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틈만 나면, 미얀마어

둘. 코이카 봉사단원 마띠리의 시간

by 마띠리

동글동글 귀엽게 생겼지만, 절대 만만치 않은 녀석을 만났다. 두근두근 설레었다가, 고구마 백 개 먹은 것처럼 답답했다가, 조금 있으면 머리를 쥐어뜯게 만드는, 그 이름은 바로 미얀마어였다.

코이카 국내 훈련 때 처음 미얀마어를 배웠다. 미얀마어에는 기본 자음 33개, 모음 7개가 있었고, 복합 자음, 복합 모음, 폐음절이 더 있다. 모음에는 3성조(저-중-고)가 있었다. 익숙한 것만 하느라 머리가 굳어버린 나에게 그림처럼 생긴 문자( က ခ ဂ)를 50개 이상 외우는 일은 쉽지 않았다. 거기다 “아(낮고 짧게)-아(힘 빼고 보통으로)-아(힘주어 높게)” 우리말에는 없는 성조라니. �과연 내가 하는 말을 미얀마 사람들이 알아들을까?’ 현지 적응 훈련을 마친 후 걱정 보따리를 한가득 안고 미얀마 제 2도시 만달레이로 가는 비행기를 탔다. 그때부터 미얀마어를 향한 짝사랑이 시작되었다.


근무지는 만달레이 시내에서 차를 타고 30분을 더 가는 ‘뻐뗀지’라는 지역에 있는 관개기술센터였다. 뻐뗀지 관개기술센터는 북부 미얀마의 댐 건설과 관개시설 계획, 품질을 관리하는 곳으로, 설계와 시공을 담당하는 공무원 교육도 이루어졌다. 2009년에 파견된 선배 단원은 코이카 프로젝트로 기관 내 열악한 시설과 장비를 교체하였고, 이후 근무하게 된 나는 1년 10개월 동안 직원들에게 컴퓨터 프로그램을 교육하게 되었다.

“밍글라바싱, 뛔이야다 완다바대. 쩸마 미얀마 나메가더 마띠리 핏바대. 미얀마 나잉안고 세다나원탄 아핏 와라대.(안녕하세요, 만나서 반갑습니다. 저의 미얀마 이름은 마띠리입니다. 미얀마에 봉사단원으로 왔습니다.)”

출근 첫날 두근두근 뛰는 마음을 달래며 미얀마어로 쓴 자기소개를 외우고 또 외웠다. ‘가는 날이 장날’이라더니 마침 기관장은 출장 중이었고, 나는 입도 못 떼보고 하루 종일 컴퓨터실에 혼자 덩그러니 앉아 있었다. 환영식을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나를 보며 “배둘레(누구세요)?”라고 묻는 직원들을 보며 머릿속이 하얘졌다. ‘나는 누구이고, 여기는 어디인가?’ 생각할수록 어처구니가 없어 자꾸만 나오려는 눈물을 꾸역꾸역 삼켰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기관장은 출장에서 돌아오지 않았다. 그동안 직원들은 마띠리가 컴퓨터와 한글을 가르치기 위해 한국에서 온 코이카 봉사단원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매일 아침 “아자!”를 외치며 용기를 내 출근했지만, 마주치는 직원들에게 “밍글라바(안녕하세요)”만 겨우 외치다 돌아오는 날이 계속되었다.


출근하고 일주일이 지나서야 처음 기관장을 만났고, 그녀는 두 달 후인 12월 초부터 엑셀과 한글 교육을 시작했으면 했다. 선배 단원들은 수업 준비를 3개월 이상 했다고 들었는데, 큰일이었다. 현지 적응 훈련하는 동안 정말 틈만 나면 미얀마어 공부를 했지만, 직원들을 만나면 막상 입이 잘 떨어지지 않았다. 그런데 미얀마어로 수업이라니, 눈앞이 캄캄했다.

코이카는 봉사단원이 현지어 개인지도를 받을 경우 심화 학습비를 두 달 동안 지원했다. 개인지도를 받기 위해 직원에게 부탁해 만달레이 대학에 다니는 열아홉 살 ‘테테윈’이라는 여학생을 소개받았다. 테테윈은 미얀마어, 중국어, 한국어, 일본어를 하는 언어 천재였다. 영어를 10년 공부하고도 말을 못 하는 나에게 테테윈은 우러러볼 수밖에 없는 대상이었다. 수업은 일주일에 세 번씩 한 번에 90분이었지만, 보통 2시간을 넘기곤 했다. 마음껏 말을 주고받을 수 있는 사람이 있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었다.


“마띠리, 바로 알롯 먀네이달라(마띠리, 왜 그렇게 바빠요)?”

점심시간에 만난 직원들은 내가 하루 종일 컴퓨터실에서 뭘 하는지 궁금해했다. 기관에 출근하면 보통 9시에서 9시 반. 11시 반까지는 엑셀 수업 자료를 만들었다. 점심시간에는 도시락을 먹는 직원들과 함께 밥을 먹었고 잠깐이라도 앉아 이야기를 들었다. 그리고 1시부터 퇴근하기 전인 4시 반까지 미얀마어 공부를 했다. 과외 시간에 배운 단어를 외우고, 문장으로 말하고, 그러다 모르는 건 한가한 동료에게 가서 물어보았다. 미얀마 사람들은 기본적으로 여유가 있었다. 그날 해야 할 일이 끝나면 수다를 떨거나 시간에 상관없이 퇴근했다. 미얀마는 전기 사정이 좋지 않아 자주 정전이 되었는데, 그럴 때면 모여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했다. 마음은 나도 같이 앉아서 듣고 싶었지만, 발등에 불이 떨어진 상황이라 시간 날 때마다 미얀마어를 공부할 수밖에 없었다.

시간은 흘러갔다. 그것도 빛의 속도로. 엑셀 초급반 수업 첫날 15명의 직원은 초롱초롱한 눈빛으로 내 말에 집중했다. 두 달 동안 ‘밍글라바’를 열심히 외치고 다닌 덕분에 직원들과는 어느 정도 친분이 쌓였고 내 서툰 말을 조금은 알아들었다. 엑셀은 프로그램 용어가 영어라 수업 자료를 보고 무난하게 따라 했다. 문제는 질의응답 시간이었다.

“샬라 샬라 샬라?” 직원이 질문하면 나는 알아듣지 못해 “페이페이 뼈 뻬이바(천천히 말해주세요).”라고 말했다. 나는 질문을 이해한 뒤 아는 단어는 모두 섞어 설명하고 물었다.

“쩸마 뼈다고 날렐라(제가 하는 말 이해되나요)?”

“나말레부(이해가 안돼요).”

“벨로 뼈야말레 마띠부(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에어컨이 있었지만 내 얼굴은 화끈화끈, 등에서는 식은땀이 줄줄 흘렀다. 수업 시간 40분이 마치 4시간처럼 느껴졌다.

“쩸마 미얀마싸 까웅까웅 마뼛땃부, 아나바대(제가 미얀마어를 잘 못해서 죄송해요).”

“마띠리, 야바대(괜찮아요). 아띵타봐(힘내세요)”

직원들은 안쓰러운 눈빛으로 나를 위로하고 격려해 주었지만, 부끄러움에 밤새 이불을 차며 괴로워했다.


외국어를 잘하려면 무조건 많이 듣고 말해봐야 한다는 말이 맞았다. 그래서 결심했다. 일상생활에서 직접 부딪히며 말을 배우기로. 내가 사는 건물 1층에서 가게를 하며 지내는 주인집 가족들, 출근길에 만나는 과일 가게 아주머니, 매일 같이 출퇴근하는 동료들과 하루 한 번 이상 말하기로 했다. 출퇴근길에 레펫예사잉(미얀마식 카페)에 들러 동료들이 하는 이야기를 듣고 이것저것 물어보았다. 과일을 살 때는 계산만 하지 않고 “디 오웃사 벨로 커바들라(이 건 뭐라고 불러요)?”라며 과일 이름을 물었다. 매일 저녁이면 1층 가게에 앉아 40대 중반인 주인집 아줌마와 초등학생 아들, 나와 이름이 비슷한 띠리웨이(유치원생 딸)가 생활하는 모습을 보았다.

“띠리웨이, 바이 살라(배고프니)?” 주인집 아주머니가 물으면, 딸은

“마홋바부(아니요), 바이 마사바부(배 안고파요).” 대답했다.

“다베메, 타밍 사야메 너(그렇지만 밥 먹어야 해). 띠리레 타밍 사말라(띠리도 밥 먹을래요?)”

“호웃께, 뻬이잉 싸바메(네, 주시면 먹을게요)” 나는 저녁을 종종 얻어먹기 시작했다. 물건을 사러 오가는 대학생들과도 인사하며 물건 값을 대신 받기도 했다. 하루, 이틀 시간이 지나며 그게 나의 일상이 되었다.


동료들, 주인집 가족들은 나를 볼 때마다 말했다.

“마띠리, 미얀마싸 레라다 쪼자대(미얀마어 공부 열심히 하네요).”

“호웃께. 쩸마 미얀마싸 레라다 쎄이윙싸대(네, 미얀마어 공부가 재미있어요)”

“미얀마 네이다 뼈라(미얀마에서 지내는 거 행복해요)?”

“호웃께, 아얀 뼈대(네, 너무 행복해요).”

처음에는 나의 행복에 관심을 두는 미얀마 사람들이 이상했다. 한국에서는 거의 주고받은 적 없는 “뼈라(행복해요)?” 라는 말이 낯설었다. ‘그게 왜 궁금하지?’ 시간이 지나면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사랑하면 알게 되고, 알게 되면 보이나니, 그때 보이는 것은 전과 같지 않으리’라는 말처럼 누군가를 좋아하면 그 사람이 궁금해진다. 궁금하면 묻게 되고, 묻다 보면 알게 되고, 그러다 보면 내가 알던 게 다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미얀마에서 만난 사람들을 향한 내 마음이 그랬다. 그동안 앞만 보며 달리느라 가슴 속 저 아래 묻어두었던 감정들이 꿈틀꿈틀 고개를 들었다. 나를 아껴주는 사람들에게 차곡차곡 쌓여 가는 고마움을 전하고 싶어, 나는 매일 틈만 나면 미얀마어를 공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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