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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혜일 Jun 03. 2021

그 시절 너는 놀이터 죽돌이였다네

새 학기가 시작한 뒤 어느덧 4개월째. 초등학교 2학년인 큰 아이 EH와  또래 친구들은 하교 시간, 놀이터를 꼭 들린다. 학교에서 가장 가까운 놀이터는 우리 아파트 단지 안에 있다. 처음엔 다 같은 단지에 사는 아이들인 줄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앞 단지, 뒷 단지, 심지어 꽤 먼 거리의 길 건너 아파트 아이들까지 와서 노는 것이었다.


아이들이 우리 단지 놀이터에서 많이 노는 데는 여러 이유가 있다. 학교 바로 옆일 뿐만 아니라 유난히 나무 그늘이 많아 햇볕에 방해받지 않고 오래 놀 수 있기 때문이다. 놀이터 시설이 아무리 좋아도 땡볕을 막아줄 그늘이 없다면 계절과 시간의 제약을 많이 받게 된다.


무엇보다 핵심은 엄마들이 앉아서 기다리거나 담소를 나눌 수 있는 공간이 잘 마련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얗고 널찍한 천막 아래 레이아웃까지 잘 된 테이블과 의자들. 커피나 음료수만 있으면 엄마들의 노상 카페는 완벽하다. 그러나 함정은 코로나 상황이라는 것. 마스크를 낀 채 간식 하나 마음대로 먹기 힘든 이 곳에서 나는 작년과 올해 연이어 놀이터 죽돌이 엄마로 살고 있다.   



   




'같은 장소에서 죽치고 오랫동안 머물러있다'해서 죽돌이, 죽순이라는 말이 생겼다. 그 장소가 얼마나 즐겁고 좋으면 그럴 수 있을까. 놀이터에 매일 나와 있으면 누가 죽돌이, 죽순이들인지 보인다. 주야장천 같은 놀이터에서만 짧게는 두세 시간, 길게는 대여섯 시간을 노는 아이들. 이들이 노는 모습은 거침없다. 뭘 하고 놀지 몰라 헤매거나 쭈뼛거리는 일도 없다. EH를 포함한 우리 죽돌이들의 놀이 중 가장 흥미를 끄는 모습은 단연 분수대 안에서 축구를 하는 것이다.


엄마들의 노상 카페 옆에는 커다란 분수 시설이 있다. 하지만 아파트 초창기에만 운영하고 지금은 물을 다 빼내어 쓸모없게 된 공간이다. 아이들은 언젠가부터 이 안에 들어가 축구를 하기 시작했다. 물론 골대도 없고 중간중간 그리스 신전의 석고 기둥같이 생긴 장애물까지 있다.


사실 얼마 전까지 기둥과 기둥 사이에는 '공놀이 하지 마시오'라는 커다란 현수막이 버젓이 붙어있었다. 원칙상 놀이터에서는 공놀이가 금지다. 놀이터 밖으로 단지 내 주정차 차량이 왔다 갔다 하기 때문이다. 자칫하면 튕겨져 나간 공을 찾는 아이들과 차가 부딪히는 사고가 일어날 수도 있다. 아이들은 공을 차다 경비 아저씨께 몇 번 혼나기도 했다. 하지만 물 빠진 분수대를 자체 축구장으로 만든 아이들의 열정은 어른들께 매번 혼이 나도 꺾이지 않았다.


그런데 최근에 이 현수막이 떼어졌다! 코로나 때문에 학교 운동장을 쓸 수 없는 짠한 아이들을 아파트 관리소 측에서 이해해준 걸까. 현수막이 떼어지니  엄마로서 그동안 편치 않았던 마음속 딱지도 떼어진 기분이었다. 경비 아저씨도 이제는 아이들을 혼내시지 않는 것 같다. 아이들은  분수대 안에서 최대한 공이 밖으로 나가지 않게 힘 조절을 해가며 신나게 공을 찬다.  


한편, 죽돌이의 엄마들이 나처럼 모두 놀이터에서 함께하는 것은 아니다. 3학년 정도 되면 혼자 학원을 가거나 집에 들어갈 시간을 조절해가며 놀 줄 알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아래 동생들은 아직 그것이 서툴러 엄마들이 동행한다. EH도 마찬가지다. 태권도 학원 차에서 내리면 집으로 곧장 들어오라는 엄마 말은 아랑곳하지 않고 놀이터로 직행하기 일쑤다. 하교 후 곧바로 두어 시간은 놀았으면서도 말이다. 그렇게 되면 간식 타임, 독서 타임, 숙제 타임 등 내가 정해 놓은 계획들은 사라지거나 뒤로 밀려버린다. 놀다 보면 십 분 만 더, 오분만 더 하다가 시간이 훌쩍 지나간다. 이럴 땐 나도 바람 빠진 풍선처럼 기운이 쪽 빠져버린다. 그리고 말을 듣지 않는 아이에게 서운하기도 하다. 하릴없이 앉아 아이들을 쳐다보기만 하는데도 놀이터에 있으면 왜 그리 쉽게 지치는지.


아이가 노는 동안 나 역시 그 시간을 의미 있게 보내고 싶어 책을 읽거나 다른 아이 엄마와 운동을 해보기도 했다. 하지만 이리 튀고 저리 튀는 아이들을 봐야 하는 상황 때문에 집중이 쉽지 않았다. 아이 혼자 놀고 들어오라고 하고 집 안에만 머무르기엔 다른 아이 엄마에게 민폐를 끼치는 것만 같다. 아이처럼 그 시간을 오롯이 즐기면 좋으련만. 하지만 나는 놀이터를 즐기는 죽순이가 될 수 없다. 아이들의 놀이터는 엄마인 나의 그라운드가 아니기 때문이다. 노상 카페에 앉아 온전히 나의 존재감을 누릴 수 있는 자리는 어디일까 종종 생각한다.




"언니, 우리의 놀이터 인생은 언제 끝날까요?"


친하게 지내는 아이 친구 엄마가 와그작와그작 얼음을 씹으며 내게 말을 건넨다. 아이 셋을 키우는 대단한 엄마인 그녀는 한 겨울에도 아이스커피를 마신단다. 그녀의 말에 잠시 생각해보니 이 생활이 쉬이, 금방 끝날 것 같지 않아 아찔해진다. 나에겐 미취학 아동인 둘째, 그녀에겐 셋째까지 있었기 때문이다.    


아이들에겐 참새의 방앗간 같은 곳이지만 엄마들에겐 다람쥐 쳇바퀴 같은 놀이터. 생각 속에 머물다 이 곳에서 나의 위치는 그라운드도, 감독 석도 아닌 관중석이지 않을까 싶다. 아이는 어느새 영유아기를 지나 어엿한 초등학생이 되었다. 아이가 꼬꼬마 시절, 미끄럼틀과 그네를 태워주며 함께 놀아주던 때는 이미 지나 버린 것이다. 아이는 이제 엄마에겐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또래 친구들과 노는 데만 열중한다. 놀이터에 있는 시간 동안 나는 아이와 호흡을 맞추며 함께 놀 일이 사라졌기에  '나는 누구, 여기는 어디?' 하며 방황했던 것 같다. 아홉 살 인생이라는 책도 있지 않나. 아이는 놀이터에서 또래 친구들과 함께 어울리며 내가 가르쳐줄 수 없는 자신만의 '사회'를 배우고 익히는 중이다. 몸으로 직접 부딪히고 땀을 흘려가면서.


자식을 키우는 엄마의 전 인생에서도 가장 오랜 시간 앉아있게 될 자리 역시 관중석인 것 같다. 아이가 태어난 뒤 혼자 힘으로 할 수 있는 것이 적을 땐 엄마는 그라운드의 운동선수가 되어 아이와 한 몸처럼 호흡하며 뛰어야 한다. 이후 아이가 어느 정도 자라 걷기도 하고 말귀를 알아들을 땐 한 발 떨어져서 아이를 객관적으로 바라보고 훈육하는 시기가 온다. 경기로 따지면 이 시기의 엄마는 감독이나 코치의 자리에 있을 때가 아닌가 싶다. 그러고 나서 아이가 학교에 들어가고 사춘기 시절을 거쳐 성인으로 독립하기까지. 엄마는 전적인 지지와 응원을 보내주는 관중석의 자리로 점차 옮겨가야 하지 않을까. 행여 아이가 나의 기대나 바람에 어긋나는 행동과 결과를 보여주더라도 "괜찮아! 괜찮아!!"를 외쳐줄 수 있는 팬의 자리 말이다.


아직 먼 이야기일지도. 우선 당분간은 놀이터 관중석에 조용히 앉아 이 아홉 살 인생을 응원하고 환호해줄 계획이다. 몇 년이 흐르면 놀이터라는 그라운드는 아이에게 작아질 것이고, 그렇게 되면 이 관중석에 앉을 일도 없을 것이다.


시간이 지나면 지금의 이 신물 나는 죽돌이 엄마 역할도 자연스레 내 것이 아닌 풍경일 것이다. 그 시절, 놀이터에서 너는 죽돌이였다며 아스라이 추억을 곱씹고 그리워할 날도 언젠가 오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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