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사에서 마주칠 때마다 늘 "밥은 먹었어?"라고 묻는 선배가 있었다. 대화의 태반이 자기 하소연인데다 업무적으로 남을 배려하거나 양보하는 걸 본 적이 없는 지라 딱히 좋아하지 않는 선배였지만, 그 말을 들을 때마다 괜시리 마음 한 켠이 따뜻해짐을 느꼈다.
각자 자기 자신만이 제일 불쌍한 조직처럼 보였는데, 그래도 보기와 달리 다들 마음 한 구석에는 '밥은 먹고 다니냐'며 서로를 신경 써주는 따뜻한 진심 한 조각을 품고 있구나.
따뜻한 정에 굶주린 나는 그래서 그 말을 들을 때마다 진심을 다해 되물었다.
"네, 먹었어요. 선배도 드셨어요?"
하지만 오전 11시 30분 화장실에서 마주쳤을 때 처음으로 조금 이상하다고 느꼈다. 그는 그때도 여상히 물었다. "그래, 밥은 먹었고?"
음... 아침 먹었냐고 묻는 건가? 그런데 이제 곧 점심시간인데, 이제와 아침밥 먹었냐고 묻기에는 너무 쌩뚱맞은 거 아닌가?
그래도 물어봐주는 것이 어딘가 싶어서 살갑게 대답했다.
"네. 먹었어요. 선배도... 드..셨어요?"
그리고 오후 4시 탕비실에서 마주친 선배가 거울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자신의 화장을 체크하면서 "밥은 먹었어?"라고 물었을 때 나는 완전히 깨닫게 됐다.
아, 이 선배는 사실 내가 밥을 먹었는지 안 먹었는지 전혀 궁금하지 않은 거구나. 그럼 그렇지. 그런 사람이 아닌데, 어쩐지 이상하다 싶었어.
콩깍지를 벗고 보니 그 후부터 그 선배가 식사 체크 질문봇처럼 보였다. 어쩜 그리 밥 한 번 사주는 법도 없이 마주치는 모든 사람에게 시도 때도 없이 밥 먹었냐고 물어대는 건지. 엄살과 생색내기 대마왕인 그의 평상시 캐릭터와 오버랩되면서, 진짜로 널 신경 써주는 수고를 하고 싶지 않지만 좋은 선배인 척은 하고 싶으니 그냥 말뿐인 친절함으로 때우겠다는 것처럼 들렸다.
그런데 말이다. 누군가와 마주친 출근길 엘리베이터에서, 탕비실에서, 화장실에서 멀뚱히 나눈 목례를 끝으로 어색한 침묵이 흐를 때마다 어느 순간부터 그 영혼 없는 질문인 "밥은 먹었고?"가 때때로 아쉬워지기 시작한 것이다.
생각해 보니 그랬다. 말뿐인 친절함이 뭐 어디가 어떤가. 말 뿐이더라도 친절함은 친절함이다. 그것도 가성비가 가장 뛰어난 친절함. (혓바닥 운동 몇번만 하면 된다.)
말뿐인 친절함의 효용은 '무해함'이다. 물론 말만 번드르르하게 한 후 뒤통수를 치는 사람도 있지만, 이건 너무 대놓고 빈말이어서 뒤통수를 맞을 만큼 상대방을 무장해제 시키지도 않는다.
그냥 말 그대로 무해함인 것이다.
'나는 당신에게 아무런 적의가 없어요'
'대단한 건 아니지만 이 정도의 호의는 베풀고 싶네요'라는 시그널.
요새 나는 왜 그 선배처럼 그런 말 뿐인 친절함조차 베풀지 못하고 사는 건지 나 자신을 진지하게 되돌아보고 있는 중이다.
우리 모두 생각한 것의 절반만 말하고, 나머지 절반은 생각해 본 적 없는 입발린 말이라도 하며 살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