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대방이 고개를 끄덕이면 물건을 건네받는다. 아주 찰나의 검수 과정을 거쳐 돈을 송금한 후, “그럼 잘 쓰겠습니다”라는 짧은 인사를 주고받으며 돌아서기까지 걸리는 시간은 불과 2~3분 남짓.
가끔 해 본 당근마켓 거래에 대한 내 경험은 이 정도였다. 비싼 물건은 비싼 거니까 새 걸로 샀고, 싼 물건은 싸서 부담이 없으니까 새 걸로 샀다. 그러다 보니 당근마켓을 이용할 일이 많지 않았다.
그런데 얼마 전 이사를 하느라 가구와 소품 여러 개를 한꺼번에 처분하면서, 당근의 신세계를 맛보게 됐다. 예상외로 당근은 중고 물건을 매개로 다양한 인간 군상을 관찰하고, 때로는 속 깊은 고민까지 나눌 수 있는 곳이었던 것이다!
처음에는 흠집 하나 없는 물건도 그냥 ‘나눔’으로 내놨다. 나의 목표는 이삿날 전까지 최대한 빨리 짐을 줄이는 것이었으니까. 그런데 좀 이상하다는 느낌이 들었다. 상태 좋은 가구를 ‘나눔’으로 올리면 불과 3초 만에 “제가 가져갈게요”라는 메시지가 오곤 했다. 아니, 내가 올린 글과 사진을 3초 동안 끝까지 볼 수 있기는 한 건가?
“크기는 확인해 보신 거죠? 뭘로 가지러 오시나요? 이 서랍장이 일반 승용차에는 안 들어갈 수도 있을 것 같아서요”라고 조심스레 물어보니, 짧고 굵게 돌아온 대답. “리어카로 갑니다.”
그래, 누구나 집에 리어카 한 두대쯤은 가지고 있는 거... 는 아니잖아??!! 프로필을 살펴보니 거래 온도가 무려 무려 99도(!). 업자인 것 같다는 강력한 의심이 몽글몽글 솟아올랐다. ‘나눔’을 검색어로 입력한 후 계속 ‘새로고침’하다가 괜찮은 물건 나오면 뜨는 족족 가져가서 되파는 사람.
내 손을 이미 떠났으니 그 후에 되팔든 말든 무슨 상관이람 싶을 수도 있겠지만, 마음이 그렇지 않았다. 그래도 내 손 때가 묻은 건데, 필요로 하는 사람이 가져가서 잘 쓰길 바라는 건 욕심이 아니잖아.
그래서 그다음부터는 메시지가 온 순서대로 파는 것이 아니라, 프로필을 통해 이전 거래 내역을 확인한 후 실제 필요한 물건들을 사고판 것이 확실해 보이는 사람에게 우선권을 주기로 했다. 그랬더니 어떤 사람은 “제가 제일 먼저 메시지 보낸 것 같은데 왜 다른 사람과 거래하시죠?”라고 따지기까지 하더라;; 뭐야, 여기 왜 이렇게 치열해 ㅠㅠ
거래를 하면 할수록 ‘나눔’은 능사가 아니란 걸 깨달았다. 다른 건 차치해도, 약속을 펑크내거나 취소하는 경우가 너무 잦았다. 공짜니까 가벼운 마음으로 일단 가져가겠다고 했다가, 막상 귀찮아지면 쉽게 마음을 바꾸는 게 아닐까 싶었다. 나는 혹시라도 늦을까 봐 회사에서 서둘러 퇴근해 헐레벌떡 집에 가는데, 약속 시간 불과 30분 전에 “그냥 다른 분 드리세요”라는 문자를 받고 허탈한 적도 있었다.
그래서 2주일 전에 일찌감치 32인치 TV를 가져가겠다고 선점했던 사람이 약속일 바로 전날 내 확인 메시지에 “죄송합니다. 아무래도 못 가져갈 것 같아요”라는 답을 보내자 참지 못하고 쏘아붙이고 말았다.
“그럼 좀 더 미리 말씀해 주셨어야죠. 저도 제 이사 일정 맞춰서 약속 날짜를 잡은 건데, 사람 정말 곤란하게 만드시네요. 다른 사람들한테는 이미 예약된 거라고 다 거절했는데, 갑자기 이러시면 너무 무책임한 거 아닌가요?”
하지만 상대방은 내 메시지를 계속 확인하지 않았다. 자기 할 말만 하고, 난처해지면 잠수 타는 사람의 전형이었다. ‘에라, 됐다. 나도 신경 끌란다’ 마음먹고 다시 판매 글을 새로 올린 후 까먹고 있었는데, 그날 밤 갑자기 뒤늦게 메시지가 왔다.
“죄송해요. 제가 하루종일 정신이 나간 상태였다가 이제야 다시 연락드려요. 저도 원래 내일이 이삿날이었는데, 오후 4시에서야 부동산으로부터 연락을 받았어요. 제가 이사 가기로 한 집에서 갑자기 집을 못 비워주겠대요. 저는 내일 이 집에서 나가야 하는데. 저 붕 떠버렸어요. 핑계 같지만 너무 멘붕 상태라 답이 늦었어요. 죄송합니다.”
앗, 이거 나의 곤란함과는 차원이 다른 곤란함 아닌가. 안 그래도 힘든 사람을 더 정신없게 만든 것 같아서 따뜻한 위로를 보냈다. “사정 잘 알겠습니다. 이사가 정말 피곤한 일이죠. 잘 해결되시기 바랍니다.”
근데 그건 그냥 한 말이 아니라 정말 진심을 꾹꾹 눌러 담아 쓴 거였다. 나도 이사만 떠올리면 얼마 전 앓던 이를 뺐는데도 그 자리가 다시 아파오는 느낌이었다. 배우자 사망에 따른 스트레스 지수가 100이라면 이사 한번 하는데 겪는 스트레스 지수는 40이라는, 어느 책에서 본 문구도 떠올랐다.
나의 위로에 무장해제 되신 것인지 그분은 "저 어떡하죠. 정말 울고 싶네요. 정말 멘붕이에요. 저 어떡하죠"라고 계속 하소연을... 아, 나도 괜히 울고 싶은 마음. 그리고 며칠 후 그분에게서 다시 메시지가 왔다. “결국 짐은 창고 보관센터에 맡기고, 저는 친구 집에 신세를 지고 있어요. 이사 가기로 한 집에는 내용증명을 보내놓은 상황이에요. 그때 정신이 없어서 제대로 말씀을 못 드렸지만, 다시 한번 죄송하다는 말씀드립니다.”
얼굴 한번 보지 않은 사이인데 너무 죄송해하셔서 내가 다 송구할 지경이었다.ㅠㅠ 지금은 잘 해결돼서 더 좋은 스위트홈을 찾으셨을 것이라 믿는다.
나의 빨간 철제 서랍장을 가져간 아주머니도 떠오른다. 오랫동안 썼던 것이지만, 여전히 외관이 기스 하나 없이 깨끗한 서랍장을 3000원에 내놨다. 쓸만큼 쓴 것이니 나눔 해도 될 것 같았지만 3000원이라도 굳이 가격을 매긴 것은 상태가 좋은 만큼 업자들이 득달같이 달려들 것 같아서였다.
역시 올리자마자 메시지가 쏟아졌는데, 진짜로 필요로 하시는 것 같은 한 분과 거래 약속을 잡았다. 그러나 잘못된 선택이었나. 그분이 차량을 쓸 수 있는 시간이 불규칙하다면서 몇 번이나 약속을 미루더니, 급기야 죄송하다면서 다른 분께 드리라는 거다. 이제는 화도 안 나고, 이상하게 오기가 생겼다. 다른 사람과 다시 메시지 주고받고 약속 잡으면서 피곤해지느니, 그냥 그쪽이 가져갈 때까지 기다려주고 말리라!
그분은 언제까지고 기다려주겠다고 하니 조금 당황하신 듯했다. 그리고 마음에 큰 부담이 생기신 모양이었다. 며칠 후 택시로라도 가져가겠다고 연락이 왔다. 사정을 잘은 모르지만 운전하는 가족들이 엔간히 협조 안 해주는 모양이었다.
그렇게 겨우 확정한 약속 당일, 그분은 또 갑자기 일이 생겼다면서 내일 가도 되냐며 나를 기함시켰지만 우여곡절 끝에 결국 도킹에 성공했다. 메시지 주고받을 때부터 예상했던 대로 조금 나이가 있으신 아주머니셨다. 사실 나는 택시로 실어가겠다는 말을 들은 순간부터 이미 내 차로 집까지 날라줄 마음을 먹고 있었다. 요새 택시비가 얼만데. 그러면 3000원에 내놓은 의미가 없어지잖아. 비싸고 좋은 가구도 아닌데.
아주머니는 태워주겠다니까 깜짝 놀라신 듯했다. 동시에 택시로 실어가야 하는 큰 짐을 던 것에 무척 안심이 되신 것 같기도 했다. 나도 내가 좋아하는 일(운전)을 하면서 진심으로 고맙다는 인사를 받으니 기분이 좋아졌다. 왜냐하면 세상에는 나에게 고마워하는 사람이 거의 없으니까! 대신 아주머니께서 고맙다면서 3000원이 아닌 5000원을 주셨다. A4 크기 서류가 들어갈만한 크기의 서랍장을 찾고 있었는데, 너무 맞춤이라면서 잘 쓰겠다고 좋아하셨다. 어떤 서류를 넣으려고 하시는지는 모르겠지만, 그 서랍장에 보관하는 서류들이 모두 대박 결실을 맺는 기분 좋은 상상을 해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