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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시 언니 Dec 23. 2022

1만 시간 마스카라 칠하기

 어떤 분야든 괄목할 만한 무언가를 이루기 위해 통상 '1만 시간'은 투자해야 한다는 일명 '1만 시간의 법칙'


 그 '1만 시간의 법칙'에는 무수히 많은 실패, 일명 '삽질'까지 포함된다. 그래서 그런지 인생에서 무려 1만 시간을 투자할만한 일은 보통 매우 거창하거나 또는 생계 활동과 직결되는 일명 '먹고사는 문제'와 연결된 목표로 잡는 것이 타당해 보인다. 그렇지 않고 순수하게 취미에다 '1만 시간을 투자한다?  


 물론 인생사 나중에 어떻게 될지 모르겠지만 그래도 시간, 돈, 에너지가 한정된 평범한 사람이라면 당연히 본전 생각이 난다. 황금 같은 인생에서 뭐든 무려 1만 시간이나 썼다면 어쨌든 단 돈 1원이라도 경제적으로 도움이 되긴 해야 하는 거 아닐까?라는 생각이 든다.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면 왠지 모를게 스멀스멀 거부감이 피어오른다.  


 나 역시 영어 1만 시간 공부하기, 독서 1만 시간 하기, 운동 1만 시간 하기 등등 인생을 살아가면서 누구나 한 번쯤 꿈꿨을 만한 자기 개발 분야라야 비로소 1만 시간 법칙에 투자할 법한 일이라고 생각해 왔다. 핑계일지 모르겠지만 생각보다 거창한 목표 셋팅에 프리토킹 가능한 외국어 능력도, 독서를 통한 여러 분야의 해박한 지식도, 운동을 통한 강인한 신체 얻기도 번번이 그 끝을 맺지 못했다. 1만 시간은 개뿔. 1시간도 집중이 어려울 때가 많았다.


 그러다 문득 오늘, 속눈썹에 한 올 한 올 마스카라를 칠하다 문득 깨달았다.


 메이크업에서 유난히 자신 없었던 마스카라 바르기에 이리도 수월해지다니.


 이거다. 1만 시간의 법칙.


 내 마스카라 고난사는 20살, 대학교 신입생 시절부터 시작됐다. 한창 멋 부리고 꾸미기에 즐거웠던 신입생 시절, 덜어내는 미학을 몰라 정석대로 풀 아이메이크업을 다 하고 다녔다. 베이스 쉐도우를 깔고, 그 위에 포인트 쉐도우를 얹고 또 그 위에 반짝이는 글리터 쉐도우들을 얹고 뷰러로 힘껏 뿌리부터 속눈썹을 꺾는다. 그다음에 아이라이너를 칠하고 마스카라만 칠하면 되는데 내겐 그 '마스카라칠'이 매우 고역이었다.


 친구들이 마스카라를 칠하면 눈매가 또렷해 보이고 한 올 한 올 길어진 짙은 속눈썹 덕에 묘연한 분위기가 한껏 생기는데 웬일인지 나는 마스카라를 칠하면 칠할수록 아이메이크업을 망치는 느낌이었다. 그렇다고 민숭맹숭 마스카라를 안 칠하자니 뭔가 정석대로? 아이 메이크업을 하지 않고 과정상 큰 손실?을 겪는 것 같아서 기어이 마지막에 바르긴 발랐는데 친구들 같은 드라마틱한 효과가 느껴지지 않아 영 마음에 차질 않았다.


 이유는 내 눈매와 타고난 속눈썹 특징 때문이었다. 원래 속눈썹 숱이 별로 없고 길이도 매우 짧은 대다가 설상가상 속쌍꺼풀에 반 이상은 덮여 있어 아무리 마스카라 칠을 해도 친구들처럼 '싸~악' 길어지는 것이 아니라 '싹! 바-아-짝' 길어져 효과가 꽝이었다. 경험이 미천했던 탓에 마스카라 종류도 롱래쉬, 컬링 등 기능이 다양하다는 것과 쉽게 지워지지 않는 워터프루프 타입과 미온수에도 쉽게 지워지는 마스카라 타입이 있다는 것도 잘 몰랐다.


 이후 수많은 마스카라를 시도해 보고, 실패하고, 좌절해서 한동안 포기했다가 또다시 '이건 혹시 다를까?'나 싶어 새로운 제품을 사봤다가 '역시나 아니네. 나는 마스카라를 그냥 포기해야 하는가?' 싶은 시간들을 주야장천 보낸 후에 나는 정말 마스카라질을 포기했다. 그리고 바야흐로 속눈썹 연장술에 세계에 발을 딛기 시작했다. 속눈썹 연장술을 하고 관리만 잘하면 약 1달 정도는 눈에 띄는 눈매를 가질 수 있었다.


 그러나 세상에 영원한 행복 따윈 없는 법. 조금만 방심하면 연장해둔 속눈썹이 엉키고 시작해 오히려 엉망이 되거나 자다가 무심코 눈이라도 비볐다면 그야말로 대환장 사태가 시작됐다. 예민한 눈을 가진 사람이라면  속눈썹 연장술에 쓰이는 접착체 때문에 피부염이나 안구 건조증에 시달릴 수도 있지만 나는 버텼다. 마스카라 칠에 영 자신이 없었던 나는 그보다 2-3배의 효과가 보이는 연장술이 내게 신이 내린 마지막 동아줄이라 생각하며 나의 20대 후반과 30대 초반을 고스란히 바쳤다.


 그런데 날이 갈수록 아무리 속눈썹 영양제를 잘 바르고 손을 안 댄다 하더라도 헤어 시술로 따지면 '한 달에 한 번 꼴로 붙임머리 시술'을 계속 해댄 꼴이니 원래 손눈썹이 버티질 못했다. 가뜩이나 짧았던 속눈썹은 중간중간 툭툭 끊어진 곳이 생겼고 설상가상으로 부분 탈모처럼 텅 비어버린 곳도 생겼다. 모질도 얇아져 더 이상 속눈썹 연장술을 견딜 힘을 잃었다. 만일 속눈썹이 아닌 머리카락이었다면 최후의 수단인 가발이라도 도전할 수 있었겠지만 속눈썹은 이쯤 되니 답이 없었다. 무조건 쉬어야 한다.  


 그렇게 강제 휴지기를 가진 나는 또 한동안 헛헛한 눈매로 방황하며 마스카라 유목민이 되었다. 이가 없으면 잇몸이라고, 속눈썹 연장술을 못하게 되었으니 초심으로 돌아와 마스카라칠에 매진했다. 드럭 스토어에서 TOP 랭킹에 든다는 무엇, 유명 인플루언서가 쓴다는 무엇, 브랜드별 각 시그니처 아이템까지 총망라하고 수 없이 많은 떡칠과 눈가 팬더, 클렌징과의 싸움 끝에 드디어 내게 맞는 제품과 사용법을 알게 됐다.


 물론 그 사이 변수도 있었다. 답답한 속쌍을 쌍꺼풀 수술을 통해 살짝 들어 올려 그동안 숨어있던 속눈썹들을 되찾았으며, 반영구 아이라인 문신을 통해 듬성듬성 비어있던 부분들을 매워버렸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똥손 스킬은 하루아침에 나아지지 않아 전문가들이 매우 쉽게 말하는 '한 올 한 올 정성스럽게' 기술을 익히기 위해 거울 앞에서 고군분투하는 시간들을 수없이 가졌다.


 그 시간이 10년은 넘었으니, 1만 시간의 마스카라 칠은 거뜬히 달성하지 않았을까!


 그러니까 요즘 아주 우아하게 마스카라를 칠하고 다닐 수 있는 것이 아닐까!


 라는 귀엽고 발칙한 생각이 문득 들었다. 거창한 목표와는 거리가 멀고, 수익활동과도 안드로메다급으로 상관없는 일이지만 1만 시간의 법칙이란 무릇 '킵고잉(keep going)' 일명 '존버 정신'을 내포하고 있으니 나는 달성했다. 마스카라 잘 칠하기로.


 그래서 매우 뿌듯하고, 까짓 거 1만 시간 법칙 벌거 아니네? 싶은 요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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