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가장 존경하는 스승님이신 노우호목사님께서 내가 결혼 당시 내게 남편을 대하는 팁을 말씀해주시기를, 어떤 의견이 있더라도 그것을 남자에 앞서서 제시하지 말라고 하셨다. 여자들이 도통 이해 못 하는 남자의 심리가 있는데, 남자들은 여자의 말이 옳은 줄 알면서도 먼저 그 얘기를 옆에서 먼저 해버리면 그 말을 안 들으려 하는 습성이 있다는 것이다. 그러니 어떤 일을 처리할 때는 비록 답답하더라도 남편이 해결하게 하고 아내가 따라가는 모양이 되게 하는 것이 좋다고.
그땐 그 말씀이 무슨 뜻인지 몰랐다. 이제야 와닿는다. 내가 명령하면 실행하는 "또봇" 혹은 "여보 보이"라 남편을 조롱하는 지금의 내 뇌리를 탁 때리는 말씀. 평화주의자인 남편은 내 생각을 존중하는 것이 남편의 사랑 방식이었기에 자신의 자존심도 내려놓고 나한테 다 맞춰주다 보니 또봇이나 여보 보이가 된 것이다. 어찌 보면 내가 자초한 형국이었으면서 이제야 나 힘들다고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되라고 괴롭혔던 것이다.
그런 습성은 아들에게도 있다. 초등학생 때까지는 부모 말에 순종하던 녀석이 뻗대기 시작할 무렵 가장 많이 들었던 말이, 자신도 하려고 했던 일을 엄마가 그렇게 명령조로 말하면 하기 싫다고.
"그건 대화가 아니라 명령이죠. 상의가 아니라 통보이고요."
명령조로 통보하는 건 누구나 싫다. 그런데 그게 남자들인 경우는 못 견디도록 싫가보다. 그 결과 남편은 입을 닫아버리고, 아들은 귀를 닫아버리는 것이다. 남편이나 아들과의 갈등의 핵심은 바로 이것이었다.
왜 나는 말투가 명령조에 통보형일까?
내 말투에 대한 피드백은 많이 들었었다. 그리고 함께 오는 피드백이 성격이 급해서 그렇다, 말이 빠르다는 것이다. 여기에 완벽주의 기질도 한몫을 해서 일이 뜻대로 되지 않는 것을 인내하지 못한다. 일을 할 때는 칼날같이 예민해서 아무도 곁에 오려하질 않는다. 특히 논문 쓰기나 보고서 쓰기처럼 고도의 정신력이 요구되는 것이 주업이다 보니 늘 머리가 고단하다. 그래서 집중하고 있을 때 집에서 어떤 일들이 들어오면 그저 신속히 해결해야 한다는 맘에 급급해서 빨리 끝내려다 보니 명령조에 통보형이 될 수밖에 없었다. 함께 의논하고 상의할 충분한 시간을 갖는 게 머릿속 무거운 내겐 부담이었다.
그렇다고 몇 시부터 몇 시까지를 정해놓고 논문을 쓴다는 것도 내 글쓰기 스타일과는 맞지 않다. 새로운 창안과 문제 해법을 늘 고민하는 글이기 때문에 컴퓨터에 앉아있을 때만 논문을 쓰는 게 아닌 것이다. 하나의 주제에 몰두하면 어떤 해법이 나을지에 대한 아이디어가 지속적으로 머릿속에 리플레이되느라 다른 일들은 건성일 때가 많다. 그러니 가정의 문제는 빨리 해결을 해야 한다는 마음에 급급해 결국은 내가 결정해서 통보하는 모양이었던 것이다.
궁극적으로 해결사의 역할은 점점 내게 가중되어 내 일이 되고 말았고, 내가 무너질 때 이게 힘들다고 남편을 못 잡아먹어 안달이었던 것이다. 남편의 문제해결력은 정확히 말해서 떨어진다기보다는 오래 걸리는 편이라고 말해야 한다. 그 말이 그 말인가? 주어지면 못하지는 않는다. 대신 그 자리에서 바로바로, 최대한 미리미리 해치우고 내 논문에 집중하는 나와는 달리, 데드라인까지 최대한 시간을 끌었다가 막판에 해치우는 스타일이다. 난 이게 미치도록 싫었다. 별 것 아닌 것 같은 일이라 바로 해치울 일도 매사에 그런다. 내가 이걸 그렇게 못 참아하는 걸 알면서도 교정 되질 않는다.
그러면서 평소에는 "사랑해, 사랑해." 해대니, 난 그 말이 영혼이 없어 보이는 것이다. 사랑하는 여자가 그렇게 싫어하는 거, 그까짓 게 뭐라고 그거 하나 못 고쳐주나. 난 사랑하는 사람이 싫다는 거 그 자리에서 바로 안 할 것 같은데... 그래서 보란 듯 싫다는 거 일부러 더 했던 것도 많았던 것 같다.
남편은 틈만 있으면 코 골고 잔다. 새벽예배부터 시작하는 교회 사역은 정말 극한직업이긴 하다. 피곤에 쩔어있는 거 이해한다. 잠이 절대적으로 부족할 수밖에 없음을 안다. 돌이켜보면 그에게나 나에게나 잠이 정말 부족했고 깨어있는 동안은 체력의 삼사백프로는 고갈시킬 수밖에 없었던 생활이었다. 내가 가정의 어떤 일을 빨리 처리하고 논문 속으로 들어가려는 것처럼, 남편은 일단은 눈 좀 붙이고 맑은 정신으로 일을 처리하고 싶은 것이다. 그러다 보니 늘 데드라인까지 미뤄지고 결국 못 참는 내게로 다 밀려오는 것이다.
둘 다 좋아해서 택한 일이지만 가성비는 최악인 직업이다. 좋아하는 직업과 좋은 직업이 달라서 생기는 불협화음이다. 내가 내는 솔루션으로도 해결이 안 된다면, 이직을 하든 이혼을 하든 뭐 하나와는 이별을 해야 할지도 모를 듯하다. 여하튼 우리 집에서 내 해결사 포지션은 점차 명령조 통보형 말투를 내게 고착시킨 꼴이 되어버렸다. 이게 남편과 아들의 귀와 입을 닫게 만든 원인이 된 것이다.
글을 쓰니 참 속이 시원하다. 이 글을 처음 쓸 때까지만 해도 원인을 몰랐는데 글을 쓰다 보니 원인이 발견이 됐다. 난 그래서 복잡할 때는 쓴다. 쓰면 정리가 된다.
아들이 무너진 나를 일으킨 이상, 어떻게든 살아볼 것을 결정한 이상! 아직은 이혼이나 이직과 같은 이별이라는 해법은 염두에 두질 않겠다. 권태기 극복을 위한 마지막 솔루션의 상의하기이다. 네 번째 솔루션까지는 사실 연정의 달달함 회복을 시도한 거라면, 마지막 솔루션은 관계의 올바른 자리를 찾기를 시도하는 것이다.
부부라는 관계가 애정을 기반으로 하는 관계가 맞긴 하나, 이것만이 전부이진 않다. 애정이 전부인 관계는 만났다 헤어지고 끝나는 연인만으로도 충분하다. 부부는 하나님 앞에서 서약하고 사람들 불러서 축하받고 법적으로 묶인 사이이다. 사랑을 초월하는 책무라는 것이 있다.
먼저 하나님께서 맡기신 아이들의 인생에 대한 책임이 있다. 세 명의 인생을 하나님 뜻에 맞게 키워내어 주님께 드려야 한다. 우리가 부부라는 사실을 축복해준 사람들이 와준 발걸음, 내준 시간과 경비에 묻어난 그들의 진심을 배반하지 않아야 한다. 하나님과 사람들의 마음을 배반하면 법적 제지를 받도록 사회는 둘의 관계를 강제할 수 있다. 부부는 사랑보다 더한 책임이 더 기반이 되는 관계이다. 그들에게 주어지는 책임감에 지치지 않으려고 사랑하는 사람과 결혼하는 것이다. 어찌 보면 결혼으로 인해 주어지는 책임들을 함께 이행하면서 사랑이 더욱 진실해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
따라서 공동의 책임 과제를 이행하면서 발생하는 문제로 덜컹거릴 수도 있다. 사람이기 때문에. 또한 연애시절의 달달한 사랑만이 사랑인 것이라는 착각에 그 맘에 대한 기억이 희미해지면 더 이상 사랑하지 않으니 재미없다고 느껴질 수도 있다. 지금의 현황을 정확히 진단하고, 최선의 처방을 함께 할 수 있어야 계속 갈 수 있다. 그건 바로 관계 회복이다.
우린 주께서 주신 공동과제를 완수해야 할 책임이 있는 공동연구팀이라고. 이젠 어떤 누군가가 결정해서 통보하거나 명령하지 말고 상의하자고. 나도 급하게 가지 않고 최대한 말을 아끼며 기다릴 테니, 당신도 피곤하겠지만 조금만 속도를 내서 의견을 달라고. 우리 앞으로 상의하자고. 나는 말을 아껴야 하는 포지션이니, 늘 발제는 당신이 하는 걸로 해요, 우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