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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범수 Jan 27. 2020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시선에서 피어나는, 사랑과 예술

1.

인간에게 있어, 언어의 발견은 아마 형용할 수 없을 만큼의 큰 축복이었을 것이다. 허공을 떠다니던 무형의 소리들에 하나둘 형태와 의미를 부여하고, 나아가 체계를 이루게 되면서 유형의 자산으로 이어질 때, 문득 희열을 맛보는 순간이 우리에게 더 많이 찾아왔으리라 상상해볼 따름이다. 그렇게 생겨난 많은 말과 글의 탄생은 우리가 우리의 삶을 더욱 면밀히 살피도록 만들었는지도 모른다. 우리의 삶이 얼마나 기쁘거나 슬픈지, 나와 당신의 세계가 얼마나 무한한 방향으로 흐를 수 있는지를 더욱 세세하게 설명할 수 있는 도구인지도 모른다. 언어는 그런 우리와 함께 자신의 영역을 끝도 없이 넓혀나갔을 것이다.

언어의 그 섬세한 속성은 나의 멀지 않은 생활 속에서도 꿈틀대며 영향을 주고 있음을 느낀다. 일상 속에서 무심결에 뱉은 말들과 함부로 전한 문장들이 나의 갈증을 막연히 해소하는 데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는 것을 말이다. 실수로 터져 나온 나의 언어들은 결국 회수되지 못하기 때문에, 무척이나 길고도 죄송스러운 사과를 전해야 하는 것을 안다. 그 미약하지만 중요한 것을 잊지 않으려 애쓰지만, 잘 되지 않는 때도 있다. 그럴 때마다 번번이 아쉬움을 느낀다. 우리는 효율적인 의사소통의 수단으로서 언어를 쓰지만, 때로는 긴밀하고 끈끈한 마음을 채 담지 못하는 야속함의 매체라는 걸 새삼 깨닫기도 한다.


갈수록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그들과 함께 하게 되면서, 나는 침묵과 시선의 힘을 믿기 시작했다. 묵묵히 서로를 바라보는 일이 단순히 무응답의 표현이 아니라는 것을 알게 된 것이다. 더 많은 단어들로 누군가의 마음을 붙잡는 것보다 때로는 진실된 시선의 호소가 더욱 큰 울림으로 다가가는 듯하다. 시선이라는 비언어의 표현도 각자만의 파고를 가지고 넘실대는 것을 느낀다. 그 파도는 때로는 걷잡을 수 없이 높아지기도 하고, 한없이 잠잠할 때도 있을 것이다. 사랑이 피어나는 순간에 그 파도는 얼마큼 높아져서 얼마나 큰 포말을 보여줄까. 최근에 극장에서 본, 셀린 시아마 감독의 영화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 역시 그 시선에서 비롯된 세세한 사랑의 이야기다. 서로를 향해 던지는, 그 오롯한 시선에서 흘러나온 긴밀한 사랑의 이야기였다. 사랑과 예술, 그리고 그를 위해 함께 하는 두 여인의 모습과 서로를 향한 응시. 그것만으로도 서로의 마음을 전하는 데에 부족함이 없음을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2.

어떤 의식적인 노력을 들이지 않고도, 우리는 이 영화의 서사가 여성을 중심으로 꾸려져 나간다는 것을 쉽게 포착할 수 있다. 세 명의 젊은 여성들이 서로에 대해 탐색하고, 각자만의 호흡으로 상대를 이해하며 연대하는 모습들은 단순히 계급이나 사회적인 여건들에 얽매이는 듯 보이지 않는다. 마리안느와 엘로이즈가 사랑을 나누고, 세 여자가 부엌에서 함께 게임을 하고 신화를 주제로 생각을 피력하는 일, 소피가 낙태하는 순간을 두 사람이 함께 지켜보는 장면과 같은 것. 그를 통해 영화는 그들이 신분 격차와 같은 외적인 요인들로 흩어지기보다는 여성이라는 공통분모로 서로에게 힘이 되어주는 모습을 보여준다. 그 모습은 마치 가족 나아가 자매와도 같이 보여서 무척이나 친숙하고 평등해 보이기까지 한다. 신분을 뛰어넘은 친밀한 모습의 연대가 인상에 깊이 남은 이유다.

더불어, 마리안느와 엘로이즈가 같은 눈높이로 보내는 시선 속에서 동일한 선상에 놓여있는 그들을 계속 비추는 것 역시 인상에 남았다. 그림을 그리는 화가가 모델과의 관계에서 점유하는 어떤 시선의 권력은 일종의 우위에 오른 듯 행사되기도 한다. 하지만 영화에 등장하는 화가인 마리안느는 낮에만 관찰이 허락된 모델인 엘로이즈를 빠짐없이 기억하기 위해 애쓴다. 그런 것들이 기존의 권력관계를 비트는 부분이 아니었을까. 또한, 엘로이즈를 그리는 마리안느는 그녀의 외면을 샅샅이 눈에 담고, 엘로이즈는 자신이 응시하고 마침내 관찰한 마리안느의 모습들을 하나씩 얘기하며, 두 사람이 기존의 화가-모델 사이의 관계를 벗어나 동등한 위치에서 각자의 역할을 다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서로 사랑하기 때문에 성립이 가능했던 것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3.

영화는 여성의 응시(Female-gaze)를 기반으로 모든 장면들을 설정한다. 그런 점에서 그간 접해왔던 퀴어 영화들 (<캐롤>, <가장 따뜻한 색, 블루> 등)의 것과는 차별되는 지점인 듯하다. 앞선 여러 영화들과의 비교를 차치하고서라도, 그간의 섹스신들과는 다른 지점들을 쉬이 눈치챌 수 있다. 영화는 그들이 사랑을 나누는 모습을 보여주지 않는다. 영화는 둘이 사랑을 나누기 전, 팽팽한 긴장 속에서 서로를 지그시 바라보는 눈빛을 보여준다. 혹은 그들이 사랑을 나눈 뒤에, 너무나도 평온하게 늘어져있는 자연스러운 모습들을 보여주며 관객들로 하여금 사랑을 나눈 것을 인지시킨다. 여성 감독이 연출한 사랑의 장면은 이렇게 다르게 보일 수 있다는 것을 문득 느끼게 됐다. 불규칙하게 겹쳐지고 포개진 하얀 이불들 속에서 자유로운 두 배우의 몸과 곡선들이 기존 영화들에서 연출된 장면보다 훨씬 더 에로틱한 공기를 만들어낼 수 있음을 깨닫기도 했다.

기존 퀴어 영화들의 것과 명확히 다른 점의 지적과 비교를 통해 이 영화의 탁월한 지점들을 설명할 수는 없을 것 같다. 메일 게이즈와 피메일 게이즈에 대해 명확히 구분해낼 수 있는 기준이라 할 게 없을뿐더러, 각각의 영화의 서사와 캐릭터들이 가지는 호흡과 분위기들은 그 영화 고유의 정서를 기반으로 만들어진 것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어떻게 묘사되었든, 감독의 예술적 혹은 상업적 성취를 목표로 세상에 나온 작품들이기에 하나의 척도로 우와 열을 가리는 일이 무의미한 듯 보인다. 하지만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의 것은, 적어도 나에게는, 어느 휴일의 아침처럼 무척 평온한 듯 보였다. 여유로워 보이지만, 느슨하지는 않은 둘의 분위기를 지켜볼 수 있었다. 여러 모로 기억에 남는 장면 구성이었다.


4.

마리안느는 엘로이즈의 약혼자에게 보낼 그림을 그리기 위해 투입된 화가다. 어찌 보면, 그녀의 인생을 망치러 온 것이지만, 그녀의 구원자일지도 모르는 일이다. 마리안느는 자신을 향한 엘로이즈의 적대적인 태도와 눈빛들을 받으며, 밤에 초상화를 그리기 위해 열심히 그녀를 탐색한다. 하지만 마리안느가 자신의 기억과 집념으로 쌓아 올린 그림이 당사자로 하여금 거부당했을 때 오는 상실감은 곧이어 분노로 바뀐다. 자신이 보고 경험했던 모든 감각들을 부정당하는 느낌이었을 것이다. 그 한 번의 거부반응이 마리안느를 사랑으로 이끌었으리라 생각한다.

단순히 그녀를 보고 직관적으로 캔버스에 옮기는, 가장 효율적인 방식의 작업이 아니라 어떤 시간들을 불필요하게 가질 수밖에 없었던 점에서, 마리안느는 그녀에게 마음을 쏟게 됐을 것이다. 엘로이즈와 산책하고, 그녀가 겪었던 혹은 겪고 있는 어떤 아픔들에 귀 기울이는 그런 시간들은 사실상 그녀의 초상을 온전히 캔버스에 그리는 데에는 필요하지 않은 시간이었을 수도 있다. 그럼에도 그녀가 사랑에 빠지게 된 건, 그 시간들 덕분이었던 것 같다. 엘로이즈를 관찰한 낮의 기억으로 마리안느는 그녀의 모습과 숨결을 빠짐없이 더듬고 그녀를 최대한 캔버스에 옮기기 위해 끊임없이 되새겼을 것이다. 그렇게 그녀를 복기하는 시간 속에서 아마 엘로이즈에 대한 사랑이 진해져 간 게 아닐까.

그간 자신이 들인 노력과 시간들을 부정당한 상실감에 첫 번째 초상화를 지워버린 후, 마리안느는 엘로이즈에게 더욱 빠져들게 된다. 게다가 엘로이즈의 어머니인 백작부인이 마침 그 섬을 떠나, 섬에는 오직 세 명의 여인만이 남게 되면서 그들의 사랑은 불타오르게 된다. 마리안느는 더 이상 낮동안의 엘로이즈를 떠올리며 그림을 그릴 필요가 없다. 사랑하는 엘로이즈를 캔버스 앞에 두고, 그녀가 그림에 담고 싶어 하는 엘로이즈의 모습을 담을 수 있게 된다. 교차하는 시선 속에서 둘의 관계는 백작부인이 섬을 떠나 있는 며칠간의 시간 속에서 더욱 짙어진다.


그 사랑은 밤에 은밀히 열린 여인들만의 축제에서 비로소 불타오르는 듯 보인다. 주술적인 듯 들리는 노래, 엘로이즈의 드레스에 자연스레 붙은 불과, 그를 두려워하지 않는 사람들, 그리고 마리안느가 손을 잡자마자 급격히 전환되는 화면. 점점 고조되며 마침내 끝에 다다르는 순간에, 마치 퓨즈가 나가듯, 틱 하고 대낮의 바닷가 씬으로 화면은 전환된다. 급작스럽고 예측할 수 없는 컷 전환이 오히려 둘의 사랑에 대한 성질들을 대변하는 듯한 느낌을 받기도 했다. 끝이 보여서 무척이나 불안하지만 걷잡을 수 없이 커진 사랑에 대한 장면 같았다고 하면 되려나.


5.

섬에 남은 세 여인은 언젠가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헤어짐에 대한 이야기를 한다. 소피는 오르페우스가 뒤를 돌아본 선택에 화를 낸다. 마리안느는 오르페우스가 시인으로 남기 위해 에우리디케를 떠나보내는 선택을 했을 것이라 생각하고, 엘로이즈는 에우리디케가 추억으로서의 사랑을 위해 오르페우스에게 돌아보라는 말을 했으리라 해석한다.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의 이야기는 마리안느와 엘로이즈의 구도에 고스란히 이식된다. 마리안느가 엘로이즈에 대한 환영을 종종 맞닥뜨리다가, 둘이 마침내 헤어질 때 엘로이즈가 환영 속의 모습으로 뒤를 돌아보라 하는 순간, 우리는 그 신화가 그들의 이별에 대입될 수 있음을 알게 된다. 에우리디케가 오르페우스와의 사랑을 추억하기 위해 돌아보라는 말을 했을 거라던 엘로이즈의 말처럼, 둘의 타올랐던 시간들은 그렇게 끝이 난다.


그 후로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처럼 둘은 서로를 만나지 못한다. 다만 먼 곳에서 지켜볼 수 있을 뿐이다. 그들에게는 지난날들에 대해 회상하고 지켜보는 일만이 허락된다. 아름다운 맺음의 여러 방식 중 하나일 것이다. 마리안느는 28이라는 숫자가 함께 그려진 엘로이즈의 초상화를 통해, 엘로이즈는 오케스트라 공연에서 듣게 된 비발디의 사계 '여름'을 통해 서로를 추억한다.

영화는 엘로이즈가 그 노래를 듣는 장면을 서서히 클로즈업하면서 그녀의 미묘한 표정 변화를 오래도록 프레임 안에 담는다. 음악을 들으며 웃기도 하고, 울기도 하는 그녀의 모습은 단순히 음악에 대한 감동에서 기인한 것이 아닌 듯 보인다. 함께 하프시코드 앞에 앉아 그 노래를 연주하던 마리안느와 길지 않았지만 온전히 그녀의 한 편에 자리 잡은 마리안느와의 추억들이 함께 그녀를 웃고 울린 것이리라. 오르페우스 신화만큼 절절한 사랑의 마무리다.


6.

사랑과 예술은 참으로 비슷한 물성을 가진 행위라는 생각을 하게 된다. 상대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에서 출발한 애착에서 시작되며, 마침내 나만의 고유한 결과물을 만들어낸다는 것. 그리고 친애하는 마음들이 오고 가는 일이 서로를 바라보는 일에서 기인한다는 데에서 두 행위는 같은 지점에 기반을 두고 있다고 느끼게 된다. <타오르는 여인의 초상>을 보며 확신을 더욱 가지게 되는 것 같다. 묵묵히 던지는 시선이 때로는 몇 마디의 말 혹은 화려한 문장들보다도 더 많은 마음들을 함축하고 있는지도 모르겠다는 확신 말이다.



+

나는 시선이라는 말을 이따금 쓰다 보면,  베이커 감독의 영화 <플로리다 프로젝트> 유독 떠오른다. 상영할 당시에 무방비로 영화관에 들어갔다가, 마음을 와르르 무너진 채로 나왔던 기억이 생생하다. 기회가 된다면, 언젠가  영화에 대해서도 적어보겠다. 윌렘 대포가 보내는 눈길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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