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희망
<이것은 2016년 5월 20일부터 21일까지 히말라야베이스캠프트레킹의 기록입니다.>
다시 새로운 아침이 밝았다. 희망과 같은 날이 밝았다. 오늘도 무사히 아침을 맞을 수 있었다. 네팔에서 트레킹을 하며 아침의 소중함에 대해 많이 깨달았다. 특히 새가 지저 기고 안개와 해무와 함께 찾아오는 이른 아침은 나를 싱그럽게 했다. 그 촉촉하고 스산한 기운이 참 좋았다. 오늘도 아침을 챙겨 먹고 여정에 나섰다.
몸은 많이 회복되었다, 그 증표로 이제 히말라야트레킹을 하던 여느 때처럼 휴대전화로 사진을 찍을 수 있게 되었다. <나의 함께했던 중국에서 구매했던 화웨이 honor폰에게 영광을 돌린다. 지금은 사망했지만ㅠㅠ> 여전히 검을걸이는 뒤뚱뒤뚱 느렸지만 천천히 걸어갔다. 어제 까지 와는 또 다른 풍경들이 펼쳐졌다. 짐을 옮기는 나귀들이 보였고 키가 크고 울창한 나무들이 보였다. 빙하와 얼음 세상에서 다시 현실 세상으로 온 것 같았다.
나귀들이 옮기는 많은 짐들처럼 이 곳 깊은 산골 쿰부 히말라야에서 삶은 계속 이어진다. 내 삶이 계속 이어지는 것처럼. 회사를 그만두고 배낭여행을 떠날까? 말까? 많은 고민들을 했었다. 그때 친구의 말을 듣고 베트남행 편도 비행기 표를 사지 않았으면, 내가 지금껏 브런치의 올려왔던 저러한 광경들을 만날 수 있었을 까? 생각해본다. 인생은 나비효과의 연속이고, 발등에 떨어지는 나뭇잎에도 많은 앞날들이 바뀌게 된다. 인생에서 수많은 톱니바퀴들이 맞물려 있고 발등에 떨어지는 자그마한 나뭇잎은 그 톱니들의 회전 방향을 바꿔주는 자동차 기어 같다.
오늘은 남체에서 루크라까지 많은 거리를 걸어야 한다. 팔이 아픈 진감독님은 먼저 내려가기 시작했고, 나는 포터 카르마씨와 함께 내려갔다. 어제처럼 노란물을 토하거나 그렇지 않았지만 그래도 힘들었다.
하지만 이러한 눈에 익숙한 풍경들을 보고 있자니 땅에 한발 한발 가까워지는 기분이었다.
그런데 또 하산중에 날씨가 안좋지기 시작했다. 비가 오기 시작한 것이다. 옷이 다 젖어 추울 수 도 있었는데 다행히 여행을 떠나기 전 가을 날씨용으로 산 k2 점퍼가 방수가 있었다. 정말 다행이었다. 이것저것 따지지고 않고 인터넷에서 최저가로 산 점퍼였다. 방수가 되는지도 몰랐다. 그래서 우산이 없이도 몸이 젖지 않은 채 걸을 수 있었다. 악천 후 속에서도 세상이 끝날 것 같은 우울한 하루 속에서도 행운은 찾아온다. 마치 항상 따라다니는 불행처럼 말이다.
진감독님을 따라잡으려 밥도 먹지 않고 걸었는데 안 그래도 이미 체력이 모두 고갈된 상태에서 장시간 걷는 것은 고역이었고 힘들었다. 조금 쉬어가고 싶었지만 날이 저물기 전에 루크라에 도착하기 위해 열심히 걸었다. 그래도 이제는 마을도 보이고 강을 끼고 걷는 것이 안도감이 있었다. 이제는 위험하지 않겠구나 했다.
나는 내가 가지고 있는 사진들 중에 저 푸르른 마을의 배경 사진이 참 좋다. 아직도 저길을 걸을 때의 순간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왜냐하면 저 길을 걸을 때, 내 속에서 무언가가 울컥울컥 거렸고 무언가가 검은 응어리가 토해내지는 것 같았다. 이상하지만 분명 그 느낌을 받았다. 이 느낌은 히말라야에서 뿐만 아니라 중국 명산 메리설산에서 하산할 때도 느꼈던 것이었다. 내게서 뽑혀지고 토해진 응어리는 "생카라"라고 말할 수 있다. 생카라란 네팔에 다녀온 후 명상을 배우며 배웠던 단어인데 내 안의 상처, 열등감 등 부정적인 것들로 어둡게 내 몸에 쌓여있는 것이다.
묘사하자면 몇 년 전에 인기 있었던 드라마 도깨비에서 도깨비(공유)의 칼이 뽑히는 순간 같았다. 검은 응어리들이 울컥울컥 토해지고 그 자리에 다른 것들이 채워졌으며, 움직였다. 그리고 막혀있던 것이 뚫려 다시 순환되는 것 같았다.
나는 그때의 그 기분이 잊혀지지 않는다.
내가 살아오며 생긴 내 속에 큰 생채기들이 생각났다. 학생 때 나를 괴롭혔던 친구들, 많은 실패를 통한 열등감, 동료들의 임금을 체불했던 회사, 나를 몰아세웠던 비겁했던 사람들 등........
이따금씩 떠올라 나를 괴롭혔던 많은 것들이 네팔 트레킹 이후 아니 배낭여행 이후에 "풍경"이 되었다. 배낭여행과 히말라야 트레킹은 나에게 이런 의미가 있다.
트레킹이 끝나가는, 여정이 완결되어 가는 저 무렵에 나는 그렇게 풍경을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를 통해 나는 새로운 희망을 품게 되었다.
그냥 우리 할머니 시골집 같은 풍경이었는데 순간에 많은 것들을 선사해준 곳이었다.
그런 순간도 잠시, 너무 힘들었다. 체력은 이미 예전에 방전되었고 걷는 것은 오롯이 나의 정신력으로 납덩이같은 팔과 몸을 움직이고 있었다. 내리막은 끝나고 오르막이 계속되었다. 더군다나 해가져서 머리에 랜턴을 끼우고 걷게 되었다. 충만했던 감정들은 다시 신경이 곤두서게 되었다. 정신뿐만 아니라 몸도 참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정말 몸이 힘들었다. 이 곳 히말라야에 와서 2년간의 군대생활에서도 경험하지 못한 정신적인 한계, 육체적인 한계 모두를 경험하게 되었다.
머 한계를 경험한다는 것조차 나쁘지 않은 것 같다. 한번쯤은....사람들은 보통 그 한계를 눈앞에서 바라보기 전에 미리 도망가지 않겠는가. 이것 또한 트레킹의 좋은 점이라고 생각한다.
랜턴을 끼고 비를 뚫고 결국 루크라에 정말 녹초, 넝마 가 되어 도착했다. 힘들고 해가진 만큼 중간에 사진은 없다. 진감독님은 먼저 도착해 있었고 반가운 얼굴, 약사선생님을 만났다. 정말 반가웠다. 글을 쓰고 난 뒤 미국에 계시는 선생님에게 연락을 드려 보아야겠다. 우리는 진지에 남겨두고 온 전우를 만난 것처럼 반가워했다. 우리의 건강상태를 아시는 약사 선생님은 본인 롯지에 미국인 의사가 있다고 같이 가보자고 했다. 결국 의사를 만나지는 못했고 저녁을 먹지 않은 약사 선생님과 나는 로컬 식당에 저녁을 먹으러 갔다. 거기서 우연히 그 미국인 의사를 보았는데 나에게 이것저것 물어보았고 내 대답을 들은 뒤 그는 이제는 고산에서 내려와서 괜찮다고 따로 병원은 찾아가지 않아도 된다고 했다. 그 말을 듣고 안도했다.
약사 선생님과 식사를 하며 많은 이야기들을 나눴다. 약사로서 고산병에 대해 설명하시며 정말 위험한 병이며 바보처럼 어떻게 죽는지도 모르면서 멍하게 죽는 병이라고 하셨다. 그리고 솔직히 칼라파트라에서 만났을 때 나를 강제로 데리고 내려왔어야 했지만 내 눈빛을 보고 그럴 수 없다고 하셨다. 그렇게 했을 때 자신을 원망했을 나를 볼 수 없었다고 하셨다. 약사 선생님은 아마 나를 보고 무모했던 본인의 젊은 시절을 떠올리시는 것 같았다. 조금 더 젊고 무지했기에 그렇게 할 수 있었다. 이것도 경험이 되어 다음에는 분명히 위험한 순간이 닥쳐오면 슬기롭게 유연하게 잘 대처할 것이다. 나를 걱정해주시는 약사 선생님의 마음이 고마웠다. 약사 선생님과는 트레킹이 끝나고 포카라에서 함께 많은 시간들을 보냈다. 꼭 다시 한번 만나고 싶다. 여행 중에 참 좋은 분들을 많이 만났다.
이야기를 나누던 중 미국인 의사 일행 중에 나보다 나이가 많아 보이는 동양계 미국인이 나에게 물었다.
"거기까지 왜 갔어?"
"그때로 다시 돌아가도 올라갈거야?" 라고 물었고 나는 별 망설임 없이 "yes"라고 대답했고 그 누나는 웃으면서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무슨 호기로 그랬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대답했다.
나는 다시 네팔에 가고 싶고, 그곳에서 또 트레킹을 하고 싶다. 물론 그때는 엄마의 산이라는 안나 푸르나 서킷을 할 것이다. 다시 한번 기회가 주어진다면 죽기 전에 한 번 더 세계여행을 떠나고 싶다. 세상은 정말 넓고 느끼고 배울 것은 정말 많다. 꼭 좋은 호텔, 좋은 비행기가 아니어도 좋다. 많은 이들을 만날 수 있는 호스텔이라도 좋고, 10시간 이상 이동하는 버스라도 좋다. 세상을 좀 더 볼 수 있다면 말이다. 나는 또 그 기회를 기다린다.
그렇기 이야기를 나누면서 네팔에서 14일 차 하루가 끝났다. 그 다음날에는 카트만두로 떠나는 비행기가 밀려 조금 소란스러웠지만 진감독님이 먼저 카트만두행 비행기에 올랐고 그 다음은 나, 약사선생님 이렇게 차례대로 비행기를 타고 카트만두에 도착했다. 그렇게 나의 아니 우리의 히말라야 에베레스트 베이스캠프 트레킹은 끝이 났다. 내게 새로운 희망을 선사한 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