"


그러나 내 말을 들은 지인은 잠시 입을 다물더니 물었다.


"그럼 너는 영생을 살고 싶어?"

"그건 모르지. 내가 하는 말은 영생을 사냐 안 사냐가 삶의 중요성을 결정짓지는 않는다는 거야."


그의 대답은 깔끔하고, 덤덤했다.


"영생은 네 생각보다 길어."


그 말을 듣고서야 내가 동의하지 않는 의견을 냈던 사람들처럼 나도 문제를 제대로 파악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5억 년 버튼이라고 들어본 적 있는가? 한 번 누르면 5억 년 동안 아무것도 없는 곳에 갔다 와야 하지만 갔다 온 뒤에는 100만 원을 받고 그곳에 있던 기억도 싹 잊게 된다는 그런 버튼 이야기다. 당신이라면 그 버튼을 누르겠는가?

5억 년 버튼의 이야기를 들은 나는 그 5억 년이 얼마나 영겁의 시간으로 느껴질지 아득했다. 고작 5억 년도 버티기 힘들 것이라고 생각한 주제에 50억, 5000억 년을 어떻게 버틸 자신이었던 걸까. ‘영원’이라는 것이 5000억이 훌쩍 넘는 스케일이라는 사실을 깨닫자 가벼이 내뱉던 '영생'이 까마득해 보였다. 내가 생각하고 있던 것은 고작 100년의 삶 끝에 죽지 않는 것 정도였고, 그 이후는 제대로 생각해보지도 않은 것이다.


수학에서 무한이란 숫자가 아닌 과정이다. 무한을 받아들이듯 삶을 바라봤던 것은 이 날이 처음이었던 것 같다. 오히려 안일하게 생각하고 있었던 것은 나였을지도 몰랐다.


그때부터일까, 종종 유한한 삶에 대한 생각을 한다. 아직도 유한하기에 삶이 소중하다는 의견에는 동의하지 않지만, 유한하기에 편한 일들이 꽤 있다.

예를 들어 스파게티 브릿지를 만드는 대회를 했다고 치자. 만약 인생이 무한하다면 확률적으로도 이런 짓을 할 기회가 무한히 많이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처음 할 때 완벽하게 하는 것이 낫다. 그러면 몇 번의 연습을 거친 뒤에는 아주 효율적인 스파게티 브릿지 건설가가 될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갈고닦은 스킬은 이후 무한한 횟수의 스파게티 대회에서 요긴하게 사용될 것이다.

그러나 유한한, 100년 남짓의 삶에서는 어떤가? 일반적인 사람이 스파게티 브릿지 만들기를 할 일이 몇 번이나 있을까. 많아야 세 번 아닐까? 그러나 스파게티 브릿지를 완벽하게 만들기 위해 연습해야 하는 횟수는 세 번은 훌쩍 넘는다. 그렇다면 유한한 삶을 사는 우리는 분명 스파게티 다리를 만들 때 완벽주의자가 되는 것보다는 그때그때 멋진 임기응변 능력을 발휘해 주는 게 낫다.


많은 경우가 이 스파게티 브릿지와 비슷한 상황일 것이다. 완벽하게 만들기 위한 연습의 횟수보다 적은 횟수의 경험이 삶에 주어지는 경우, 야매로 무언가를 해도 되는 경우 말이다. 어릴 적의 나는 완벽주의자였다. 커서도 뭔가를 깔끔하게 정리하고 완벽하게 해야 한다는 강박이 없지 않았다. 그러던 중 우리는 영생을 누리지 않기 때문에 임기응변으로 허술한 결과를 내도 된다는 생각을 하자 어쩐지 안심이 되었다.


나에게 있어서 영생을 살지 않는다는 사실이 위안이 되는 이유는 우리가 한정된 삶 속에서만 삶의 소중함을 배울 수 있어서가 아니다. 우리는 100년밖에 살지 않기 때문에 어떤 실수를 해도 100년만 견디면 되고, 무언가를 배울 때마다 완벽하려 조심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곧, 완벽주의자가 아닌 야매주의자로 살아도 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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