feat. 라가불린 16년, 아드벡 10년
위스키 입문자의 첫 테이스팅 노트.
그게 아니면 감각을 깨우는 회고록.
나는 술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 전에 술에 취함으로써 얻는 도파민이 발생되지 않는 부류의 인간이다. 내 주량은 꽤 많은 편이라 자부할 수 있고 숙취 또한 거의 없는 축복받은 체질이지만... 왜인지 술을 마시는 것에 대해서는 뭔가 '비효율적이다'라는 이상야릇한 감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술이 가지는 위치가 나한테는 너무 애매했던 탓이다.
- 맛으로 마시기에는 커피나 음료수가 낫다.
- 수다를 떠는 용도나 분위기로 마시기에도 커피가 낫다.
- 시원해서 마시기에는 얼음 동동 띄운 냉수가 낫다.
- 취하는 게 기분 좋아서 마신다고 하기에는 나는 내 몸의 통제권을 잃는 게 무섭다.
...그래서 안 마시게 되었다. 체질 낭비라고 스스로도 생각해왔지만, 아무리 생각에도 술에 손이 가지 않는다. 그나마 대학생 때는 다 같이 노는 분위기에서 술을 마셔서 텐션을 업시키는 용도로 마셔왔던 것 같다. 그것 외에는 술이 불필요했다.
하지만...
나는 예전부터 위스키에 대한 알지 못할 동경이 있었다. 동경은 끌림과는 조금 다른 표현이다. 내가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쟁취와는 거리가 먼 수동적인 표현이다. 나는 어쩌면 이때부터 내가 위스키에 도전한 미래를 깨닫고 있었을 지도 모른다.
위스키는 다른 술들과는 확연히 다른 분위기를 가진다. 도저히 '술'을 표현하는 거라곤 생각 들지 않는 기상천외한 예술적 표현이 날아다니고(예를 들면, '혀끝이 숯불에 불타 마비되고 입안에 전류 폭죽이 터지다가 스코틀랜드 바닷바람의 짭짤한 소금기가 뒤늦게 덮친다'처럼 술의 맛을 표현하시는 분들이 많다), 같은 술을 마셔도 사람들마다 느끼는 경험이 전부 다 다르면서도, 함부로 도전하지 못하는 강함의 영역.
한번쯤은 겪어보고 싶었다. 위스키가 가져다주는 압도적인 감각적 미학, 감정이 지배되는 경험, 영감이 떠오른다는 체험을.
아일라 위스키는 위스키 중에서도 피트로 정평이 나 있는 고강도 싱글 몰트 위스키이다. 피트가 뭐냐면, 나도 잘 모르겠다. 나는 사실 위스키에 대한 베이스 지식이 전무하다. 맛을 느끼는 법도 잘 모른다. 훈연 향? 바디감? 해조류에 말린 과일? 술에서 정말 그런 향이 나는 건가?
피트 위스키는 위스키 중에서도 가장 호불호가 많이 갈리는 류이다. 소독약 냄새, 타이어 냄새, 숯불, 타버린 잿더미 같이 미각에서 따라붙으면 안 될 것 같은 위험한 향미들이 소개 문구로 줄줄 나오고 있다. 이런 위험한 것들에 흥미를 느끼는 걸 보니 아무래도 내가 도파민 중독 같은 그런 증세가 있는 모양이다.
피트와 잘 비교가 되는 개념으로는 쉐리 향 같은 게 있다. 쉐리는 건포도, 견과류 같은 달콤함을 내세우는 향미이다. 그래봤자 40도가 넘는 고도수 술에서 단맛이 뭐 얼마나 느껴지겠냐는 생각은 든다. (내 주관적인 의견이다)
위스키에 대해 아무것도 모르는 내가 입문으로 겁도 없이 아일라를 고른 건... 내가 '위스키 세계에 입문하겠다'는 마음가짐이 아니라, '나는 오늘 놈을 정복해 영감을 거머쥐겠다'라는 건방진 마음가짐을 품고 있었던 탓이었다.
그래, 나는 오늘 전투 모드다. 정말로 이 '강한' 술들이 내 둔한 감각을 깨워주고 압도해서 내가 평소라면 꿈도 꾸지 못할 세계 저편을 보여주지는 않을 지에 대한 기대감이다. 술이 맛있냐 맛없냐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래서 사실상 고백하자면 이 글은 테이스팅 노트라고 하기보다는, 차라리 에세이라고 부르는 게 훨씬 맞을 듯하다. 혹은 영감 노트라던지. 나는 상상력이 다른 사람보다 심하게 뛰어나기 때문에, 없는 맛을 창조하기도 하고 있는 맛은 못 느끼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이 두 술의 객관적인 정보가 필요해서 테이스팅 노트를 찾고 계신 거라면 다른 분의 게시물을 보는 것이 더 좋을 것이다.
아무튼 다음 얘기로 넘어가보자면, 내가 갔던 바는 호텔의 프라이빗 바였고, 내가 갔던 날에는 사람이 정말 단 한 명도 없어 혼자서 술을 음미하기 최적의 조건이었다. 넓고 편안한 프라이빗 바에서 혼자서 술 한잔과 같이 잔뜩 시간을 보내는 경험 자체가 이미 분에 넘치는 감미로운 일이었다.
내가 마신 아일라 위스키 종류는 두 가지다.
고요한 피트의 품격을 자랑하는 라가불린 16년,
그리고 가히 피트의 얼굴이라고 할 수 있는 폭력적인 아드벡 10년이다.
Price
라가불린 16년 45ml : ₩ 43,000
아드벡 10년 45ml : ₩ 27,000
보시다시피 꼴랑 한잔인데도 가격대가 꽤 세다. 용량은 이 정도 사이즈의 글렌캐런 글라스에, 가장 넓은 볼록한 부분까지만 간신히 채우는 양이라고 생각하시면 된다. 45ml라고 하면 소주잔보다도 용량이 작다. 물론 소주와 다르게 절대로 한번에 다 들이켜버리는 술이 아니기 때문에, 저 양으로도 30분 정도를 의미 있게 보내기에는 충분하다. 나는 취하는 게 목표가 아니기 때문에 양은 적절히 조절하기로 했다.
그래서... 살면서 정식으로 처음 위스키를 입문하는 내가, 이 두 술을 마시면서 물흐르듯 실시간으로 느꼈던 것들을 이곳에 회고록 형태로 적어보려고 한다.
색깔: 황홀한 호박색, 유혹적, 관능적이다. 당해주고 싶은 빛이다.
노즈: 향이 강하지는 않다. 코를 박았더니 매실 향(비유)이 난다. 매실 느낌의 익은 과일 향. 피트보다는 산미가 먼저 나를 깨웠지만 곧바로 피트에 덮힌다. 마시기 직전에 술이랑 가까워지니까 눈동자에 살짝 찌르는 듯한 매운 감각이 왔다 갔다. 불똥이 튀는 느낌이라고 덧붙여본다.
팔레트: 혓바닥에 머금자 타오르는 듯한 감각이 3초. 통각이 마비되는 느낌. 그 후 나는 입술을 모아 찬 바람을 불었다. 혀 옆으로 옮겼다. 혀에 머금으니까 입안 전체가 타올랐다.
세다는 느낌보다는 그냥 타는 듯한 느낌이 강하다. 그리고 3초가 더 지나니 타오르는 느낌도 사라졌다. 찌르는 듯한 느낌은 별로 없다. 부드럽다는 느낌이 뭔지는 알겠다. 아직 물을 마시진 않았는데, 침이 고여서 물흐르듯 삼켜버렸다. 목젖 너머로 넘어가는 과정은 매우 자연스럽다. 막힘이 없다. 잔향은 오히려 없다. 엄청 깔끔하다고 느꼈다.
첫 모금은 너무 가벼웠다. 열감도 뭣도 없고 혀 끝만 살짝 타오르다가 날아갔다. 양을 너무 조절했을까.
피니시: 목젖을 기준으로 은은하게 불덩어리가 타오르는데 되게 작다. 목젖 뒤편에 불씨가 조용히 자리잡았다. 솔직히 아직 피트가 뭔지는 잘 모르겠다. 쓴맛이 남아있는데, 이게 커피의 쓴맛이랑 전혀 다르고 뭔가 이국적인 향초를 먹는 느낌. 불타는 향초. 사막에 핀 낙엽빛깔을 띤 말라 비틀어진 잔디 밭. 영험한 기운이 돈다. 사막의 잔디밭이 타오르는 연기를 아주 멀리 서서 그 연기 냄새를 맡는 느낌.
라가불린이 '날 기억해줘'라고 속삭이는 거 같아. 귀를 기울여야만 들린다.
두 번째 잔.
물을 두 방울 손가락에 머금고 수면 위에 떨어뜨렸다.
굳이 따지면 말 그대로 불을 혀에 담은 느낌이다. 혀를 불타는 은은한 바다에 집어넣은 느낌. 그런데 바다가 다정하다. 집어삼키기는커녕 날 감싸주기만 하지. 쓴맛도 단맛도 약하다. 순수한 통각의 영역일까. 하지만 청각. 음악을 먹는 기분이다. 나는 바다를 마시고 그대로 나도 모르게 육성으로 호흡을 내뱉었다. 물을 마시긴 좀 아깝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까보다 타오르는 느낌이 훨씬 줄었다. 내겐 허브 향이 특히 강하게 느껴진다. 40% 가량 마셨을 때 슬슬 볼에 열감이 조금 올라왔다. 근데 오히려 진정되는 느낌이다. 가슴이 되게 시원하다. 전반적으로 강하다는 생각이 안 든다.
깔끔하다. 예전에 어렸을 때 마셨던 발렌타인은 마시는 순간 목이 막히는 느낌이었는데, 이건 소화를 다정하게 도와주는 느낌이다. 나를 삼키라며. 라가불린은 뒷맛이 많이 남는다 하는데 나한텐 너무 깔끔했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목 안쪽에서부터 되게 이질적인 냄새가 느껴졌다. 이게 책장 냄새인가? 어쩌면 내 주변에 이미 붉은 책장이 가득해서 그런 걸 수도 있다.
아, 이게 고무 향인가. 뒤늦게 깨달았다. 구운 책장이라기엔 냄새가 약하다. 고무가 타는 냄새도 아니다. 희미하다. 내 앞을 스쳐지나간 아저씨한테서 풍겨지는 고무 냄새야. 정비소 아저씨 아닐까? 농담이지만.
순수한 맛은 여전히 잘 모르겠다. 원래 미각이 둔하긴 하다.
세 번째 잔.
혀에 머금은 채로 입천장을 눌렀다. 목구멍 안쪽에 닿자 저릿저릿 마비될 것 같다. 견디기 어려울 때까지 버티다가 삼키니까 후련하고, 숨을 참고 다음 향을 기다리고 있다. 혀를 천장에 맞댄 채로 유지했다. 정신은 아직 또렷했다.
확실한 건 내가 빛의 세계에 있지는 않단 걸 알겠다. 근데 어둠인가? 그건 또 모르겠어. 중립적이다.
향에서는 이제 쓴맛이 아예 안 느껴진다. 미묘하게 찌르는 산미. 스며드는 것도 아니고, 아주 가느다랗고 약한 향의 실이 내 코 안으로 슬금슬금 들어온다. 콧구멍을 다 채워주지는 않는다. 코에선 퍼지지 않는데, 입안에서는 엄청 퍼진다.
혀 끝에 많은 양을 머금고 입을 부풀리자 살짝 한계감에 도달했지만 그래도 헤엄을 한번 쳐본다. 눈물이 찔끔 솟을 정도로 혀가 아파서 오히려 깨끗해진다. 알코올 냄새가 난다 수준이 아니라, 이건 확실하게 나를 깨끗하게 소독해준다. 삼키니까 순간 멍해지는 느낌에 잠시 멍때리게 된다.
목안에서부터 기묘한 향이 계속 올라오는데, 이번엔 꽤 불덩어리가 남아있다. 불의 씨앗을 삼켰다. 그런데 별로 뜨겁진 않고 시원하다. 시원한 불.
아쉽게도 찬 불은 쉽게 꺼졌다. 그렇겠지.
하지만 이제 본격적으로 고무향이 올라온다. 세지는 않지만, 이번엔 정비소 아저씨가 눈앞에 스쳐지나간 게 아니라 나랑 한마디 대화를 주고받고 입냄새가 나는 느낌.
해변가의 미지근한 여운으로 마무리. 물에 들어가지는 않았으며 나의 두 맨발은 모래가 묻은 채 말라 붙어있다. 모래는 바람에 물기가 다 날아가서 건조하다.
자기주장이 전반적으로 약하다. 술 자체가 '잔향'이라는 느낌. 나 같다. 라가불린 16년의 잔향이 아니라, 라가불린 16년 자체가 잔향이 형체화된 모습이다. 나는 처음부터 끝까지 계속해서 잔향을 마셨다. 그래서 라가불린 16년에서 잔향을 느낄 수가 없었던 거다.
감상: 차가운 마그마. 작고 차가운 불덩어리가 목 안에서 맴도는 느낌. 불의 씨앗을 삼켰다. 고요하고, 만지면 날 다치게 하기는커녕 내 손가락에 천천히 엉겨붙어서 나를 부드럽게 데워주는 차가운 불이다. 젖어있는지 몰랐다. 이상하게 물기는 별로 느껴지지 않고 역으로 건조한 이국의 느낌만이 강하게 느껴졌다. 흔히들 아일라 위스키를 바다와 물기로 묘사하고는 하는데, 난 왜 아닐까...
불이지만 나를 다치게 하지 않는다. 나와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조용한 연인, 동류라는 생각.
감각을 최대한 느끼려 노력했는데, 감정적인 변화는 하나도 없다. 그래서 좀 실망스럽기도 했다. 감정에 변화가 생겨야 영감이 생기는데, 지금은 내가 해석에 집중 해야 하니까. 은은하게 완성된 예술 작품이라는 것은 알겠다. 하지만 나는 이미 제어된 것에는 흥미를 가지지 못하는 듯했다. 나는 기복을 원했다.
그래서 다른 술을 꺼냈다.
색깔: 연한 라임빛, 연한 금색. 희한하게 아드벡보다 훨씬 더 진한 색깔인 라가불린 16년은 오히려 그 향이 은은하고, 세기로 정평이 나 있는 아드벡 10년은 오히려 비주얼은 은은함 그 자체다.
노즈: 아드벡 10년을 받았다.
이 새끼, 내가 코를 들이대지 않아도 냄새를 풍기는군. 멀리서 맡아보면 라가불린 16과 비슷하지만, 가까이서 맡아보면 어떨까.
향을 맡아보니 향긋한 요오드 느낌이라고 할까, 톡쏘는 느낌이 난다. 라가불린 16년에서도 산미가 먼저 느껴지곤 했었지. 아무래도 내가 산미에 민감한 듯하다.
팔레트: 확실히 라가불린보다 견디기 어렵다. 라가불린은 30초 넘게도 머금을 수 있었는데 아드벡은 바로 삼키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조금만 입에 넣었는데, 아까보다 두배는 강한 통각의 아픔이 온다. 하지만 음… 초보인 나한테는 라가 16년과 큰 질적인 차이가 안 느껴졌다고 할까…
이 정제된 느낌.
왼쪽 코를 막았더니 살짝 귤을 닮은 산미가 느껴졌다. 착각일 수도 있다. 이번엔 나도 모르게 꿀꺽 삼켜버렸다. 얘도 깔끔하긴 한데, 라가보다는 존재감이 강하다. 얘는 살짝 목에 걸린다. 라가불린이 작은 불덩어리를 삼킨 느낌이라면, 아드벡은 내 목젖 자체가 불로 변한 느낌이다. 이건 뭐랄까,
라가불린은 뜨겁지 않은 마그마라면, 역으로 아드벡은 찬물의 바다다. 근데 위에 뜨겁고 자극적인 화산재로 쌓인 바다. 목에 마구 마구 재가 걸리는.
여담으로 바텐더가 오렌지 안주를 갖다줬다. 프레첼을 하나도 안 먹고 있으니까. 고마워요. 근데 좀 있다가 먹을게요…
피니시: 라가불린이 불덩어리를 조심스레 삼키는 의식이었다면, 아드벡은 내가 불이 되어가는 의례다.
확실히 라가불린과 비교적으로 깔끔하다는 인상은 아니다. 라가불린은 바로 사라져서 아쉬울 정도였는데, 아드벡은 살짝 뒤끝 있다. 이것 봐라. 나랑 해보자는 거야? 확실히 넌 우아함보다는 정치질에 가깝구나.
하지만 또 야성적이지는 않다. 오히려 신사적인 편이라 느꼈다.
두 번째 잔.
두 번째 잔부터는 아까 전부터 시켜놓고 한번도 사용하지 않은 온더락용 큰 구형 얼음을 써보기로 했다… 사실 온더락으로 입문할 생각이었는데 어쩌다보니 방치돼서 많이 녹아서 물로 차 있다. 찬물을 드링킹하고 깨끗하게 얼음만 남겨놓는다.
그리고 얼마 지나지 않아서 나는 온더락을 해버린 것을 바로 후회했다. 정말 정말 후회했다. 순수한 피트 말고는 그 어떤 향도 안 느껴졌기 때문이다… 젠장. 오케이. 이건 단숨에 끝내버리고, 마지막으로 남겨둔 술을 한방에 스트레이트로 조져버리면 이 밍밍한 온더락과 비교할 수 있겠지. 오히려 좋아.
피니시: 온더락으로 피니시를 느껴보..려고 했는데 안 느껴져서 그냥 연달아 마셨다. 삼키지 않고 입안에서 요리조리 넘긴다. 점잖은 듯 싶더니 혀로 장난치니까 갑자기 톡쏘네.
가장 많이 자극이 남는 건 입 안쪽. 넘어가고 싶은데, 내 목구멍을 공격하고 싶은데 내가 막아놔서 못 뚫는다. 그런 텁텁하고 답답한 인상이 느껴진다.
세 번째 잔.
마지막 남은 양을 스트레이트로 단번에 들이켰다.
확실히 뜨거움이 오래 남는다. 눈물이 살짝 맺힐 정도로(진짜 맺히진 않았고..).
피니시: 아드벡이 날 안아준다는 느낌은 전혀 안 드는데, 날 공격하려다가 역으로 내가 쳐놓은 방어막에 걸려서 당황해하는 느낌. 서서히 조금씩 조금씩 내 심장으로 내려오고 있다. 심장이 고무가 되어간다.
라가불린보다 아드벡이 더 텁텁하다. 타이어가 확실히 젖어있다. 고무 향이 미세하게 노골적이고 질척거리고 텁텁하다. 내 방에 침입한 트릭스터 시인이다.
감상: 아드벡은 동화. 라가불린은 동일시. 좀 다르다. 아드벡은 위험하긴 하다. 라가불린은 내가 의식적으로 동일시하는데, 아드벡은 날 덮쳐오는 뜨겁게 끓어오르는 물의 파도다. 쌉쌀한 파도. 공명이라는 단어는 라가불린과 어울리며, 아드벡은 동화 혹은 결투. 하지만 압도적인 물리적 싸움은 아니고, 교묘한 심리전과 정치다. 중세 시대 유럽 귀족? 능글능글하면서도 가슴에 칼을 품고 있는 정치인이 달콤한 와인 대신 상대 파벌에게 대접했을 법한 술이랄까? 압도적으로 지배하지는 않는다. 오히려 압도적일 것만 같았던 첫인상과 다르게 가시를 들이밀고 뒤흔들고 교란하는 맛이다. 하지만 예상되는 반전이었다.
애초에 내가 피트라는 감각에 큰 임팩트를 느끼지 못하는 사람이라 그런지. 정해진 틀 안에서 세부 구조만 요리조리 바뀌는 느낌. 마치 중세 시대 전쟁 때 이뤄진 전술의 조합 같다. 딱 그 느낌. 라가불린은 오히려 영험한 이집트 사막의 느낌이었는데, 아드벡은 중세 유럽이라니.
회고: 두 피트를 겪고 나니, 내가 너무 전투적으로 마시고 있다는 느낌이 살짝 들었다. 정복적으로. 향을 느끼려 하기보다는.
일단 내가 피트에 큰 거부감이 없어서 다행이다. 나한테 있어서 피트니 뭐니 페놀 수치는 ‘음 뭐임 궁금하네’ 정도의 느낌이다. 술 마시고도 할 일이 남아있었어서 음주는 두 잔 정도로 종료했지만, 그러지 않았다면 다른 위스키도 더 시켰을 듯하다. 완전히 다른 쪽으로. 사실상 아드벡 10년을 무사히 넘겼다면 다른 센 술들도 다 먹어볼 만 하지 않을까. 입문은 역시 아드벡 10년으로...
다만 나는 번개 으랏차차 소용돌이를 기대하고 아드벡 10년을 시킨 건데, 내 예상보다 이자식, 정석이다. MBTI로 비유하자면 ESTJ이다. 강한 건 맞는데, 은근히 질척거리면서, 역으로 예측하기 쉽다. 그래서 혼돈의 P형 위스키를 원했던 나에겐 큰 매력이 없었다. 이런 점을 gpt에게 상담했더니 나에게 옥토모어/코리브레칸/라프로익 CS(Cask Strength) 같은 걸 자꾸 추천해준다.
GPT: 번개 소용돌이를 원한다면, 진짜 전기줄을 입에 문 느낌 나는 걸로 가야지. 그런 너에게 옥토모어를 추천할게.
역시 AI는 위험하다.
위스키를 마심으로써만 느낄 수 있는 특별함이 있을까 기대해봤다. 하지만 아무래도 나는 단발적인 경험에서 큰 의미를 찾기 어려운 사람인 것 같다.
루틴, 의식, 일상적으로 스며드는 루틴이 아니라면 의미가 없게 느껴진다. 여행, 관광, 체험... 이런 것들에서 나는 의미를 찾지 못한다. 여행만으로 얻을 수 있는 영감은 없다 생각한다. 출근하면서 버스를 타서 창밖을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무수히 많은 영감이 떠오른다. '여행에서 나 자신을 찾는다'라는 말에 회의감을 느낀다. 여행은 '나'가 아니다. 뭘 찾을 수 있단 말이지? 나와의 연결고리가 없는데 어떤 '나'를 찾을 수 있다는 거지?
침대에 누워서 눈을 감는 순간 무수히 떠오르는 정제되지 않은 생각들. 항상 마시는 커피에서부터 어느날 문득 느끼는 기묘한 단절감. 언제나 내가 출근할 때 사용하는 아무 사람도 없는 버스 정류장. 하루에 단 20분 주어지는, 시원한 버스 안에서 경치를 바라보며 몽상에 빠지는 정말 자유로운 고독.
완전히 내가 이해할 수 없는 별세계와 마주하는 것보다는. 인생에 단 한번 찾아오는 특별한 첫경험보다는, 익숙해졌다고 착각하게 만들었다가 비틀어버리는 그런 충격이 좋다. 다만 나에게 있어 익숙함이 다른 사람에게는 별세계일 순 있겠지만...
'나는 흔들릴 수 있을까?' 라는 최초 목표에 대답해보자면 실패했다. 입안에 맴도는 고무 향에서부터 아무런 진동도 없다.
그 대신 여지는 남겼다. 기대감. 내 감각이 깨어날지도 모른다는 기대감. 나는 체험 대신 기대에서 도파민을 얻는 부류의 사람.
아무튼 다른 단술과 조잡한 술들을 더 겪어보고 기반을 다진 다음에 다시 아일라로 돌아와 다시 한번 잔을 기울여봐야겠다. 익숙해졌을 때.
그때 가서 날 비틀어버렸으면 좋겠다. 이 ‘익숙한’ 술들이. 나와 닮은 이 술들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