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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2부✧예의 있는 반항✧빛을 잃은 일상의 언어35화

씨앗이 된 언어들

by bluedragonK

작은 전등이 벽을 따라 흔들리는 빛줄기를 만들었다. 방은 침묵이 길었고, 공기는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책상 위엔 종이컵, 반쯤 식은 커피, 그리고 오래 쓴 노트 한 권. 첫 장엔 익숙한 펜 자국이 남아 있었다.

“하루에 한 문장만 써도 된다.”

그 문장은 오래 버틴 사람의 심장 같은 것이었다. 그는 노트를 덮고, 가방 깊숙이 넣었다. 이 문장은 다른 자리에서도 함께해야 한다. 손끝에 잔열이 전해졌다.

그때 핸드폰이 짧게 울렸다. 화면엔 한 줄이 떴다.

[청년 전세자금 이사 안내]

그는 화면을 한참 바라보다 숨을 길게 내쉬었다. 세상이 자신을 잠시 믿어준 것만 같았다. 오래 붙잡고 있던 단어가 바뀌었다. 버팀이 아니라 움직임이다.

문을 닫기 전, 그는 방 안을 천천히 훑었다. 이곳은 더 이상 겨우 견디는 삶의 증거가 아니었다. 그가 떠나며 남기는 건 언어의 씨앗이었고, 천천히 빛을 기다리는 새벽이었다.


오전 공기가 유리처럼 맑았다. 오피스텔 앞 골목에 멈춘 트럭에서 박스가 내려왔다. 성우가 먼저 뛰어내리며 손을 흔들었다.

“형—! 오늘은 팀장이 아니라 동네 동생이니까, 말 잘 들으셔야 합니다.”

민규가 웃으며 뒤이어 내렸다. “형, 이삿짐센터 불렀으면 두 시간 컷이었을 텐데요.”

“그럼 네가 불렀어야지.” 재하가 웃었다. “아끼는 게 미덕이야. 그리고… 사람 손이 닿아야 집 냄새가 나지.”

엘리베이터 앞에서 세 사람은 박스를 나르며 가벼운 투닥거림을 이어갔다. 문이 열리자, 햇살이 깊게 들어오는 방이 나타났다. 고시원과는 달랐다. 벽이 숨을 쉬었고, 바닥이 고요하게 빛났다.

“와, 여긴 진짜 집이네.” 민규가 감탄했다. “고시원은 숨을 억지로 쉬는 곳 같았는데, 여긴… 숨이 먼저 들어오네요.”

성우가 창문을 활짝 열었다. “음, 반주 없이도 울리는 공간음. 형, 여기선 가끔 공연도 하셔도 되겠는데요? 관객 셋, 셋이면 충분.”

“팀장님, 오늘은 팀장 아님.” 재하가 눈을 흘겼다.

“맞다, 오늘은 동네 서열상 내가 막내.” 성우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내일 출근하면 다시 서열 복귀.”

웃음이 방 안에 퍼졌다. 박스엔 각자의 시간이 들어 있었다. 책의 모서리에 묻은 손때, 닳은 머그컵, 포스트잇의 바랜 접착면, 구겨진 영수증. 사소한 물건들이 제자리를 찾을 때마다, 지난 몇 년의 무게가 천천히 내려앉았다.

싱크대 아래엔 설거지용 수세미와 세제가, 현관엔 작은 신발장과 우산통이 들어갔다. 성우는 전기포트를 꺼내며 말했다. “형, 커피 물 올릴게요. 오늘은 내가 바리스타.”

민규는 드릴을 꺼내 벽고리를 달았다. “여기 가방 거세요. 출근할 때 한 번에 챙길 수 있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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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소설 〈예의 있는 반항〉을 연재 중인 창작 스토리 작가입니다.일상의 언어와 사람 사이의 온도를 다루며, 한 문장이 다른 문장을 깨우는 세계를 기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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