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드 <하얀 거탑>
<하얀 거탑>은 한국에서도 리메이크된 일본 명작 드라마다. 일본에서 처음 방영된 게 2003년이니까, 어느덧 고전의 대열에 올라 버렸다.
20년 전 드라마지만 지금 봐도 전혀 올드한 느낌이 없다. 심지어 드라마에 나오는 구식 의료장비들도 크게 눈에 거슬리지 않는다. 오히려 ‘왜 지금은 이런 선 굵은 드라마가 나오지 않는 건가’라는 아쉬움만 커질 뿐.
드라마 자체에 대한 이야기는 이쯤 해두고, 내가 이 드라마에서 꼽은 명대사는 드라마 시작 후 10분도 채 지나지 않았을 때 나온다. 무거운 드라마를 크게 즐겨보지 않는 내가 이 드라마에 1회부터 홀딱 빠지게 된 것은 나를 매료시킨 이 대사의 힘이 크다.
드라마는 뛰어난 외과의사인 자이젠 부교수가 오사카부 지사인 츠라카와 코조가의 암 수술을 하는 에피소드로 시작한다. 현역 지사가 암에 걸린 사실을 공표하고 공개적으로 수술을 받으러 왔으니, 이 수술에 세간의 관심이 집중된 것은 당연한 일. 병원 로비에는 기자들이 쫙 깔리고, 병원장을 비롯한 주요 관계자들 모두 병원의 명예가 걸린 이 수술 진행상황을 실시간으로 지켜본다.
쉬운 수술이 아니었다. 무려, 식도 적출 수술이었다. 게다가 수술 도중 암세포가 대동맥까지 전이됐다는 사실까지 알게 된다. 주변 스태프들이 심장전문의를 빨리 불러와는 것 아니냐며 허둥댈 때 우리의 자이젠 교수는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침착하게 지시한다.
“츠쿠다, 이 각도에서 대동맥을 잡아.”
츠쿠다가 겸자로 대동맥 부위를 벌리자 자이젠 교수는 신속하게 대동맥을 처리한 후 봉합하기 시작한다.
하지만 츠쿠다는 오랜 수술 시간으로 인한 피로와 중압감 때문에 손이 조금씩 떨리기 시작했고, 그의 손이 미끄러져 겸자를 놓치는 순간 피가 분수처럼 치솟았다.
수술을 지켜보던 병원장은 탄식을 했고, 수술실은 잠시 패닉상태에 빠진다. 자이젠 교수는 민첩하게 상황을 수습한 후 그때까지 계속 넋을 잃고 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츠쿠다를 향해 소리친다.
“츠쿠다, 뭐 해. 어서 대동맥을 잡아. 혈관봉합이 끝날 때까지 꼼짝도 하지 말고 겸자를 잡아.”
아… 저 겸자는 꼭 츠쿠다만 잡아야 하는 것인가. 내가 츠쿠다를 못 미더워하는 것은 둘째 치고, 츠쿠다는 자기 스스로를 믿을 수 있을까. 비실비실 일어난 츠쿠다는 결국 다시 힘겹게 겸자를 집는다.
자이젠 교수는 벌벌 떠는 츠쿠다에게 서릿발같이 말한다.
자네가 실수하면 환자가 죽어
하지만 자네가 죽는 건 아냐
이 두 문장을 듣자마자 머리가 띠용 하는 기분이 들었다. 이 상황에서 이것보다 더 날카로운 채근이 있을 수 있을까. 동시에 이 상황에서 이것보다 더 따뜻한 위로가 있을 수 있을까.
실패를 두려워할수록 '최악'에 대한 상상은 꼬리에 꼬리를 물고 자가증식한다. 이럴 때 가장 필요한 조언은 어설픈 위로나 희망이 아니라, 냉정하게 알려주는 최악의 실체다. 내가 맞닥뜨릴 수 있는 최악의 한계를 정확히 인지하고 나면, 덜 두려워지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도 일이 버겁고 힘들 때마다, 주문을 외듯 스스로에게 속삭인다.
'꼭 잘해내자! 하지만, 못해내더라도 네가 죽는 건 아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