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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이 내게로 왔다!

리처드 파워스의 <오버스토리>

파리의 서점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는 올해 100주년을 맞이하는데, 원래 이 건물은 17세기 노트르담 성당과 연결된 수도원으로 지어진 것이다.


파리의 서점에 대한 다큐멘터리를 만들고 있는데, 주 무대가 노트르담 성당 맞은편에 위치한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다. 내 인생 영화 <비포선셋>(2004)의 첫 장면, 주인공 제시(에단 호크)가 작가와의 대화를 하던, 마치 시간이 멈춰 선 듯한 고서점이 바로 그곳이다. 영화처럼 작가와의 대화를 촬영하고 싶었다. 그러나 프랑스는 한국처럼 촬영을 위한 스케줄 조율이 쉽지 않다. 하지만 간절히 원하는 것은 온 우주가 도와준다. 촬영 기간 동안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에서 작가와의 대화가 잡혔다. 


영화 <비포 선셋>(2004) 중에서, 제시(에단 호크)가 작가와의 대화를 하는 서점이 바로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다


“리처드 파워스? 그 사람이 누군데?”


문제는 프랑스에서 출간된 미국 문학에 수여되는 미국문학대상을 수상했고, 이번이 12번째 장편 소설이라는데 리처드 파워스의 소설 중에 한국에 번역된 책이 한 권도 없다는 것이다. 한때 컴퓨터 프로그래머로 일했고, 과학과 문학을 접목한 소설로 유명하다는 것이 우리가 아는 전부였다. 촬영을 진행하고 편집을 하는데 리처드 파워스는 멋진 미국인 소설가였다. 영어로 낭독하는 그의 소설은 시처럼 짧고 강렬한 문장이 매력적이었다. 


나무가 말한다 태양과 물은 끝없이 대답할 가치가 있는 질문이야


때때로 안경 너머 날카로운 시선을 던지지만 독자들 한 명 한 명과 눈을 맞추고 대화하는 그의 눈빛은 따뜻했다. 인터뷰도 멋있다. 작가와의 만남을 즐기느냐는 질문에 그는 다음과 같이 답했다.


“이런 만남이 끝난 뒤에야 즐거운 시간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사람들이 저의 이야기를 들으러 오는 초반에는 긴장을 해요. 준비가 되면 따뜻해지고 편안해지죠. 다양한 관객들이 좋은 질문을 합니다. 이런 행사가 아니라면 작가는 사람들을 만날 기회가 없어요. 책을 쓰는데 6년이 걸렸습니다. 5년 반 동안 저 혼자 방에 앉아 글을 쓰고 생각을 하죠. 이 책을 읽을 독자가 있을지, 어떤 독자를 대상으로 하며 어느 방향으로 가게 될지 말이죠.”


혼자 5년 반 동안의 고독을 견디며 쓴 소설이 읽고 싶었다. 그러나 원고를 쓰기 시작한 1월 말까지도 그에 대한 한글 자료는 전무했다. 구글링으로 그의 홈페이지를 들어가 책 소개와 기사를 읽고 자료를 찾았다. “THE OVERSTORY”는 청각과 언어장애가 있는 과학자가 나무와 의사소통을 하게 되면서 미국의 원시림을 구하기 위해 애쓰는 사람들의 이야기라고 한다. 

 

이 땅의 나무가 말할 수 있다면그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할 것인가?”


책 소개를 보며 한 번 더 읽고 싶어 진다. 그러던 어느 날, 페이스북에서 리처드 파워스의 오버스토리가 은행나무 출판사에서 번역되어 나온 것을 알게 되었다. 바로 동네 서점에 전화해 보니 한 권이 입고되어 있다. 나무가 우리에게 들려주는 이야기를 이제 읽을 수 있구나! 


리처드 파워스를 인터뷰했던 작년 가을, 오버스토리는 한국에 번역되지 않았었다.


처음에는 아무것도 없었다그러다가 모든 것이 있었다.”


첫 문장부터 경쾌하다. 영어로 읽던 리처드 파워스의 목소리가 연상되는 짧고 간결한, 시처럼 조탁된 언어의 번역도 마음에 들었다.


<오버스토리>는 나무처럼 “뿌리, 몸통, 수관, 종자”의 4 챕터로 이어지는데 

저마다의 운명, 상처를 딛고 나무와 인연을 맺은 9명이 주인공이다. 


- “삶처럼 변함없고 말없는 존재이자 알아챌 가치가 전혀 없는 것을 알아채는 매달의 훈련”으로 3대 76년에 걸쳐 매달 한 장씩 찍은 밤나무의 사진을 보고 그림을 그린 화가이자 파수꾼 니컬러스 호엘


- “나무를 심기 가장 좋은 때는? 20년 전이야.

네. 그리고 그다음으로 좋은 때는 지금이라고 늘 그러셨잖아요. 

틀렸어. 그다음으로 좋은 때는 19년 전이지.”

이민자 아버지가 소중히 간직해온 나무 반지를 간직해온 공학자 미미 마


- “근본적(radical)이라는 단어가 어디서 나왔는지 문득 애덤은 떠올린다. 근(radix), 본(wrad) 뿌리. 식물의, 지구의 뇌.”

자신이 태어날 때 심어진 단풍나무와 운명을 함께 한다고 믿는 외톨이, 이상한 심리학 실험으로 트라우마가 생긴 애덤 어피치


- “'삶’이라는 단어가 있었는데 당신이 와서 “아! 당신 이걸 뜻한 거지”라고 말한 것 같아."

연극 “맥베스”에서 움직이는 숲 배역을 맡으며 사랑에 빠진 변호사 레이와 속기사 도러시는 위기의 순간, <비밀의 숲>을 읽고 그들만의 숲을 만들고 지켜낸다. 


- 비행기가 추락하다 반얀트리 위로 떨어져 생명을 구한 군인 더글러스 파블리첵. 개벌현장에 나무 심는 일을 하다 그것이 나무를 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헤치는 명분이 됨을 알게 된다. 


- “모든 인간은 어떤 아이디어든 낼 수 있어야 하고 나는 인간이 그렇게 하는 미래를 믿는다.” 보르헤스의 말을 사랑했던 천재 소년, 수업 중 자신만의 연구를 계속하다 걸리고 다음 날 야단을 피하기 위해 참나무에서 일부러 떨어졌다가 불구가 된 닐리 메타는 게임으로 세계를 지배한다. 


- “과거는 미래에 항상 더 명확해진다.”

태어날 때부터 청각장애가 있지만 나무와 의사소통이 가능한 과학자, 페트리샤 웨스터퍼그. 자신의 연구가 사람들에게 외면당해도 계속 숲을 지킨다. 그녀의 책 <비밀의 숲(The secret forest)>은 다른 사람들에게 깊은 영감을 준다. 


- “나무의 시작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나무, 메이든헤어(maidenhair, 소녀의 머릿결)”

감전으로 죽었다 깨어나 나무의 영혼이 시키는 대로 떠나와 시위를 주도하는 대학생, 올리비아 밴더그리프


영월 하송리의 은행나무는 수령이 약 1,200년 정도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은행나무다.


세상에서 가장 뛰어난 논쟁도 사람의 마음을 바꿀 수는 없어요

오직 훌륭한 이야기만이 그럴 수 있어요.”


운명적으로 나무에 도움을 받은 이들은 사라져 가는 미국 원시림을 지키기 위해 따로 또 같이 연대하여 행동한다. 그 방법이 다소 과격하고 이상주의적인 시위로, 히피적인 모습으로 발현되기도 한다. 아무도 나무를 보지 않는 시대에 비로소 숲이 보이도록 쌓아 올린 촘촘하고 거대한 은유는 스타카토처럼 강렬하게, 웅장한 서사시처럼 나무의 이야기를 대신해 들려준다.


“나무 한 그루를 자를 때 그걸로 만드는 건 최소한 당신이 잘라낸 것만큼 기적적인 것이어야 한다”라고 말하는 리처드 파워스는 나무를 잘라 만들어지는 종이책에 기대어 생명이 미래에게 말하는 방법, 기억을 훌륭한 이야기로 엮어 사람의 마음을 바꾸고 싶은 것이다. 


- “세상에 사람들이 처음 나타나기 시작했을 때에는 6조 그루의 나무가 있었다그 절반이 남았다. 100년 안에 절반이 더 없어질 것이다.”


책을 다 읽고 그의 낭독 부분과 인터뷰를 교정하고 내레이션을 썼다. 작가는 글로 말하는 것이라 믿기에 몇 줄의 글이라 해도 작가의 책을 직접 읽고 쓸 수 있어 고마웠다. 


다시 <오버스토리>를 읽다


19세기 빅토르 위고의 소설 <파리의 노트르담>이 없었다면 우리는 노트르담 성당을 볼 수 없었다.


4월 노트르담 성당에 화재가 발생했다. <셰익스피어 앤드 컴퍼니>는 17세기 노트르담과 연결된 수도원 건물로 지어진 곳이다. 내레이션을 수정해야 했다. 그리고 다음 날, 리처드 파워스의 <오버스토리>가 2019년 퓰리처상을 수상했다. 또 수정해야 한다. 


노트르담의 화재 자료를 찾다 놀라운 사실을 알게 되었다. 19세기 심하게 파손되어 헐릴 위기에 처했던 성당이 오늘날 종교와 상관없이 세계인이 좋아하는 문화유산이 된 것은 빅토르 위고의 소설 <파리의 노트르담>(1831년) 덕분이라는 것이다. <오버스토리>를 통해 들려주는 나무의 이야기 : 생명체의 40억 년 동안에 가장 경이적인 산물들이 도움을 필요로 해요그들이 아니라 우리가모든 면에서 도움을 필요로 한다는 것에 우리가 귀 기울여야 할 이유다. 


한 뿌리에서 나와 15억 년 전에 둘로 나뉘었고, 지금도 각기 다른 방향으로 엄청난 여행을 해왔지만, 여전히 유전자의 4분의 1을 공유하고 있는 나무와 인간. 그 둘의 연대를 위해 “나”는 무엇을 할 것인가. 답은 리처드 파워스의 <오버스토리>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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