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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슬 Mar 12. 2018

오늘은 나의 작은 숲을 가꿔야지

영화 <리틀 포레스트>


<리틀 포레스트>를 보고 돌아와, 일주일 넘게 방치해놓은 설거지를 했다. 불닭볶음면을 먹은 냄비엔 빨간 기름이 물과 섞여 흉하게 떠있었고, 플라스틱 반찬 통에는 곰팡이의 육촌 동생쯤으로 보이는 놈이 희끗희끗 피어난 채였다. 썰고 끓이고 볶고 먹을 땐 탐스러워보였던 것들이 찌꺼기가 되어 물에 담가지는 순간, 그렇게 더러워보일 수가 없다. 



미성리의 부엌에는 그런 더러운 것들이 없다. 혜원은 밭에서, 나무에서 갓 따온 재료들로 보기도 좋고 맛도 좋은 음식들을 뚝딱 만들어낸다. 엄마의 손맛을 물려받았다 치더라도 아무나 할 수 있는 재주는 아니다. 서울에선 유통기한 지난 편의점 도시락을 먹었지만, 미성리에서는 정성들여 만든 음식으로 식사 시간을 만끽한다. 영화는 혜원이 밥을 먹은 직후를 보여주지 않는다. 분명 수저와 그릇들이 설거지 통에 잔뜩 쌓여있을텐데.(삼색떡을 만들 때는 '저 뒷처리를 어떻게 하려고 그러나', 내가 다 초조해졌더랬다.) 내가 벌려놓은 현장을 내 손으로 치워야 하는 징글징글한 생활의 섭리가 이 아름다운 집에서만큼은 예외다.


대신 그 어마어마한 설거지 더미는, 혜원의 마음 속에 쌓여있다. 자꾸만 떨어지는 시험과 본의 아니게 속을 뒤집어놓는 남자친구, 보란듯 잘 살고 싶었던 도시에서 내 자리가 없다는 걸 끊임없이 확인하게 될 때의 절망감. 대차게 엉켜버린 모든 것들을 끊지도 풀지도 못한 채 도망치듯 돌아왔다. 그러니까 문만 열면 눈부시게 아름다운 풍경이 펼쳐져도, 오랜 친구들과 웃고 떠들어도 마음 한 구석이 계속 찜찜하다. 


원래 설거지란 게 그렇다. 첫날엔 가벼운 마음으로 내일의 나에게 미루지만, 그 위에 새로운 식기들이 쌓이고, 일주일쯤 흘러 받아놓은 물 색깔이 탁해지면 진심으로 난감해진다. 처리하긴 싫지만 미친듯이 신경 쓰인다고! 안 보이는 척 며칠 더 시치미를 떼 봐도 소용 없다. 접근 금지 테이프라도 둘러야 할 것 같은 저 그릇 (시체) 더미를 비워낼 사람은 나밖에 없으니까. 게다가, 다시 밥을 먹기 위해선 언젠간 저 그릇과 수저를 씻어야만 한다.


1년 넘게 자연을 벗삼아 설거지를 미루던 혜원은 다시 서울로 떠난다. 그리고 다시 돌아온다. 아주 개운한 얼굴로. 방치해놓은 마음을 수세미로 빡빡 닦아낸 후, 뽀송뽀송 말린듯 한 표정이다. 9년차 도시인인 나는 정작 영화에 나오지 않은 장면이 궁금했다. 그토록 염원하던 도시에 안녕을 고하고 기차를 타는 기분은 어땠을까? 벼를 세우고 감을 말리던 그 사계절이, 커다랗게 버티고 앉아있던 패배감을 조금씩 조금씩 녹여 보내는 시간이 되어준 걸까?



요즘, 내가 꼭 설거지통에 둥둥 떠다니는 밥풀같이 느껴졌다. 설레는 마음으로 다듬고 썰고 볶았던 '나'라는 재료가 만들어놓고 보니 이맛도 저맛도 아닐 때의 실망감이란. 노지에서 갓 딴 사과처럼 붉고 예뻤던 사랑은 예전같은 빛깔이 아닌 것 같아 속상하고, 싱싱한 열정은 누구한테 줘버렸지? 개한테 줬나? 멍멍. 그릇에 달라붙은 찌꺼기처럼 간신히 버티고 있는 나를 발견할 때마다 훌쩍 떠나버리고 싶었다. 


하지만 나의 고향은 미성리처럼 운치있는 시골 마을이 아니고, 아기자기한 목조 주택 따위 보유하고 있을리 만무하다. 때 되면 쌀 한 가마니 던져주고 가는 친구와 반찬을 바리바리 싸주는 큰고모, 뭐든 쉽게 만들어내는 요리 재능도 없다. 대문도 없고 퍽 치면 부서질 것 같은 시골집의 문은 어찌나 공포스러운지. 그뿐인가. 지네와 굼벵이같은 애들이 튀어나올 때마다 까무러치게 비명을 지르겠지. (아주 천상 도시 사람이네.) 무엇보다 내 밥은 논밭이 아닌, 8시간 넘게 들여다보는 컴퓨터와 키보드에서 나온다. 


그러니 나는 떠나는 대신, 내 가장 가까이에 있는 숲부터 돌보기로 했다. 청소기를 돌리고, 이불을 점령한 고양이 털을 떼어내고, 오랜 시간 나를 괴롭혔던 거대한 설거지 거리를 해치웠다. 주말엔 마트에 가서 알록달록한 과일을 사와야지. 그럼 조금은 잘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 것 같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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