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블루잉오렌지 Apr 16. 2024

네가 힘든 건 네 탓이라고 어머니는 말하셨다

전부 맞는 말이니까 입을 다물 수밖에 없었다

알고 보면 나쁜 사람 하나도 없다..


따지고 보면 저 사람들도 피해자다..


그 사람 입장에서 생각해보면 이해가 된다..


"근데 사실 네가 잘못한 거 맞잖아?"


"근데 네가 틀린 거 맞잖아?"



왜 항상 따져봐야 할까? 왜 항상 다른 사람 입장에서 생각해봐야 할까? 왜 항상 바로바로 받아들이지 못하고 돌려서 생각해야 할까? 왜 항상 나는 바로 직관적인 내 감정 대신 저 멀리에 있는 객관적인 사실 먼저 이해해야 할까?


내가 무슨 얘기를 하면, 어머니는 항상 내 말을 부정할 준비부터 하신다. "근데"부터 장전한다. "입장" "이해" 라는 말이 반복된다. 좋다. 어머니 덕분에 나는 다른 사람의 관점을 이해하는 법을 배웠다. 그것이 내가 어른스러워지고 능력을 키우고 능동적으로 성장하는데 아주 큰 도움이 되었다. 좋다, 좋아.



하지만 나는 아직도 나의 관점을 이해하는 법은 전혀 모른다.






나는 눈물이 없는 편이다.


내가 눈물을 흘리는 경우는 세 가지가 있다. 첫 번째는 눈물을 흘리려고 할 때.


이게 무슨 개소리냐면, 노래방에서 슬픈 발라드 노래의 멜로디에 몰입할 때 찔끔찔끔 솟아오른다는 뜻이다. 나는 이별해본 적도 없는데도 이별 노래에 몰입할 수 있었고, 사랑해본 적도 없는데 사랑스러운 노래에 몰입할 수 있었다.

물론 이는 전부 가짜 감정이기에, 노래가 끝나면 다시 순식간에 원래대로 돌아온다. 그래서 다음으로 넘어가겠다.



두 번째는, 인정받지 못한다고 느낄 때. 부모님에게.


나를 진심으로 울게 만드는 사람은 나의 부모님뿐이다. 왜냐하면 가장 가까운 사람들이니까. 피가 섞인 사람들이니까.


가장 가까운 사람들에게 가장 입을 꾹 다물고 있어야 한다는 것을 체감할 때, 무망감 섞인 눈물이 흐른다.



세 번째는, 꿈에서다.


나는 꿈은 대부분 무작위적인 형상.. 쉽게 말해서 개꿈이란 걸 알고 있지만 어쩌다 한번 의미가 있는 꿈이 정말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하고 있다.


나는 1년에 한두번씩 주기적으로 아주 똑같은 꿈을 꾼다. 거의 10년 전부터. 그러니까 최소 열번은 꿨을 것이다. 자잘한 세부사항이 달라지긴 하지만 결국 플롯이 똑같다.


어머니 혹은 오빠와 의견이 맞지 않아 싸우고, 때리고, 죽일듯이 싸우고, 결국 버림받아 영원히 헤어진다는 스토리다. 항상 똑같다.


왜냐하면 그 두 사람, 어머니와 오빠가 나와 정말 '다른'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는 그 둘에게 내가 보여주고 싶었던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다. 언제나 가면을 쓰지만, 그 가면은 내가 원하지 않는 가면이다. 그 둘이 내게 씌워준 가면이다.


난 그 꿈을 꿀 때면 항상 눈물에 젖은 얼굴로 깨 몽롱한 상태로 또 10분 넘게 눈물을 흘리곤 한다. 현실에서 일어난 싸움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이상하게도 아버지는 내 꿈에 한번도 나오지 않았다. 그 많은 횟수동안 한번도 나오지 않았다. 그 말은 즉 내 무의식은 아버지라는 존재는 내 눈물에 필요하지 않다고 해석했다는 것이다.


막상 아버지와 그렇게 자주 얘기하지도 않는데, 가장 가깝고 친하게 지내는 사람이 어머니인데도 그냥 그렇게 꿈을 꾸게 된다. 그냥 무의식적으로, 아버지와는 딱히 자주 얘기하지 않아도 나를 이해해줄 거라고 생각한걸까. 나랑 비슷하니까.



아니면, 아버지는 본질적으로 무관심한 사람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나와 가족이 싸우는데 등장조차 하지 않았을지도 모른다. 나 자신이 그렇듯이.



나는 잊을만하면 가위에 눌려서 수십번 넘게 가위눌린 경험이 있는데도 귀신을 한번도 보지 못했다. 꿈에서 귀신이 나오거나 괴물에게 쫓겨서 두려움에 꿈에 깰 때도 없었다. 귀신이 나타나고, 살인마가 쫓아오고, 그런 비현실적인 꿈은 난 별로 꾼 적이 없다.


꿨어도, 그리 기분 나쁘지 않았다. 공중에서부터 떨어져 밑바닥에 쾅 쳐박혀 깜짝 놀라 꿈에서 깬 적도 있었고, 피 흘리며 죽어간다는 괴로운 느낌을 생생하게 받은 적도 있었다. 그렇지만 그런 꿈들은 얼마 가지 않아 잊혀진다.



내 악몽은 항상 가족에 관한 것이었다.


날 두렵게 만드는 것은 귀신 같은 허무맹랑한 존재가 아닌 오직 현실의 가장 가까운 존재뿐이었다.






내가 힘들어하는 것을 털어놓으면, 항상 얘기는 어머니가 나에게 가르쳐주는 것으로 끝난다. 조언, 상담, 그런 것으로.


그렇지만 나는 그 '조언'과 '상담'을 곧이곧대로 들은 적이 없다. 이유는 간단하다.


어머니는 항상 내가 얘기하는 맥락과 완전히 다른 맥락에서 얘기를 하셨기 때문이다. 어머니는 내 얘기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적이 없다.


어머니가 조언해주는 걸 들으면, 나는 당황스러웠다. 어머니가 지금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한번 더 생각을 거쳐야하기 때문이다. 내가 강조하는 포인트와 어머니가 말하는 포인트는 항상 정반대였다.



언제는 어머니에게 반박을 한 적이 있었다. 그럼 항상 얘기는 어머니가 언성을 약간 높히고, 나는 얘기를 포기하고 방으로 들어가는 것으로 끝난다.


지레짐작하는 겁쟁이. 그렇게 나를 설명할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이미 수많은 단서를 관찰해왔고 수도 없이 실험해왔다. 나는 언제나 '받아쳐졌다'. 내 의견은 언제나 합리에 의해 부정당했다. 나는 비합리적인 사람이 되긴 싫어서 입을 다물었다.


제대로 말도 못하는 겁쟁이. 그렇게도 날 설명할 수 있을 걸이다.



하지만 말해서 어쩔건데? 


영원히 안 볼거야?


혼자서 뭘 할수 있는데?


그래서 나는 조용히 마음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깊게 생각하기 시작했다. 


가장 가까운 사람이 나와 본질적으로 다른 사람이라는 건, 이해할 수는 있지만 받아들이기엔 어려운 일인가 보다, 나에게 있어선.



매거진의 이전글 가장 행복했던 날 나는 2천만원을 날렸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