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았다. 롤모델!

<독서문화공동체> 강연 리뷰

by 화요일

운전보다 대중교통이 더 편한 나는 버스를 타고 창밖을 바라보며 멍하니 명상에 빠지는 날이 많다. 그러고 있노라면 뜻하지 않게 눈에 확 들어오는 현수막들이 있다. 버스 안에서 지나치듯 마주친 현수막 홍보지를 도서관에서 또 만났다. 반가운 마음에 냉큼 신청했다. 이번에는 동네 도서관에서 하는 워크숍&북포럼에 참석하기로 나만보는 스케줄표를 채운다.


북포럼 &워크샵 홍보문
가까이에 있었던 파랑새


아침 일찍 도서관에 간다. 차가운 날씨에도 도서관은 이미 강연을 기대하는 사람들의 발길로 온기가 가득하다. 강연장에 자리를 잡으니 첼로와 바이올린 연주가 먼저 시작된다.


힐링음악회

공연을 시작하기 전에 연주자들이 소개와 연주에 관한 설명을 해주니 음악에 대한 배경지식이 부족한 나도 금방 알아차리고 조금 더 깊이 음악을 들을 수 있다. 집 가까이에 이런 음악회가 있다니 감사하고 고맙기만 하다. 부지런히 찾아 나서기만 하면 잡을 수 있는 행운의 파랑새는 가까운 곳에 있었다.


초면이지만 제 롤모델이 되어주실래요?

두 번째 순서는 북포럼. 처음 뵙는 작가님이 들어오신다. 임지영 작가님의 강연이고 제목은 <그림과 글이 만나는 예술 수업>이다.


임지영 작가의 북포럼

편안한 대화체로 작가님의 삶의 이야기를 쭉 말씀하신다. 그런데 뭔가 통하는 데가 있다. 작가님의 경험이 나와 비슷한 점이 상당히 많았고, 강의 내용 중에 내가 요즘 갖고 있는 고민들의 힌트가 하나씩 들린다. 귀를 쫑긋한다. 그녀는 구름 잡듯 멀리에 있는 아주 크고 위대한 사람이 아니라 나와 비슷한 성향의 사람으로 아주 가깝게 느껴졌다. 나보다 먼저 뭔가를 이뤄낸 사람으로 그녀의 노력과 성공의 깨알 같은 증언을 들을 수 있어 롤모델을 찾기만 한 게 아니라 실제로 나도 될 수 있는 롤모델의 실체를 눈으로 보고 손으로 직접 만져 본 느낌이랄까. 무척 반가웠다.


도서관에서 찾은 보물


임지영 작가님은 문학을 전공했다고 한다. 그녀의 아버지는 엄청난 미술작품 수집가로 그녀에게 수백 점의 작품을 물려주셔서 갤러리를 10년 정도 경영했는데, 그녀는 그림 파는 것에 재능이 없었다. 그림은 안 팔리고 임대료는 다달이 나가고 앞으로 살길이 막막했던 그녀는 시간이 나는 대로 근처 도서관을 들락거렸고 거기서 그녀의 삶을 바꿀 실마리를 찾았다고 했다.


지금의 나는 도서관과
도서관에서 만난 사람들이 만들었다.


그녀는 도서관에서 다양한 프로그램에 참여하고 유명한 사람들을 만나고 그러면서 도서관에 다양한 예술강좌를 제안, 기획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녀는 강좌 리뷰를 하고 책을 쓰는 제안을 받아 을 출판하게 되었다고.


나도 도서관에서 답을 찾으려 했다. 궁금한 것들의 해답을 찾으려 했고 어떻게 키워야 할지 막막한 육아의 조언을 찾고 싶을때도, 조용히 나만의 시간을 보내고 싶을 때도 도서관을 찾았다. 책을 가까이하는 아이들을 만들고 싶어서 도서관에서 마을공동체를 진행했고, 시간 나는 데로 도서관에서 주최하는 강연과 강좌도 챙겨 들었다. 도서관은 나에게 뭔가 사지 않아도 되는 곳이었고, 의심하지 않아도 되는 곳, 물질적인 것들 너머에 있는 것들을 듣고 보고 만지게 해주는 장이며 매개체가 되어주었다. 나에게도 도서관은 제2의 학교였다.


마을공동체를 하겠다고 한 사람

내가 마을공동체를 한다고 하면 사람들은 흔히 취지도 좋고, 하고도 싶지만 실제로는 자신은 감히 할 수 없는 것, 하기 힘든 것이라 단정 짓고 멀리한다. 하나 나는 그 먼 것을 내 아이들에게 가져와 손에 만질 수 있는 실체로 경험으로 감상으로 놀이로 만드는 데 많은 공을 들였다. 그녀도 그랬다. 그녀도 마을공동체를 믿었고 실천했다.


그녀가 있던 서초구에서 마을공동체를 하겠다고 한 사람이 그녀가 최초였다고 했다. 나 또한 그랬다

나도 우리 동네서 처음 마을공동체를 시작했었다. 주민자치센터를 찾아가 마을공동체를 하겠다고 장소가 필요하다고 지원해줄 수 있는지 문의했었다. 그리고 자치센터에서 만들어주는 프로그램 말고 주민들이 프로그램을 직접 만들어 왔으니 그 프로그램을 할 수 있게 해 달라고. 주민자치센터니 주민들이 자치적으로 하고자 하는 일을 지원해줄 수 있지 않냐고 설득했지만 센터장은 그런 전례가 없어서 해줄 수가 없다고 했다. 하지만 그녀가 있던 서초구에서는 최초이기에 그녀의 모든 요구를 다 들어주었다고 했다. 부러웠다. 처음이기 때문에 거절당한 나와 처음이기에 지지받았던 그녀는 무슨 차이가 있을까. 단지 동네의 차이일까.


편하고 쉽게 예술에 다가갈 수 있다면.


그녀는 말했다. 예술 교육은 예술의 위대함을 알리기 위함이 아니라고 오히려 예술에 편하게 다가갈 수 있는 태도를 키우는 게 먼저라고. 그런 방법으로 7가지를 제시했다.


졸지 마세요. 담대한 마음으로 그림을 만나세요.

응시하세요. 나만의 시선으로.

권리를 가지세요. 다 알필요도 다 볼 필요도 없어요.

자유하세요. 정보 없이 그림을 맞닥뜨리세요.

순간 이동하세요. 그림 안 세계 속으로

기록하세요. 내가 느낀 감성을 그대로

나누세요. 그림 한 점을 매개로


무언가를 가르친다는 것은 교과서 속 지식을 그대로 전하는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내가 가르치는 교과를 담는 세계, 그것을 대하는 태도, 그것을 배우는 사람들의 이야기도 담아낼 수 있는 수업이라야 두고두고 그 교과를 즐기고 이용할 수 있는 지식 사용자를 키워낼 수 있는 것이다. 영어 수업에도 그 마음을 담아내려고 노력했다.


그녀도 마찬가지다. 미술이라는 하나의 교과를 지적인 교과서로 한정 짓지 않고 쉽고 편하게 미술에 다가가게 하는 태도를 전하려 노력했고 예술을 즐길 수 있도록 안내했다. 그런 교육철학은 내가 영어를 가르칠 때 취하는 태도와 딱 맞아떨어졌다. 신기했다. 분야는 다르지만 비슷한 생각을 만나서.


휴대폰에 쓴 글도 책이 될 수 있다고?!


노트북을 펴고 앉아서 오랫동안 글을 쓰고 편집하고 작업을 해야 책을 펴낼 수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녀는 분명히 말했다. 휴대폰으로 쓴 글로 책을 출판했다고. '올레~~ 나도 가능하겠는 걸.' 희망의 메시지를 얻었다. 그녀는 작품을 보고 얻은 감흥이 날아가기 전에 휴대폰 메모장에 재빠르게 적었다고 했다. 나도 뭔가 쓰고 싶은 소재를 발견하면 언제 어디서든 휴대폰을 꺼내 글을 쓰고 저장한다. 이렇게 쉬지 않고 쓰면 언젠가는 책이 될 수 있다는 분명한 증언을 들은 것이다. 기분이 좋다.


누구나 쉽게 할 수 있는 단계로 만들기


"슬로리딩"을 하는 방법과 그 즐거움을 책으로 전하고 싶었지만 누구나 쉽게 이해하고 다가갈 수 있게 재구성하는 방법을 고민했었다. 아주 오랜 경험이 있었고 말로 다 표현 못 할 나만의 이유와 철학이 있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쉽게 전하는 것은 전혀 다른 어려운 문제였다.


그녀는 그 어려운 예술감상을 아주 쉬운 단계로 정리해버렸다.


1. 그림을 3분 응시하기.
2. 자신의 느낌을 15분 쓰기
3. 발표하기


요즘은 교사 혼자 강의하고 학생들이 듣기만 하는 수업을 지양한다. 학생 모두가 참여자가 되는 수업일 수록 학생의 자발적인 배움이 적극적으로 일어나는 수업일 수록 좋다. 임지영 선생님의 수업에서는 학생의 참여가 많다. 그리고 정답이 없다. 누구나 자신의 생각을 말할 수 있고, 맞고 틀리고 가 없다. 같이 볼 작품도 무한대고 그것을 말할 학생의 생각도 무한대라 수업의 활용도 쉽고 구성도 다채로울 수 있어 지루할 틈이 없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림도 교사도 아니고 학생 자신이 주인공인 수업이다.


슬로리딩은 책을 읽다가 잠시 멈추고 충분히 생각하고 나누는 수업이다. 그림이라는 소재가 책으로만 바뀌었을 뿐 충분히 비슷한 단계로 응용이 가능하다.


1. 책을 3분 성독하기.
2. 자신의 느낌을 15분 쓰기
3. 발표하기



책의 일정 부분을 정해 같이 돌아가며 소리 내어 읽고 그 부분에서 가장 인상적이었던 부분과 이유를 적고 발표하는 수업의 단계를 기본으로 두고 진행하는 것은 충분히 할 수 있다. 자신의 느낌을 글쓰기로도 그림으로도 편지로도 발표로도 얼마든지 변경할 수도 있고. 예술수업의 단계가 슬로리딩으로도 쉽게 변경할 수 있다는 힌트를 얻었다. 답답했던 고민에 실마리를 찾은 셈.


이 나이에 롤모델은 왜?

우리는 흔히 어린아이들이 공부하고 배우는 일은 당연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나이가 들고 어른이 되고 나서부터는 세상 모든 것을 다 아는 것처럼 배우는 것을 멀리한다. 바쁘다는 이유로, 힘들다는 이유로, 귀찮다는 이유로. 그러나 세상을 살아간다는 일은 어른인 나에게도 늘 새롭고 어려운 일 투성이다. 지친 저녁에는 텅 빈 냉장고를 주시하며 뭘 해 먹을까를 고민하는 사소한 것부터, 매일 봐도 새로운 아이들의 변화와 변덕에 어떻게 대처할지, 빠르게 변하는 세상 속에서 눈앞에 닥친 일상만 해결하고 살다가 내가 뒤쳐지는 건 아닐까 하는 막연한 두려움에 이르곤 한다. 이런 때는 메리 포핀스처럼 뭔가 문제를 해결해주는 '척척박사 베이비 시터 아니 어덜트 시터'가 있으면 좋겠다고 엉뚱한 상상을 하곤 한다. 이런 고민 중에 필연처럼 우연히 내가 찾는 중년의 롤모델들이 하나씩 나타난다.


오늘은 작가 임지영 님이 손에 집히는 롤모델이 되었다. 나이가 들고 인생의 중반에 들고 힘도 빠지고 한 두 가지 질병에 시달리곤 하지만 인생은 계속되고 고민도 계속된다. 이렇게 삶이 계속되는 한 나는 나에게 영감을 줄 수 있는 롤모델을 찾는 여정을 멈추지 않을 것 같다.


1시간 남짓 그녀의 열정적인 강의를 듣는 내내 작가님은 강연을 들으러 온 우리도 대단한 에너지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다라고 말했다. 자신은 늘 뭔가 새로운 것을 하고 삽질하며 산 사람인데 그 삽질이 뭔가를 해낼 것이다라며 응원해주었다. 그런데 그날은 그 말이 콕 짚어 나에게 하는 말처럼 들렸다. 그간 내가 했던 수많은 삽질들이 주마등처럼 스쳤다. 내가 추구하고 실천하는 것들이 결코 삽질로만 끝나지는 않을 거라는 희망이라는 단어를 오랜만에 품을 수 있었다. 참으로 귀한 한 시간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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