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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범수 Sep 03. 2021

D.P.

인권은 위병소 앞에서 멈춘다.

0. 얼마 전 넷플릭스 오리지널 시리즈 <D.P.>가 릴리즈된 이후로 지금까지, 콘텐츠를 둘러싼 다양한 의견들이 포털에 업로드되고 있다. 얼마나 재밌으려나 싶어서 틀어놨던 게 그 자리에서 정주행할 만큼 흥미로웠다. 버디물로서 재미있었고, 장르물로서 숨이 턱 막히는 기분이 들었다. 진작 얘기하고 싶었지만 더 나은 방법을 찾다가 포기하고는 이제서야 생각을 조금 써본다.


1. 이 시리즈를 보게 된 건, 작년에 개봉한 <반도>부터 시작해 메이저한 작품들에 자주 모습을 보이고 있는 구교환 배우를 보기 위함이 첫 번째였다. ⟪남매의 집>의 라오우나 <반도>의 서 대위, <킹덤: 아신전>의 아이다간을 통해 핏기 없는 서늘함으로 관객을 조여오는 배우가 이번에는 어떻게 분했을지 무척 궁금했다. 그리고 마음에 무척 드는 연기를 봐서 즐거웠다. (아직 못 본 <모가디슈>를 제외하고) 구교환 배우의 최근 출연작들에서의 분량은 너무 아쉬웠기 때문이다. 오죽하면 <킹덤: 아신전>에서는 생사초에 감염된 노루보다 덜 나왔다는 말도 나왔을까. 그 투정이 무색할 만큼 넘치는 분량과 발랄한 연기가 극 전반에 깔린 어두운 분위기를 밝게 해주는 것 같아 좋은 선택이었다 생각이 든다. 진지하고 감정적으로 들어가는 부분에서는 가볍지 않은 호(랑이)열(정)의 모습이 인상에 남는다.

그와는 반대로 정해인 배우가 분한 준호 역시 진지하고 각 잡힌 모습, 동시에 자신의 어릴 적 아픔에서 비롯된 따뜻한 마음이 돋보여 호열과의 화학작용이 특히 좋았다. 다만 준호라는 군인의 모습 중 제대로 묘사되지 않은 건 지나치게 잘생긴 얼굴 정도...? 해본 소리다.

그들을 계속 받쳐주는 박범구 중사 역의 김성균 배우도 군탈체포조 콤비에 잘 섞여 보기에 수월했다. 한 인물만 톡 튀어보는 것이 아니라, 세 인물 모두가 서로의 실수를 전력으로 보완하는 점에 있어서 탁월한 캐스팅처럼 보인다. 아, 그리고 임지섭 대위의 손석구... 진짜 뜨악했다. 거짓말 안 하고, 그렇게 번지르르하게 생겨서 할 일은 부사관들에게 짬 때리는 대위... 어딘가에 정말로 있는 사람 같아서 너무 충격이었다. 나이스하게 하고 다니는 대위 부대마다 한 명씩 꼭 있다. 대부분 유능했던 걸로 기억하는데, 특유의 여유 넘치면서 기선제압하는 분위기가 실제의 것과 똑 닮았다. 바로 옆 부대의 중대장이라 했어도 믿을 듯...


2. 고증의 측면에서는 정말 훌륭해서 소름이 돋을 정도였다. "PTSD"라는 단어를 사용할 만큼 병적인 트라우마로 남았다고 얘기할 순 없지만, 단순히 공간과 소품뿐만이 아니라 생활관 특유의 싸한 분위기까지 모니터를 타고 넘어오는 기분이 들어 오싹해진다. 특히 개인별로 할당된 침대가 아니라 침상에서 모두가 함께 생활하는 한 공간 안에서 나뉘는 온도가 내게 전해지는 기분이었다. 전역을 앞두고 모포와 매트리스를 항시 펴고 있는, 생활관의 문과 가장 먼 병장의 자리에서만 도는 온화함, 문과 가까워질수록 낮은 계급의 병사들이 좌불안석으로 지내는 냉랭함. 또, 큰 주전자나 물뿌리개로 취침수를 뿌리는 모습, 상관에게 경례 후 살짝 목례하는 이병, 전입 신병에게 잘해주는 마이너한 동시에 돌발적인 성향을 가진 맞선임. 성추행을 일삼는 선임병, 욕을 시원하게 하거나 혹은 뺀질 대는 간부. 이 모든 것들이 합쳐져 다시 나를 강원도로 데려다 놓는다. 훌륭한 건 훌륭하고, 역겨운 건 역겨운 것이다.

이 생각은 얼마 지나지 않아 공포로 전이된다. 가혹행위나 실제 생활에서의 욕설에 대한 묘사가 지나칠 정도로 높은 점 때문이었다. 가래침을 받아먹게 한다든지, 벽에 박힌 못 앞에 후임병을 세워놓고 밀친다든지의 묘사는 기본이고, 방독면을 씌우고 물을 붓거나 라이터로 털을 태우는 등의 폭력은 상상도 못한 수준이었다. 드라마를 끝까지 본 뒤, 이 모든 가혹행위들이 실제 사건들에서 행해지던 폭력을 각색해 만들어진 결과라는 사실이 더욱 놀라게 했다.


3. 2017년 9월, 자대에 전입한 나는 모든 선임들에게 "천만다행"이라는 표현을 종일 듣게 된다. 나에게 보직을 넘겨주고 전역한 조 병장이 있을 때까지 얼차려가 만연했다는 사실에 감사하라는 의미였다. 간밤에 의무실에 모여서 기합을 주는 것을 물론이고, 질문에 답하지 못한 신병에게 군기가 빠졌다며 내리갈굼하기 일쑤였다고 한다. 물론 그 암적인 존재가 전역했다는 사실이 주는 안도감은 얼마 가지 못했다. 조 병장이 일하던 처부의 둘째 고참이 이제 제일 선임이 되었고, 나는 그 사람이 쌓아왔던 미움을 고스란히 당해 내는 막내가 되었기 때문이다. 얼마 뒤에 같은 처부에 들어온 동기가 관심 병사였던 탓에 나는 그 아이의 몫까지 욕을 먹어야 했다. 실컷 모욕적인 말을 듣고, 실컷 협박당하는 모습이 불쌍했던지 그 선임의 동기들이 나를 찾아와 위로하는 일도 많았다. 허튼 생각이 들지 않도록 하기 위한 중대장의 부탁이었을 것이다.

허튼 생각이 시작되면 대개 자살시도로 나아가는 경우가 많았다. 자살시도는 정말이지 먼 얘기가 아니었다. 같은 훈련소를 나와 다른 중대로 배치받았던 병사도 전입한지 한 달이 채 안 될 즈음 화장실에서 목을 맸고, 마침 불침번을 서던 선임병에 의해 목숨을 건졌다. 그렇다고 자살을 생각하진 않았다. 다만 그 감정을 조금 더 객관화해서 바라보는 일이 많았다. 숱한 압박이 힘들어서 자살을 결심하기보다는, 이래서 자살을 선택하는구나, 하는 방식으로 사고하는 게 버릇이 되었다. 안타깝게 떠난 익명의 청년들이 얼마나 힘들었으면 그런 길을 선택했을지 생각하며, 그에 비하면 나은 것이라 암시하며 지내야 했다. 그렇지 않으면 정말 견디기 힘들었을 것이다.


4. 얼마 전에는 그런 칼럼을 읽었다. 최근 콘텐츠 이용자들의 소비 성향에 따르면, 주인공이 성장해가는 서사 대신 부와 권력을 모두 가진 먼치킨이 악하거나 혹은 비열한 세계를 싹쓸이하는 소위 "사이다" 전개에 목말라한다는 내용이었다. 주인공이 여러 사건과 갈등을 거치며 깨닫고 성장하는 이야기를 기다리고 싶지 않아 할뿐더러, 콘텐츠가 제공하는 세계를 직접 소비하는 주체가 되거나 동일시를 통해 함께 성장의 여정을 떠나기보다 그를 소비하는 타인을 구경하는 객체가 되는 걸 선호한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D.P.>는 아마 그 사례에 반대되는 예시가 될지도 모른다. 준호의 분명한 성장서사임에도 크게 주목받는 건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체제 안에서는 분명 이등병이라는 나약한 존재지만 군탈체포조로서는 탈영병을 체포할 수 있다는 권력을 가지고 있다는 점이라든지, 준호와 호열, 내지는 박범구 중사와의 연대를 통해 이뤄지는 상호보완적인 면모 등 다양한 지점에서 생각해 볼 만한 부분들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이를 차치하더라도, <D.P.>가 그리는 군대라는 폐쇄적인 집단의 모습이 현실의 것과 지독할 정도로 유사하기 때문이다. 선진 병영의 시대에 들어서며 폭력 문화가 바뀌었다 하더라도, 군대는 여전히 다양한 형태의 폭력으로 누군가를 절벽으로 내몰 것이다. 2005년 개봉한 윤종빈 감독의 영화 <용서받지 못한 자>가 호평을 받은 이유는 스크린 속 태정과 승영, 지훈이 견뎌내는 군대라는 세계가 현실 속 한국의 군대라는 집단이 가지고 있는 암적인 부분들을 훌륭하게 재현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지금까지 수없이 많은 폭력과 압박에서 시작된 파멸적 행위들이 끝내 뉴스로 전해질 때 우리는 크게 슬퍼하고 분노하며 16년이라는 시간을 보내왔다. 하지만 미디어의 조명으로 우리가 접할 수 있던 군대의 모습은 정예 군인과 파견된 의사의 극적인 사랑이 피어나는 요람 정도에 머물렀다. 그리고 이제서야 <D.P.>가 도착했다. 


5. 드라마를 보면서 가장 기억에 남는 장면은 황장수 병장이 전역하는 씬이다. 그 장면을 보면서 어떤 책의 제목을 생각했다. 이 상황에 적용해 말한다면, "인권은 위병소 앞에서 멈춘다" 가 될 것이다. 지독할 만큼의 폭력을 저지른 황장수는 전역으로 자신이 써 내려간 폭력의 역사를 전부 무화시킨다. 만기일을 채워 계급사회에서 탈출하기 때문이다. 물론 그 안에서의 권력 사용이 죄였다 생각하지 않겠지만, 전역이 그의 죄를 사한 셈이다. 그에 반해, 조석봉 일병은 위병소 앞에서 당당히 죄 사함 받았다 생각하는 황장수에게 인사를 건네지 못한다. 피해자이자 용서의 주체인 석봉은 황장수의 전역으로 용서할 대상을 잃는다. 누구 마음대로 용서를 받는 거지? 위병소 철문 안에서 용서를 행하지 못한 석봉은 끝내 탈영하고, 전역이 곧 정죄라 생각하던 황장수는 끝내 석봉에게 위협을 당한다. 선진 병영이라는 네 글자를 우리는 입이 닳도록 얘기해댔다. 과연 병사, 나아가 군인의 인권은 철조망을 넘을 수 있는가? 그렇게 될 공산은 거의 없다. 여전히 인권은 위병소 앞에서 멈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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