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 나이 먹어가는 중..

나의 반쪽!

by BlueVada

왼쪽 발목 철심제거수술을 마친 후 바로 퇴원을 한 나는 침대에 피난처처럼 널브러져 있었다.
눈을 뜨면 창문의 밝은 햇살이 나를 맞았고, 조금 움직이면 수술 부위가 은근하게 따끔거렸고, 그러면 다시 살포시 눈을 감았다.
잠을 자다 깨고, 물을 한 모금 마시고, 다시 눕고, 필요한 약을 챙기고… 그러다 허기가 지면 간단히 한 입 먹고는 또다시 흩어지는 의식 속으로 들어갔다.
그렇게 반복되는 단순한 시간들이었지만, 그 안에서도 시간은 후다닥 흘러갔다.

오늘로 꼭 다섯째 날.
후유증으로 더 괴로웠던 진통제를 끊어 보았다.
몸은 놀랍게도 버텼다. 처음 며칠처럼 살갗이 불타오르듯 아프지도 않았다.
아마도 몸이 스스로 회복의 속도를 찾고 있었던 것인지, 아니면 마음이 조금 단단해졌던 것인지, 며칠 만에 놀랍도록 회복력이 높아졌다.
그래도 병가를 받고 쉬는중이라 남은 며칠은 더 딩굴어야지 하는 마음에 딱히 할 게 없던 나는 작은 성취감을 혼자 음미하며 폰을 들고 사진 앱을 열었다.

Sutterfly에 차곡차곡 저장해 두었던 지난 세월의 흔적들이 스르르 펼쳐졌다.
아이들이 초등학생 때의 장난스러운 표정, 여행지에서 신나 하던 얼굴, 졸업식 날의 반짝거리던 눈… 사진이라는 건 참 신기하다.
마음속에서 이미 번지고 희미해진 순간들도 이렇게 또렷하게 다시 불러내 주니까.

그런데 사진을 넘기다 보니 특이한 걸 발견했다.
남편과 단둘이 찍은 사진이 너무 없었다.
아니, 생각보다 거의 없었다.

내 30대와 40대는 온통 아이들의 표정으로 채워져 있었다.
나는 늘 아이들 뒤에서 챙기고, 잡아주고, 웃겨주고, 그렇게 ‘엄마’라는 역할의 중심에서 살아왔는데, 정작 그 시절 내 옆에서 같은 속도로 세월을 지나던 남편의 얼굴은 사진 속에 거의 남아 있지 않았다.

남편은 나보다 다섯 살 많아서, 나는 늘 그걸 약점처럼 잡아 놀렸었다.
“내일모레면 60살이네~” 하고 장난을 치면 그는 나이에 유난히 발끈했었다.

"아니거든! 만으로 아직 몇 년 남았어!"

연애시절부터 그런 남편 놀리는 게 재미있었던 나는 매번 아저씨~ 노인네 등으로 불렀었다.


그런데 사진을 넘기다 멈춰 선 순간, 나는 작은 충격처럼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사진 속에서 남편은 분명히 젊었다.

내가 아이들에게 매달려 있는 동안, 이 사람도 자기 인생의 30대와 40대를 지나고 있었던 거다.

아이들의 졸업식에서 환하게 웃던 그 얼굴, 교회모임에서 열심히 움직이던 그 어깨, 캠핑장에서 나뭇가지를 정리하던 모습들에는 팽팽하고 건장한 여느 젊은이가 있었다.

그 모든 순간이 있었는데, 나는 왜 이제야 그걸 선명하게 보는 걸까.


아마도, 아파보니 비로소 보이는 것들이 있기 때문일 것일까. 아프고 나약해지면 사람의 시선은 가까이에 머무른다.

멀리 화려한 것들은 흐릿해지고, 가장 가까이에 있는 존재가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렇게 나는 깨달았다.


아이들은 “엄마 괜찮아?” 하고 잠깐 들여다보다 자기 세계로 금세 돌아간다.

그게 자연스러운지도..

아이들은 앞으로 나아가야 하고, 나를 중심으로 돌지 않아도 괜찮다.

그저 그 순간 “엄마”라고 불러주는 눈빛만으로도 충분하다.


하지만 남편은 다르다.

매일 집안에서 들리는 그의 발걸음, 물을 가져다주는 손, 뭐 좀 먹겠냐고 묻는 목소리, 부은 발을 위해 발아래 높게 쿠션을 챙겨주는 그 손길…

그런 아무렇지 않은 행동들이 하루를 지탱했다.

그는 큰 제스처를 하지 않는다.

대신 아주 조용한 마음으로, 습관처럼 나를 챙긴다.

그래서 더 고맙다.

그래서 더 뭉클하다.


결혼 생활이란 게 사실 이렇게 조용히 지나가는 시간들의 집합체인지도 모르겠다.

드라마처럼 겉으로 크고 화려한 순간이 아니라, 지질한 일상과 사소한 배려, 잔잔한 존재감으로 채워지는 것.

그리고 결국, 누가 내 옆을 지키는가의 문제.


수술 이후의 며칠은 나에게 육체적 회복의 시간이 아니라, 마음의 초점이 바뀌는 시간이었던 것 같다.

사진 속에서 멈춰 있는 남편의 지난 청춘을 바라보며, 나는 문득 결심했다.


앞으로는 우리 둘이 찍힌 사진을 더 많이 남았는지는 모르지만, 남은 시간만큼은 같은 방향으로, 같은 속도로, 같은 마음으로 걷고 싶다.

아이들에게만 세월을 바치지 말고, 우리 둘의 시간도 기록하자고.

이제는 “젊은 날의 남편”을 돌아보는 게 아니라, “지금의 우리”의 모습을 함께 담아내자고.

서로 늙어가는 모습을 숨기지 말고, 멋지게 받아들이자고.


늙어간다는 건 어쩌면 손을 놓는 것이 아니라, 손을 더 꼭 잡는 일인지도 모른다.

앞으로 함께 걸어갈 길이 얼마나 남았는지는 모르지만, 남은 시간만큼은

같은 방향으로, 같은 속도로, 같은 마음으로

걷고 싶다.


그리고 병상 위에서 깨달은 마지막 사실 하나.

사람이 남기고 싶은 건 결국 ‘함께한 시간’이라는 것.

누가 옆에서 나를 바라보고 있었는지,

누가 내 숨결을 걱정했는지,

누가 나를 위해 조용히 일어나 물 한 잔을 가져다주었는지.


그 모든 작은 순간들이 모여,

평생을 함께 살아온다는 의미가 된다.


나는 이제 그게 참 좋다.

그리고 참 고맙다.

그래서 부끄럽게도, 또 따뜻하게도 이런 마음이 든다.


우리, 멋지게 같이 늙어가자.

이제는 사진도 많이 찍으면서, 서로의 세월을 함께 기록해 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