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마와 졸업식에 입을 정장을 사러 간 기억이 난다. 고등학교 졸업식에 왜들 정장을 입는지 모르겠지만, 뭐 그렇다고 하니 옷가게에 정장을 사러 갔다. 학교 다니며 입은 옷은 교복이고, 주말에 입은 옷이라곤 이곳저곳에서 산 티셔츠나 바지뿐이었으니 여성 정장을 파는 곳은 처음이었다.
옷을 고르는 일은 쉽고도 쉽지 않았다. 옷 사이즈가 다양하지 않아 고르는 옷 족족 내 사이즈가 없다고 했고, 결국은 고를 수 있는 옷이 몇 벌 없었다. 옷 가게 주인은 난감한 표정으로 '작은 사이즈 중에서 크게 나온 옷'을 짚어주기도 했다. 하고많은 옷들 중에서 선택지가 두세 개나 있었을까. 나와 엄마는 적당히 타협하는 선에서 옷을 사들고 나왔다. 어찌 됐든 옷을 샀다는 안도감과 마음에 드는 옷을 입지 못한다는 씁쓸함이 적당히 뒤섞인 쇼핑이었다.
77 사이즈. 어떻게 계산된 것인지 모르지만, 내 몸을 단숨에 표현하는 이 수치 덕에 나는 때로 수치만 부르고서 옷을 살 수도 있었지만, 단언컨대 옷을 못 사는 경우가 훨씬 많았다.
여성 기성복 사이즈는 55, 66 정도이다. 요즘은 워낙 마른 사람들이 많아서인지 44 사이즈도 나온다고 하던데. 그래 봤자 사이즈는 총 세 종류 정도뿐이다. 우리나라 여성들 몸이 딱 세 종류라니, 진짜? 이 이상의 사이즈를 필요로 하는 여성들은 없단 말인가? 우리나라 사람들의 체형은 점점 커지고 있다고 하던데? 여성의 체형은 그대로거나 작아지기만 할 뿐이라고?
나는 왜 77보다 44가 먼저 시장에 늘어나고 있는가를 생각해 본다. 옷가게에서는 옷을 팔아야 돈을 버니, 아 그럼 77의 인구보다 44의 인구가 많아서 잘 팔리니 돈이 되나 보다 한다. (물론, 아직은 그렇지 않다 해도 44의 존재는 44에 대한 선망을 만드는 데 일조하고, 여성들이 44를 목표로 하게 할 것이며, 미래에는 소비층이 생겨날 것이다.) 그렇담 77의 인구가 는다고 77이 옷가게에서 흔하게 찾을 수 있는 사이즈가 될까? 글쎄. 77 이상의 옷을 찾는 여성들이 많아졌는지 몇 년 사이 인터넷에는 '통통녀를 위한', '빅사이즈를 위한' 따위의 쇼핑몰들이 꽤 늘어났지만, 백화점이나 오프라인 옷가게에서는 여전히 77을 찾기 어렵다.
엄마는 항상 백화점이나 쇼핑몰에 같이 다니며 예쁜 옷을 사 주고 싶다곤 하셨다. 딸이 살을 좀 빼고 예뻐졌으면 하는 바람이 담긴 말이었겠으나, 난 결혼 후 점점 더 엄마의 바람을 배신하며 덩치를 키워 갔다. 부풀어 오르는 내 몸과 반대로 엄마의 바람은 바람 빠진 풍선처럼 점점 작아져 쭈글쭈글해졌을 것이다. 이제는 엄마도 휴대폰으로 카카오스토리나 네이버 스토어를 전전하다 조금 큰 사이즈가 보이면 링크를 보내신다. 물론 그 옷들이 내 맘에 썩 들 리 없어 주문으로 이어지지는 않지만, 엄마는 딸에게 예쁜 옷을 사주고픈 마음을 이렇게나마 위로하시나 보다 싶다.
나는 언제쯤 길을 걷다가 '우연히 본 옷이 예뻐서' 옷을 살 수 있을까. 엄마가 내 옷을 옷가게에서 골라 사 주며 기쁨을 느끼는 날이 올까? 66 사이즈가 될 때까지 내 살을 깎아내야 가능한 것이라면 이 생에 불가능하겠구나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