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직을 준비하는 요즘, 가끔은 '차라리 면접을 보지 않았다면', 하고 생각하는 날들이 있다. 특히 최종 면접까지 갔을 때 불합격 이메일을 읽을 때의 그 기분은 겪어보지 않으면 모른다. 가끔은 억울하기도 하다. '괜히 기대하지 말자'라고 스스로를 다짐해도, 합격하기 직전에 다다랐을 때 그 누가 기대하지 않겠는가? 그렇게 힘들다는 이직을 겨우겨우 해내는 나 자신에게, 하루라도 기대감이 취하지 말라는 듯 돌아오는 불합격 안내 소식은 사람을 더 처절하게 만든다. 차라리, 그래, 차라리 최종 면접을 보지 말지, 하는 그런 억하심정이 스멀스멀 기어오르며 나를 괴롭힌다. 특히 스태그플레이션이니, 리텐션이니 뭐니 하며 경제 상황이 다시 떠오르지 않을 것 같은 이 시대에, 보통의 대접을 받기 위한 발버둥이 야속하게 비웃음을 당하는 기분이다.
누군가가 한때 내게 그런 말을 해준 적이 있다. 술은 기쁜 날에만 마시라고. 슬픈 날에 마셔봤자 결국 돌아오는 건 '술이나 먹어서 뭐 하냐'는 마음뿐이라고. 그 우울한 감정에 더 깊게 잠기기 밖에 더 하느냐고.
그럼에도 이럴 때마다 떠오르는 술은 올드 패션드(Old Fashioned)라는 칵테일이다. 1800년대에 칵테일 바에서 칵테일을 시킬 때마다 레시피가 바뀌어 맛이 달라지다 보니, 사람들이 이 칵테일을 시킬 때 "old fashioned way(예전 방식 그대로)"로 만들어 달라는 요청 때문에 붙여진 이름이다. 버번위스키 베이스에 물, 비터, 각설탕, 머들링 한 체리 그리고 오렌지 필을 사용해서 만든 아주 간단한 칵테일이다. 비율에 따라 밍밍해질 수도, 너무 쓸 수도 있는 이 칵테일은 20대 중반에 막 들어선 여자인 내가 먹기에는 조금 웃길 수도 있다. 미국에서는 금융권 종사자 아니면 늙다리 백인 아저씨가 시킬 만한 칵테일로 불리고 있기 때문이다.
왜 하필 많고 많은 사람들 중에 백인 아저씨인가? 올드 패션드의 베이스인 버번위스키는 애초에 남부의 켄터키 지역에서 주로 만들어졌기에 백인과 연관성이 짙어 보이는 이미지를 연상한다. 게다가 예전에 위스키, 테킬라와 럼같은 스피릿은 언제나 "남자들의 술"이었기에 더욱이 그런 이미지가 붙어있기 마련이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20대 중반 여자인 내가 즐기면 안 된다는 뜻이 아니라, 그러한 이미지 때문에 내가 원하는 버번을 고르고, 원하는 스터링 방식을 지켜달라고 주문할 때 놀라는 눈으로 나를 쳐다본다는 뜻이다. 이제 막 고등학생이 된 여자애처럼 보이는 애가 백인 아저씨보다 더 깐깐하게 주문을 한다면 당연히 동공지진이 오지 않겠는가?
오늘도 이직에 실패해 올드 패션드가 생각나는 날이지만, 그 누군가가 해주었던 말을 지키기 위해 꾸욱 참는다. 올드 패션드는 내가 원하는 길을 고수해 냈을 때 비로소 느끼는 희열과 마시기 위해 아껴놓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