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제주살이 #1 해안길
제주 공항에 도착해서 구좌 숙소로 해안도로를 따라 이동한다. 겨울이라고 다르지 않게 제주의 바다는 여전히 투명하고 아름답다. 그리고 항상 진득하지 않은 깔끔한 바다 냄새가 와서 좋다. 그리웠던 아름다운 제주 바다를 마주하니, 내 안의 뭔가 비워지고 청량해지는 듯한 기분이다.
그리고, 겨울이라 새롭게 볼 수 있는 부분도 있었으니, 역시 제주는 언제 오든 좋은 곳이다.
구좌읍의 김녕-월정-세화-하도-종달-성산으로 이어지는 바닷가 길을 '해맞이 해안로'라고 한다. 길 이름처럼 일찍 일어나서 일출을 보며 이 길을 걸어도 멋질 것 같다.
우리는 세화에 숙소를 두고 이 길을 실컷 지나다녔다. 운전할 때면 가능한 바다 가까이에 있는 길로 드라이브 삼아 지나고, 어떤 날은 하루 종일 풍경을 보며 걷기도 했다.
겨울에 제주를 오니 철새들도 와있다. 따뜻하니까 철새들이 오는 건 당연한 일이기도 한데, 제주에서는 처음으로 보게 되니 꽤 인상 깊었다. 다양한 새들이 싸우지 않고 함께 옹기종기 모여있는 모습도 어쩐지 신기하다. 새들도 사람이 많지 않아서 이곳이 좋은가보다. 하도리가 철새도래지라고 하는데 구좌의 다른 바닷가에서도 종종 쉬고 있는 새들을 볼 수 있다. 오리들은 더 따뜻해서일까, 강물인지 물이 흘러나오는 곳에 더 많이 모여있다. 모두 무사히 잘 보내고 갔으면 좋겠다.
요즘 들어 많이 들리는 말인데, 주변이 무탈해야 내가 행복하다고 한다. 주변의 안 좋은 이야기를 들으면 몸까지 탈이 나는 이입이 잘 되는 처지가 되고 보니, 생각하면 할수록 맞는 말 같다. 내가 알게 되는 부정적인 것들도 없었으면 좋겠다. 종종 사람들이 필요 이상으로 화가 많은 것 같아서 안타까울 때도 있다. 차라리 아무것도 모르고 싶을 때도 있다. 에너지가 부족하면 사람들과 만남을 줄이고 자신에게 집중하게 된다고도 하는데 내가 지금 그러한 상태인가 보다. 되도록 좋은 일만 생기기를, 모두가 편하고 행복하고 너그러운 세상이 되어가기를 바래본다.
하얗고 엄청나게 큰 풍력발전기의 날개가 천천히 돌아가는 모습은 뭔가 멋지다. 변함없이 곧고 여유로운 모습 때문일까? 여행이라서 별것 아닌 사소한 것들도 좋아 보이기 때문일까. 보기 드물어서이기도 할 것이다. 이 멋진 것이 여러 개 모여 있으면 더 예쁘게 보인다. 바람개비같이 돌아가는 풍력발전기 옆으로, 오늘의 바다는 제대로 쪽빛을 띄고 있다.
먹으러 가려고 걸었던가 걷다가 잠시 들러 먹었던가는 아무튼 중요하지 않다. 세화에서 평대로, 시흥으로 걸으면서 풍경도 담고 배도 채워 보았다.
추운 곳에서 와서 그런지 따뜻한 제주 음식이 먹고 싶어서 아침 식사로 조개죽을 먹었다. 바닷가 마을마다 '해녀의 집'이라는 이름으로 해녀분들께서 직접 운영하시는 식당이 있는데 조개죽을 메뉴로 하는 곳은 잘 없는 것 같다. 조개죽을 처음 먹었는데 조개탕이나 바지락 칼국수와는 또 다른, 깊은 바다향의 담백한 맛이 난다. 재료는 어쩌면 특별하지 않지만, 맛은 매일 오고 싶을 정도로 좋았다.
식당 앞으로 나와서 보니, 부두로 가는 긴 다리가 있어 그 방향으로 걸어보았다. 좁은 길 옆으로 맑지만 깊은 청색의 바다가 있어, 마음만은 바다 위에 떠있는 것 같다. 조용한 항구 마을이어서 걸어가는 단 몇 분만에 이곳 주민이 된 것처럼 느껴진다.
몇 번 전의 제주 여행 때 협재의 어느 가게에서 맛있게 먹었던 톳 김밥이 있었는데, 다음에 다시 찾아갔더니 가게는 있지만 이 메뉴는 없어져 있었다. 많이 아쉬웠던 기억이 남아있는데, 세화 숙소에서 바다로 길을 나서다 그 앞에서 톳 김밥을 판매하는 가게를 만났다. 반가운 마음에 안 먹어볼 수 없었다. 톳의 맛이 조금 약했지만 자연스럽고 건강한 맛이어서 좋았다. 추억을 찾아 다시 올 듯하다.
검고 푸른 해안길을 따라가다 삼거리에 있는 음식점을 발견해서 밥을 먹고 가기로 했다. 밖에 놓인 식탁에 앉아 성게국수와 소라 비빔국수를 먹는다. 도로 바로 앞에 앉아서 먼지까지 같이 먹을 수도 있겠지만 그런 문제보다, 바다를 바라보며 바다향이 나는 음식을 먹으니 기분이 더없이 좋았다. 다른 날 저녁에 돌문어 부침개와 뿔소라 꼬치구이를 포장해서 숙소에서 청보리 막걸리와 먹었다. 모두 각각의 재료 맛이 살아있어 음식마다 특별하고 아주 맛있다. 벽에 붙여진 사진들로 보니 해녀분들께서 운영하시는 것 같은데, 해산물도 잘 잡으시고 요리도 잘하시고 만능이신 것 같아 존경스럽다.
조금 더 걷다 보니 평대 해수욕장이 나왔다. 적당한 크기의 해변에 모래는 매우 곱고 수심이 얕은 곳이 꽤 멀리까지 있어서, 여름에도 다시 와야겠다 생각을 했다. 제주는 섬이니까 셀 수 없이 많은 해변이 있지만 저마다 특색이 있어서 매번 기억해뒀다가 다시 오게 된다. 이번 여행에서도 벌써 많은 장소에서 다시 와야겠다 마음을 먹었다.
이곳의 모습도 겨울에만 볼 수 있다 하여, 귤껍질을 널어놓은 풍경을 보러 왔다. 귤껍질은 한창 걷어내는 작업 중이었다. 사유지이기 때문에 목장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지만, 철망 밖에서는 구경할 수 있었다. 오는 길에 카페에서 귤껍질 차를 보고 왔는데 이렇게 작업해서 오는 것이겠구나. 바라보고 있으니 눈이 상큼해진다.
이곳이 바다 모음에 들어온 건 목장 옆 해안길을 따라 절벽 아래로 보이는 바다가 두드러지게 예쁘기 때문이다. 유난히 바람이 세게 불었는데 그래서 그런지 더욱 차갑게 아름다웠다. 올레길 표시가 있는 걸로 봐서는 바닷가를 따라 걸을 수도 있는 모양이다. 파도 소리를 들으며 바다에서 오는 바람을 맞으며 한동안 앉아있었다.
여기는 어떤 곳에 예약을 해두고 시간이 남아 근처를 배회하다 검은 모래라는 표지판에 이끌려 오게 되었다. 북쪽 지역으로 보아야 될 듯한데, 동서 이분법으로 나누어 동편으로 같이 넣어둔다. 작은 해수욕장인데 아주 검정이라고는 할 수 없지만 검은 편에 들어가는 모래들로 되어있어 여느 바다와 분명하게 다르다. 와보길 잘했다고 스스로를 칭찬해주었다.
제주에 오면, 파란 하늘에 뜬 뭉게구름 덩어리들, 얕고 깊은 바다의 물빛과 현무암의 어울림이 늘 나를 두근거리게 한다. 늘 가까이에 이 풍경이 닿는 곳에 있다가 산책도 하고 차도 마시고 싶다.
겨울이지만 따뜻하고, 아름답지만 한적하니, 여러 사정으로 여행을 취소하려 했지만 여기 바다를 보고 있으니 한없이 좋기만 할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