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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블록 Sep 09. 2024

세계∩예술

3. 물리학도지만 연구자는 아니다

같은 과 친구 두 명과 바닥에 떨어진 유리병과 페트병을 발로 차면서 그 궤적과 날아가는 정도에 대한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나눴다. 그들은 이야기를 나누며 아주 즐거워보였다.


하지만 나는?


내가 이 상황에 할애한 뇌세포는 상황을 인지하는 것이 전부였다. 나는 잔디를 발로 짓이기며 '그래 너네 실컷 즐겨라' 하고 생각했다. 잔디가 뭉개졌다 다시 고개를 드는 모습을 관찰하는 쪽이 더 재미있었다.


명색이 물리학과인 인간에게 있어서는 이상한 일이다. 나는 우리 학과 친구들처럼 새가 어떤 원리로 하늘을 나는지 궁금해하지 않는다. 유리병과 페트병이 날아가는 궤적에 환호하지 않고, 바다를 보며 파동에 대해 생각하지 않는다.




'현실'이라는 단어는 불변의 무언가, 상상력이라고는 가미되어있지 않은 무미건조한 것으로 취급된다. 판타지 같은 것들을 마법이라고 배제할 때 사용할 수 있는 '판타지'의 완벽한  반의어로 말이다.


하지만 현실은 사실 판타지와 비슷하다.


고등학교에서 가르치는 물리는 뉴턴역학에 기초한다. 원인과 결과에 집중해 물체의 움직임을 해석해 나간다. 하나의 상태가 있고, 그 상태에 어떤 '변화'가 가해졌는지 정확히 안다면 미래의 경로를 예측할 수 있게 된다는 식으로 말이다.


너무너무 당연해서 나는 대학에 갈 때까지 한 번도 다른 해석법의 존재를 떠올려본 적이 없었다. 아니, 뉴턴역학이 일종의 '해석'이라는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다. 그러나 꼭 원인과 결과로 세상을 해석할 필요가 있을까? 이 방법이 과연 유일한 해석법일까? 아니었다. 원인, 그리고 결과란 우리 인간이 익숙해져 있는 것들일 뿐이었다. 우리가 익숙하다고 해서 진실일 필요는 없다.


지동설이 세계가 우리를 중심으로 돌지 않는다는 사실을, 특수상대성이론이 시간과 공간은 절대적인 존재가 아니라는 사실을, 양자역학이 미시세계는 거시세계와는 다른 원리로 움직인다는 사실을, 우리가 익숙해진 '세계'가 진짜일 필요는 없다고 몇 번이고 일깨워주었다. 마찬가지로, 뉴턴역학만이 진리이거나 유일한 해석방법일 필요는 없었다.


해밀턴 역학이 다른 해석법을 제시한다. 해밀턴역학은 뉴턴역학처럼 원인과 결과에 집중하지 않고 '최소 작용의 원리'에 기반한다. 상태가 A에서 B로 변할 때 역학적 에너지의 차이가 최소가 되는 경로로 변화가 일어난다는 식이다. 세상이 돌아가는 방식을 '원인과 결과'로 해석할 수도 있는 반면, 모든 것에 대해서 '최소의 무언가'를 도출해 내는 경로를 택하는 방식이 되는 걸로 생각할 수도 있는 것이다. 해밀턴 역학뿐만 아니라 다른 해석법이 또 존재할지 모른다.


우리는 현실이란 아주 견고하며 상상력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고 믿지만  잘 생각해 보면 현실주의자라는 개념은 누가 만든 것인가? ‘현실’이란 ‘현재 실제로 존재하는 사실이나 상태’를 말한다. 실제와 존재란 철학에서도 많이 논의되는, 그렇게 견고하지는 못한 단어들이다.


일상만을 관측할 수밖에 없는 우리의 시각에서 현실이란 예측 가능한 지루함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우리가 사용하는 '현실'이란 단어가 일컫는 바란, 우리가 해석한 현실을 말하는가 아니면 그 너머의 추상적이고 우리가 모를 수도 있는 무언가를 말하는가? 일단 우리가 해석한 현실이란 그렇게 견고한 것이 아니다.


우리는 현실이란 주무를 수 없고 고정된 형태를 가진 도자기 같은 것이라고 생각하지만, 물리학자란 판타지를 상상할 수 없는 자들이라고 믿지만 현실이란 그렇게 견고한 것이 아니고, 뉴턴역학이냐 해밀턴역학이냐 하는 것처럼 관점을 바꾸면서 주물럭거릴 수 있는 찰흙 같은 존재에 더 가깝다고 본다.




내가 물리학과 학생이 되는 것이란 비이성적으로 비싼 돈을 내고 자발적인 고문을 당하는 취미라고 생각해 왔다. 이렇게 강한 강도의 고문일 줄은 몰랐지만 후회하지는 않는다.


나는 과학계에 몸담고 싶지 않다. 전부터 이론을 보는 건 재밌었지만 연구자는 사양이었다. 우리 학과의 특성을 살리는 정석적인 직업을 쏙쏙 피해 가는 멋진 입맛이지만 애초에 다른 목적으로 과를 선택했으므로 어쩔 수 없다.


과학의 본질인 세상은 창의적이지 않다. 창의적일 수 없다. 우리는 세계를 창조하지 않았고, 창조할 수 없다.

하지만 나는 창의적인 게 좋다. 무언가를 창조해내고 싶다.


세상은 어찌 됐건 이미 존재한다. 과학은 해석이고, 현실이 판타지와 닮아 주무를 수 있는 견고하지 않은 것이라는 사실이 아름답다. 그러나 우리가 아무리 주물러도 찰흙의 질량이나 부피는 바뀌지 않는다. 과학계에서 알아내고 싶어 하는 것들에는 정답이 있다. 그저 우리가 답을 모를 뿐이다. 세상은 보이지 않는 정답과 함께 존재하며, 그 정답이란 우리 인간으로 인해 바뀌지 않는다.


나는 전부터 사람들이 '이미 만들어놓은' 이론에만 관심이 있었다. 그것으로 충분하기 때문이다. 과학에서의 내 목적은 궁금증이 아니라 '세상'이라는 작품을 감상하는 데 있다. 그러니 궁극적인 답을 원하지 않는다. 값비싼 취미이자 자발적 고문. 그것으로 된 것이다.


그러니 어째서 새가 날아다닐 수 있는지 궁금해하지 않는다. 하지만 만약 새가 날아다닐 수 있는 이유에 대한 흥미로운 이야기, 내가 예상도 상상도 하지 못했을 이야기들을 해준다면 귀 기울여 들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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