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사랑엔 가을이 없었고, 당신에겐 별이라도 되고 싶었다.
으레 그렇듯 가을은 선선한 공기로 여름을 한번에 뒤덮으며 기척도 없이 찾아왔다. 나는 그때 당신과 함께 머물던 곳에 와 있다. 아주 먼 날을 약속했던 그 밤에 혼자 앉아있다. 퍽 오랜만이니 조금은 담담해졌겠지 싶었는데, 조금 묘하다. 요란하진 않은데 깊은 곳에서 꿈틀거리는 게 이제껏 본 적이 없는 마음 같아 일단은 함부로 기어 나오지 못하게 눌러두었다. 가을바람을 맞히기엔 연약한 속살일 것 같았다.
별뿐이 될 수 없겠다 싶었지. 해나 달은 감히 너무 거대했으나, 하늘 어디쯤엔 새겨지길 바랐으니까. 내가 따라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거 하나밖에 없었다. 길을 환히 비추진 못해도, 길을 잃지는 않게 해 줄 정도. 화창한 오후나 투명한 밤하늘에 먼저 찾는 구름이나 달은 아니어도 이따금 먼길 나섰을 때 맞이하는 여럿 중 하나일 수는 있는 정도. 그리움의 대상은 아니어도 그리움을 이야기하다 한 번쯤 언급이 되는 그런 희미한 정도. 공전公轉을 터득하지 못한 대신, 언제나 같은 곳에 자리한 사람이고는 싶었다.
그 어떤 이유로 우리가 만나, 눈과 꽃과 바다를 함께 시처럼 누볐으니, 이 생에 한 번 당신과 사랑을 튼 것으로 나는 적어도, 충분히 충분했다. 남들처럼 서늘한 바람까지 견디고 나면, 감히 우리가 아름다워질지도 몰라. 그러니 각자의 앞날을 위해 떨어지는 낙엽만은 모르는 채로 두도록 하자. 끝내 밟지 못한 계절로 남겨 두도록 하자. 우리의 미련함과 미련을 그렇게 꾸며 두는 걸로 하자.
가을이 없고 별이 되겠다는 말은 사실, 미안했다는 말.
당신 탓에 나의 첫사랑은 지금의 나로부터 역산逆算된 셈법의 기록. 해서 다 늦은 나이에 사춘기 소년이 되고 말았다. 마음 하나면 충분할 수도 있는 일 앞에서 마음뿐이 없는 것이 한없이 부끄러웠다. 도돌이표에 부딪힌 것마냥 주름도 무색하게 서툴고 작은 사람이었지.
가을이 없고 별이 되겠다는 말은 진심으론, 마음을 두고 가겠다는 말.
가슴이 소란스럽다던 어느 날, 집을 나서려는 등에 대고 당신이 말했다. "시계는 풀어두고 가, 그래야 돌아올 것 같아." 이제쯤엔 시계 풀 장소를 알 수 없으니, 차라리 가슴 한쪽 썰어 저 위에 걸어두고 가려한다. 언제나, 아직 헤지 못한 별이기를 바라며. 오늘은 아니더라도 어제와 내일엔 부유하는 사람이기를.
그러니까 이건 이따금 쓰던 편지가 아니라, 일기로 남을 이야기.
나는 그때 당신과 함께 머물던 곳에 와 있다. 아주 먼 날을 약속했던 그 밤에 혼자 앉아있다. 저 아래서 꿈틀거리던 마음 슬몃 꺼내 마주하니, 낙엽이었다. 그래서 이제는 안다. '그때' 우린, 가을바람을 함께 맞기엔 연약했던 속살이었다는 것을.
[사진 : 파리-인천 상공 / 부다페스트, 헝가리 / 속초, 대한민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