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브런치북 엽편2 20화

갑을고시원 체류기 _ 박민규

by 빈자루

정말 좋아하는 작가님입니다. 처음 작가님 글을 읽었을 때, 이렇게 재미있게 소설을 쓰는 사람도 있구나, 하고 감탄했었습니다. 많은 지망생분들이 박민규 작가님의 문장과 띄어쓰기, 줄 바꿈을 따라 하다가 망길로 들어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ㅋ. 박민규 작가님의 <갑을고시원 체류기>입니다.









그 특이한 이름의 고시원이 아직도 그곳에 있는지는 알 수 없다.


물론 여타의 세상일들이 그러하듯이 있을 수도 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지만,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설령 사라졌다 한들, 또 그것이 누구의 탓도 아니니까. 십 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이래저래, 죽은 사람도 있고 죽은 고시원도 있는 거겠지.


살다 보면, 말이다.


이제는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인 그 고시원의 밀실이 생각난 것은 <몸에서 사람의 귀가 자라는 쥐>의 뉴스 보도를 보고 있을 때였다. 이유는 알 수 없다. <몸에서 사람의 귀가 자라는 쥐>를 보고 있는데 그냥 그 고시원의 모든 것이 한꺼번에 떠오른 것이다. 마치 쥐의 몸에서 자라난 사람의 귀처럼. 엉뚱하게, 쑥쑥.


그 귓속의 달팽이관 속의 달팽이처럼, 나는 잠시 고요한 감회에 젖어들었다. 그랬다. 나는 분명 쥐의 몸에서 자라난 사람 귓속의 달팽이관 속의 달팽이처럼, 그 고시원의 복도 끝 방에서 살았던 적이 있다. 아주 오래전의 일이지만, 분명한 사실이다. 만약 당신이 그런 고시원에서 살아본 적이 없다면, 부디 <달팽이관 속엔 달팽이가 없어>라는 식의 힐난은 삼가주기 바란다. 장담컨대, 세상의 일은 아무도 알 수 없다.


잘 둘러보면


그런 고시원의 복도 끝 방에 인간이 사는 것처럼, 그런 귓속의 달팽이관 속에 달팽이가 살 수도 있는 것이다. 다를 바 없는 얘기다. 그러니까 이것은- 그런 귓속의 달팽이관 같은 고시원의 복도 끝 방에 살았던 인간의 이야기이다. 이미 십 년도 전의 일이지만 그 고시원의 유전자는 분명 나의 몸속에 이식되어 있다. 어쩌면 내 등뒤에는 이미 커다란 <고시원의 귀>가 자라 있을지도 모른다. 설령 그렇다 해도, 그것 역시 누구의 탓도 아니란 생각이다. 귀가 자라는 사이에도, 죽은 사람이 있고 죽은 쥐가 있고 죽은 달팽이가 있듯이. 즉


살다 보면, 말이다.





죽은 고시원 -> 몸에서 사람의 귀가 자라는 쥐 -> 그 귓속의 달팽이관 속의 달팽이 -> 그런 귓속의 달팽이관 같은 고시원의 복도 끝 방에 살았던 인간 -> 고시원의 귀 -> 귀가 자라는 사이에 죽은 사람과 죽은 쥐와 죽은 달팽이.

언어유희로는 정말 최고가 아닐까 합니다. 박민규 작가님은 앞에 썼던 이미지를 뒤에 가져다 다시 쓰는데 어느 순간 고시원의 이미지가 뚜렷하게 떠오릅니다. 중첩을 통해 이미지가 강화됩니다.


앞 문장을 끝내지 않고 행 뛰기를 거침없이 합니다. 행을 뛴 문장은 반복되고 읽는 사람에게 운율감을 줍니다. 마치 쥐의 몸에서 자라난 사람 귓속의 달팽이관 속의 달팽이처럼요. 박민규 작가님은 시를 좋아하신다고 들었습니다.





1991년의 봄에는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다.


살다 보면 여러 종류의 봄을 맞이하기도 하겠지만, 정말이지 그런 봄은 처음이었다. 우선 봄이 오기 전 겨울에 아버지의 사업이 부도를 맞았다. 집안 곳곳에 차압딱지가 붙고, 빚쟁이들이 들이닥쳤다. 막대한 규모의 사기성 부도에다 지독한 사기를 친 주인공은 아버지의 친동생이었다. 물론 삼촌이란 얘기지만, 그런 인간을 삼촌이라 부를 수는 없는 거겠지. 집은 사라지고 가족들은 흩어졌다. 부모님은 시골을, 형은 막노동판을, 나는 나대로 친구의 집을 전전하게 되었다. 한순간의 일이었다.


그리고 봄이 왔다.


봄이 되자 나의 기숙도 한계에 이르기 시작했다. 어느 날 친구의 가족들과 아침을 먹으려는데 유독 나만 계란후라이가 빠져 있었다. 여긴 계란이 없네? 친구가 묻자 친구의 어머니가 대답했다. 글쎄, 계란이 떨어졌지 뭐니. 별 생각 없이 잘 먹고, 잘 먹었습니다 인사를 하고 일어서는데 냉장고 위에 얹혀 있는 두 판의 계란이 눈에 들어왔다. 등뒤에서, 친구의 여동생이 수저를 내려놓는 소리가 여느 때보다도 크게 들렸다.


방으로 돌아온 나는 곧 짐을 싸겠노라고 친구에게 얘기했다. 왜? 영문을 몰라 하는 친구에게 갈 곳이 있다고 얘기는 했지만, 실은 눈과 입을 봉한 채 그 집의 기둥이나 문짝이라도 되고 싶은 심정이었다. 일층과 이층 도합 세 대의 에어컨과 청동 보일러가 설치된 집이었다. 나는 우선 형을 찾아갔다. 미안해, 이게 전부야. 컨테이너 숙소 앞에서 자초지종을 들은 형이 말없이 30만 원을 챙겨주었다. 숙소의 주변에는 개나리가 한창이었다.




아버지 사업이 부도를 맞으며 친구의 집에 몸을 의탁하던 주인공은 친구의 집을 나와 고시원으로 들어가게 됩니다.




고시원? 여긴 고시공부 하는 데잖아? 차에서 내린 친구는 어이가 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나 역시 걱정이 들긴 마찬가지였으나, 내심 고시생이라 우기면 되겠지 정도의 얄팍한 계산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미처 몰랐던 중요한 한 가지 사실은 - 이미 그 무렵부터 세상의 고시원들이 여인숙 대용역할을 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즉


걱정도 팔자였던 것이다. 변화의 이유는 알 수 없다. 아무튼 1991년은 -일용직 노무자들이나 유흥업소의 종업원들이 갓 고시원을 숙소로 쓰기 시작한 무렵이자, 그런 고시원에서 아직도 고시공부를 하는 사람이 남아 있던 마지막 시기였다. 그러니까 그곳을 찾는 사람에게도, 또 <고시원>으로서도 조금은 쑥스럽고 애매한 시기였던 셈이다. 어쨌거나


그런 사실을 알리 없는 우리는 조심조심 계단을 올라갔다.





다음 문장이 궁금해지는 순간에 접속부사를 남기고 바로 행 뛰기를 하면서 문단과 문단의 연결이 더욱 긴밀해집니다. 독자 입장에서 다음 문단으로 바로 몰입할 수 있습니다. 쉽게 따라 할 수 있을 것 같지만 쉽지 않은 수법입니다.





실내정숙


현관에 올라서니 우선 큰 글씨의 현판이 사람을 압도했다. 누구나 쓸 수 있는 붓글씨의, 누구도 걸지 않을 촌스런 액자였다. 그리고 그 현판의 아래에 쥐구멍 같은 유리창의 작은 카운터가 보였다. 주인은 오십 대의 아줌마였다. 아, 전화 주셨던 분? 네. 최대한 정숙한 목소리로, 나는 대답했다.


우리는 곧장 방으로 안내되었다. 터무니없이 길고, 좁고, 어두운 -폭이 40센티가 될까 말까 한 복도였다. 때문에 기차놀이라도 하듯, 저절로 우리는 일렬이 되었다. 정숙하게, 기차는 터널 속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터널의 한복판에서 누군가 문을 열고 튀어나왔다. 충돌이다! 외쳐도 좋을 만큼 절묘한 타이밍이었는데 그가 잽싸게 몸을 틀어 벽에 자신을 밀착시켰다. 놀라우리만치 빠르고 숙달된 동작이었다. 게다가 정숙했다. 이럴 수가! 역시 같은 동작으로 그 곁을 통과하는 기차의 선두를 따라, 우리도 몸을 돌려 그 곁을 빠져나왔다. 나는 침을 삼켰고, 어느새 두 발꿈치를 들고 있었다. 방은 복도의 맨 끝에 있었다.





실내정숙과 고시원 복도, 기차놀이를 엮어놓은 것이 익살스럽습니다.





그럼 짐을 옮기겠습니다.


뭐랄까, 의외로 담담한 마음으로 나는 그렇게 얘기했다. 첫 달 치 방세를 건네고, 장부에 신상을 기재하고, 키를 넘겨받던 그 순간 -나는 갑자기 어른이 된 느낌이었고, 왠지 이 세계에 대해 조금은 알게 되었다는 기분이, 들었다. 멸망한 집에서 쉬쉬하며 그것들을 빼돌릴 때처럼, 나는 말없이 한 대의 컴퓨터와 다섯 개의 가방을 방으로 나르기 시작했다. 복도와 거의 폭이 일치하는 모니터를 나르며 친구는 이렇게 속삭였다.


여기서 사람이 살 수 있을까?


왠지 생각에 잠겨보지도 않은 채 덜컥 이런 곳에서 산다는 것은, 인간의 도리가 아니라는 말투였다. 듣는 사람에 따라, 또 새겨듣기에 따라 화가 나거나 서운하거나 서러움이 복받치기에 추운하 말이었다. 그런데 그 말을 듣는 순간, 나는 전혀 예상치 못한 뜻밖의 감정에 사로잡혔다. 이상한 일이었다. 나는 화가 나거가 서운하거나 서럽지 않고, 대신


외로웠다.


이사는 그렇게 끝이 났다. 문을 잠근 나는 다시 건물의 아래로 내려가 친구를 배웅했다. 정말 괜찮은 거니? 길고 긴 담배 연기를 내뱉으며 친구가 물었다. 왠지 이곳에서 황달이라도 걸린 듯한, 노래진 표정이었다. 괜찮아. 나는 대답했다. 친구는 잠시 하늘을 응시하더니 말없이 차의 시동을 걸었다. 고마웠어. 잘 가. 끄덕.


언덕을 내려선 빨간색 스포츠카의 후미가 사라지자, 어디선가 완연한 봄바람이 불어왔다. 나는 다시 한 대의 담배를 더 피워물었다. 세상은 정숙했고, 진입로의 입구에서는 몇 그루의 벚꽃나무가 여전히 흔들리고 있었다. 그러니까 - 별일 아닌 듯해도 여러 가지 일들이 있었던 1991년의 봄이었다. 돌이켜보면 왜 그렇게


화창한 봄이었을까.





앞에 사용했던 봄과 정숙을 다시 사용합니다. 봄과 정숙의 이미지가 주인공의 심리를 드러냅니다.





첫날밤 내 방문을 두드린 사람은 김검사였다.


컴퓨터가 문제였는데 모니터를 놓으면 의자를 올릴 수 없고, 즉 누울 수 없다는 결론이 나왔던 것이다. 그러나 선택의 여지가 없는 공간이어서 금세 해답을 찾을 수 있었다. 나는 다리를 펴지 않기로, 했다. 결심을 하고 보니 과연 새우잠이 건강에도 좋다는 얘기를 어디선가 들은 듯도 했다. 그럴 수도


있겠지. 스스로를 위로하고 보니 어느새 밤이었다. 그 첫날밤은 아직도 생생하다. 예수가 다시 태어나도 좋을 만큼 고요한 밤이었고, 너무나 검소하고 청빈해서 거룩한 밤이었다. 잠이 오지 않은 나는 조용히 가방을 뒤졌고, 세번째 가방의 옆구리에서 워크맨을 찾아냈다. 그런데 이어폰이 보이지 않았다. 결국 숨을 죽이며 주파수를 맞춘 다음, 들릴락 말락 최저의 볼륨으로 음악을 듣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얼마나 최저의 볼륨이었나 하면 -가사는 전혀 알아들을 수 없고, 그저 음악이 나오는구나 정도를 알 수 있는 <쟁쟁쟁쟁>의 연속이었다. 이상하게도 그 쟁쟁쟁쟁을 듣고 있으니 왈칵 눈물이 났다. 제목을 알 수 없는 그 쟁쟁쟁쟁은 그 정도의 명곡이었던 것이다.


똑똑


노크소리가 나기 직전에 옆방의 문이 열리는 소리를 들었으므로, 나는 노크의 주인공이 옆방 사람이란 걸 쉽게 알 수 있었다. 인사라도 하고 지낼까 라는 생각으로 문을 열자 인사를 도저히 할 수 없는 화난 얼굴이 문밖에 서 있었다. 남자로선 작은 키, 땅땅한 체구, 나보다 열 살 정도는 많아 보이는 짧은 머리의 남자가 두 손을 허리춤에 얹은 채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금테안경 속의 작은 눈은 충혈되어 있었다.


조용히 해.


단 한마디만을 내뱉은 후 남자는 자신의 방으로 들어갔다. 나는 조용히 문을 닫은 후, 뭔가 큰 잘못을 저질렀다는 생각에 불을 끄고, 몸을 웅크린 후, 잠을 잤다. 물론 잠이 올리 없었지만 잠을 자야 한다고 열심히 생각했다. 나는 노력했다.




고시생 김검사와의 불편한 동거가 시작됩니다.





주의를 기울여보면, 인간의 몸에선 참으로 여러가지의 소리가 난다. 한마디로, 인간은 꽤나 시끄러운 동물이다. 김검사의 성격은 그야말로 예민한 편이어서 내가, 아니 나의 몸이 아주 작은 소리를 내기만 해도 불쾌한 기색을 여지없이 드러내고는 했다. 예를 들어 끄응, 이라든가 아니면 벽을 딱, 하고 때린다거나. 그럴 때마다 나는 깜짝, 이 또한 여지없이 접촉이 나쁜 형광등처럼 불안한 파장으로 몸을 떨고는 했다.


결국 나는 소리가 나지 않는 인간이 되었다. 어느 순간인가 저절로 그런 능력이 몸에 배게 된 것이다. 발뒤꿈치를 들고 걷는 게 생활화되었고, 코를 푸는 게 아니라 눌러서 조용히 짜는 습관이 생겼으며, 가스를 배출할 땐 옆으로 돌아누운 다음 - 손으로 둔부의 한쪽을 힘껏 잡아당겨, 거의 소리를 내지 않는 기술을 터득하게 되었다.


피... 쉬...


온순한 한 마리의 열대어와 같은 가스를 -아무도 없는 좁은 방에서 -엉덩이 한쪽을 최대한 잡아당긴 채 -조심조심 방류하다보면 -나는 늘 가족들이 보고 싶거나, 아니면 머릿속에 <그리운 금강산>같은 노래를 조용히 떠올리고는 했다. 이유는 알 수 없다. 하여간에, <그리운 금강산>이다.


누구의 주제런가 맑고 고운 산

그리운 만이천 봉

말은 없어도 이제야 자유만만

옷깃 여미며

그 이름 다시 부를 우리 금강산

수수만년 아름다운 산

더럽힌 지 몇 해 오늘에야 찾을 날 왔나

금강산은 부른다


그 한 달이 가장 힘들고 외로웠던 시기였다. 계절이 봄이란 이유로 히터를 전혀 가동하지 않았으므로, 실제 방안의 체감온도는 몹시도 추운 편이었다. 그리고 나는 늘 혼자였다. 그 좁고, 외롭고, 정숙하고, 정숙해야만 하는 방안에서 -나는 웅크리고, 견디고, 참고, 침묵했고, 그러던 어느 날


인간은 결국 혼자라는 사실과, 이 세상은 혼자만 사는 게 아니란 사실을 -동시에, 뼈저리게 느끼게 되었다. 모순 같은 말이지만 지금도 나는 그렇게 믿고 있다. 즉, 어쩌면 인간은 -혼자서 세상을 사는 게 아니기 때문에, 혼자인 게 아닐까.




방귀를 뀌는 장면이 인상적이어서 옮겼습니다. 익살스러워요.




의외로 씩씩한 것은 여자들이었다. 세면장 겸 화장실에서 마주쳐도 여자들은 당당했고, 자신의 볼일을 척척 다 보고, 서로의 방을 오가며 소곤소곤 환담을 나누기도 하고, 함께 장을 보러 가는가 하면, 그 좁은 옥탑방에서 몇몇이 어울려 즐겁게 식사를 하고, 웃기까지 하는 것이었다. 아니, 웃었다! 옥상에 나와 담배를 피던 나는 하마터면 소리를 지를 뻔했다. 그곳에서 <웃는다>는 것은, 그만큼이나 희귀한 일이었다.


업소의 여급임이 분명할 그녀들의 웃음소리를 들으며, 나는 그래도 이 세상을 유지하고 있는 건 여자들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다. 건강한 것은 여자들이다. 과연 남자들만의 세상이란 -생각만 해도 부끄러운 것이었다. 서로가, 서로의 낯을 쳐다볼 수 없을 만큼이나, 말이다. 쟁쟁쟁쟁 매매들이 목놓아 우는 소리가 또다시 들려왔다.


이곳에서 자신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남자는 오직 김검사뿐이었다. 그는 언제나 당당했고, 누구 앞에서나 꼿꼿했으며, 무엇을 해도 늘 열심이었다. 새벽 여섯시와 밤 아홉시엔 어김없이 옥상에 올라와 맨손체조를 했고, 밥을 먹을 시간이 되면 식탁에 누가 있더라도 당당히 자신의 반찬을 늘어놓았다. 그것은 뭐랄까, 보는 사람이 민망할 정도의 당당함이었다.


예컨대 체조를 해도 -여자들이 있는데 -허리를 한껏 젖히며 골반을 내민다거나, 한쪽 다리를 쫙 벌려 엉덩이를 들썩이는 동작을 그렇게 열심히 하는 것이다. 아마 나라면, 숨쉬기운동도 제대로 못할 것이다. 또 세수를 해도 -물론 누가 있더라도 -푸파푸파 엄청난 소리를 내며 얼굴과 목이 뻘겋게 될 정도로 빡빡 문지른 후, 킁 하고 크게 코를 풀어 그 덩어리를 탁 떨치는 것으로 늘 마무리를 하고는 했다. 아마 나라면


말을 말자.




몇 가지 에피소드를 통해 김검사라는 인물이 생생하게 그려집니다.





...딱 한번 아르바이트를 하던 호프에서 그를 만난 적이 있었다. 인사를 하던 나도 놀랐고, 인사를 받던 그도 상당히 얼굴을 붉혔다. 잘은 몰라도, 뭔가 흐트러진 모습을 남에게 들켰다는 표정이었다. 오백 한 잔! 안주도 없이 혼자 처량하게 술을 마시길래, 나는 주방장 형에게 부탁을 해 오징어를 내다 주었다. 마침 손님도 주인도 없던 터였다. 뭐냐?


서비스예요.


대수롭잖다는 표정으로 그는 고개를 까딱했다. 이를 핑계로 맞은편 자리에 앉은 나는 오징어의 다리를 뜯으며 이런저런 얘기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물론 이유가 있어서였다. 우선 집안의 몰락에 대해 자세한 설명을 한 후, 그래서 형이나 내가 취직을 해도 월급을 몽땅 차압당한다고 들었다. <과연 법적으로> 아버지의 빚을 우리가 갚아야 하는 것인가. <과연 법적으로> 그런 의무가 있는 것인가. 그래도 생활은 할 수 있어야 할 것 아닌가. <과연 법적으로> 죽을 때까지 빚을 갚아야 하는가 -등의 평소 억울하고 답답했던 의문점들을 낱낱이 고해바쳤다. 뚱하니 나의 하소연을 듣고 있던 그의 대답은 너무나 짧고, 간단했다.


돈을 빌렸으면 갚아야지.


언덕을 향해 올라가던 똥돼지의 뒤통수가 사라지자, 어디선가 후끈한 바람이 불어왔다. 하필이면 에어컨의 통풍구 곁에서 나는 담배를 물고 서 있었다. 세상은 여전히 정숙했고, 저 멀리 진입로 쪽의 벚꽃나무들은 미동도 하지 않은 채 서 있었다. 그러니까 -그가 바로 첫날밤 내 방문을 두드렸던 김검사였다. 정말이지


말을 말자.





돈을 빌렸으면 갚아야지. 이 부분이 저는 재미있어요. 왜 인지는 모르겠어요. ㅋ





인간은 누구가 밀실에서 살아간다. 이하동문이다.


라는 낙서를 화장실 벽에서 발견한 것은 아마도 추석 무렵이었을 것이다. 눈에 잘 띄지 않는 구석 모퉁이에 깨알 같은 글씨로 적혀 있었고, 이미 희미해진 -아주 오래 전의 낙서였다. <인간은 누구나 밀실에서 살아간다>는 검은 볼펜으로, <이하동문이다>는 그 후 누군가가 푸른색 사인펜으로 답글을 단 것이었다. 나 역시


이하동문이다.


낙서의 주인공은 이곳에서 꽤나 많은 사색을 한 듯했다. 또 다른 모퉁이에는 <인생을 사는 것이 고시를 패스하는 것보다 힘들다>란 글귀가 같은 필체, 여전한 크기로 적혀 있었으며 역시나 거의 지워질 정도의 오래된 낙서였다.


그럴 수도.


라고 나는 생각했다. 무렵의 나는 여러 가지로 지쳐 있었다. 장학금을 받아내긴 했으나 과중한 아르바이트와 <정숙>의 스트레스가 알게 모르게 심신을 지치게 했다. 늘 이런 곳에서 잠을 자야 하다니, 이건 마치 닭이 아닌가. 아침에 눈을 뜨면 그런 생각이 들고는 했다. 그 작은 방 안에선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말 그대로 잠만 잘 뿐이다.


상체와 하체를 동시에 움직이는 행동이 거의 불가능하기 때문에, 나중엔 결국 움직임 자체가 거의 없어지게 된다. 다리를 뻗을 수 없으니 늘 어딘가가 뭉쳐 있는 느낌이고, 몸은 점점 나무처럼 딱딱해져 간다. 마치 가구 같다. 아닌 게 아니라, 늘 그 자리에 붙박이인 오래된 가구처럼 말이다.


1센티 두께의 베니어로 나뉜 칸칸마다 빼곡히 남자나 여자들이 들어차 있다. 그 속에서 다들 소리를 죽여가며 방귀를 뀌고, 잠을 자고, 생각을 하고, 자위를 한다. 살아간다. 생각할수록 그것은 하나의 장관이다. 뭔가 통해 있고, 비릿하고, 술렁이는 느낌이다. 어쩌면 이것은 세포막이 아닐까? 베니어의 벽에 손을 얹은 채, 나는 상념에 잠기고는 했다. 문은 늘 잠겨 있고, 창문은 없다. 그저 질식을 하지 않는 것이 신기할 따름이다. 나의 폐는 이미 퇴화된 게 아닐까? 어느새 나는, 아가미 호흡과 같은 것을 하고 있는 게 아닐까? 겨드랑이 아래의 흉곽을 짚어보며 나는 생각했다. 그러고 보니


기포와 같은 것이


방 속을 두둥 떠다니는 것을 본 듯한 기분도 들었다. 그것은 무엇이었을까. 어쩔 수 없이 -온순한 열대어처럼 항문을 빠져나와야 했던 억눌린 가스의 덩어리였을까. 아니면 가구로 변해버린 육신을 잠시나마 이탈해 있던 나의 지치고 고단한 영혼이었을까.





앞에 사용했던 가구나, 열대어 같은 단어들을 재사용합니다.





...<386 DX-Ⅱ>. 당시로선 어딜 내놔도 빠지지 않는 고급 기종의 컴퓨터였다. 그리고 그것은


이 험난한 세상에서 가진 나의 전 재산이었다. 이마저 없어진다면 -나는 그야말로 빈털터리란 생각이 들었으므로, 결국 어떤 일이 있어도 나는 나의 밀실로 돌아오곤 했었다. 누구나 자신의 전 재산이 자신의 전부라 믿기 마련이다. 나 역시, 그랬다는 생각이다.


하루는 군 입대를 앞둔 동기의 송별회가 있어 꽤 늦은 밤까지 술을 마시게 되었다. 다들 밤을 새자는 분위기였지만, 결국엔 컴퓨터가 떠올랐다. 나는 말없이 술자리를 빠져나왔다. 자정의 언덕길은 어둡고, 쌀쌀하고, 고요했다. 이미 몸에 밴 <우아한 걸음걸이>로 건물 앞에 이르렀는데, 야산의 진입로 근처에서 누군가 흐느끼는 소리가 들려왔다. 술기운 탓이었을까. 나도 몰래 소리가 나는 쪽으로 다가서세 되었다. 전구를 교체할 시기를 훨씬 넘긴 가로등 아래에서, 확실히 어떤 남자가 소리를 죽여 흐느끼고 있었다.


김검사였다.


깜짝 놀란 나는 건물의 벽 뒤로 몸을 숨겼다. 자세히 보니 그곳에는 김검사만 있는 것이 아니었다. 나무를 등진 채 서 있는 묘령의 여자가 보였고, 김검사는 그 앞에서 울고 있었다. 처음 보는 여자였다. 여자는 냉랭했고, 김검사는 계속 뭔가를 하소연하고 있었다. 여자는 끝까지 냉랭한 표정을 유지하더니 결국 김검사의 손길을 뿌리치며 언덕 아래로 내려갔다. 놀란 나는 다급히 방을 올라왔다.


쿵.


들어와 누운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옆방의 분이 큰 소리로 울렸다. 평소와는 확실히 다른 소리였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도대체 김검사에겐 어떤 사연이 있는 걸까. 그 여자는 누구였을까. 궁금한 가운데 새벽의 정적 속에서 <쟁쟁쟁쟁> 뭔가 아주 작은 소리로 계속해서 훌쩍이는 소리가 -삼투압에 의해, 베니어 세포막을 넘어 -내 방까지 스며들었다. 그것은 마치, 멀리서 들려오는 슬픈 벌레의 울음 같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벌레의 울음이 심한 부스럭거림으로 대체되었다. 마치 무언가를 급하게 찾는 느낌이었다. 인생에 반드시 필요한 그 무엇 -어쩌면 그녀의 사진이 아닐까. 혹은 최초로 받았던 그녀의 러브레터? 도무지 잠을 이룰 수 없는 밤이었다. 그 부스럭거림은 점점 더 신경질적이 되어갔다. 오늘은 정말이지 조심해야겠다, 라고 나는 생각했다.


큰일이다.


그때 어떤 거대한 기운이 뱃속에서 폭발하는 느낌이었다. 한순간의 일이었다. 그것은 분명 메탄이 아니라 LPG였고, 아무리 엉덩이를 잡아당긴다 해도 수습할 성질의 것이 아니었다. 더불어 진짜 큰 문제는 움직일 수가 없다는 것이었다. 움직이기만 해도 -결코 온순한 열대어가 아닌, 한 마리의 백상어가 입을 벌린 채 튀어나올 것만 같았다.


술자리의 과식을 탓하며 나는 조심스럽게 엉덩이를 잡아당겼다. 최대한, 그리고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을 다해 화가 난 백상어를 달래고 또 달래었다. 결국 튀어나온 것은 한 마리의 참치였다. 그나마 성공이라고 생각했지만, 문제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뭐랄까, 백상어가 작아져서 참치가 된 것이 아니라 -한 마리의 백상어가 여러 마리의 참치로 쪼개진 느낌이었기 때문이다. 여러 마리의 참치는 결코 만만한 것이 아니었다.


아, 씨.


분명 그런 소리가 옆방에서 들려왔다. 낮은 소리였지만 분명한 불쾌감과 초조함이 그 속에는 녹아 있었다. 두 번째 참치가 튀어나왔을 때는 예의 부스럭거림과 아, 씨가 나란히 최고조를 이루었다. 나는 두려웠다. 그래서 오늘은 정말이지...라고 결심하는데 그만 세 번째 참치가 순전히 자신만의 의지로 튀어나왔다. 맙소사 비록 의도가 아니긴 했어도, 그 크기가 거의 <노인의 바다> 수준이 아닌가. 후회를 했으나 이미 때는 늦었다. 벌컥 옆방의 문이 열리는 소리를 나는 들었고, 곧이어 연결된 네 번의 노크 소리를 나는 들었다. 이건 마치 <운명>이 아닌가. 이젠 죽었다, 라는 생각으로 문을 열자 -다름 아닌 김검사가 작은 눈을 부릅뜨고 서 있었다. 상기된 얼굴로 그가 말했다.


휴지를... 좀 얻을 수 있을까?


휴지를 말아쥔 채 복도를 빠져나가는 김검사를 바라보면서 -나는 웃음이 나오거나, 슬프거나, 어떤 비애를 느끼기보다는 -외로웠다. 어둠 속에서 화장실의 문이 급하게 개폐되는 소리가 들렸고, <쟁쟁쟁쟁> 뭔가 아주 작은 소리의 음악 같은 것이 -삼투압에 의해, 화장실의 세포막을 넘어 -내 귀까지 스며들었다. 문을 닫았다. 네 번째 참치는 이미 뱃속에서 한 통의 통조림이 되어버린 지 오래였다. 참치도 인간도, 결국은 밀실에서 살아간다. 그런 낙서라도 하고 싶은 심정이었다. 그런 일이 있은 지 얼마 후


형이 죽었다.


사고였다. 잘못된 전기공사에 의한 감전, 추락사였다. 칠 층의 높이에서 하늘을 날았던 형은, 화장이 끝난 후 한 줌의 가루가 되어 납골당에 안치되었다. 형의 마지막 거처는 마치 <갑을고시원>의 일부인 듯, 작고 어두운 방이었다. 통조리 속에 보관된 참치처럼, 형은 그 작고 어두운 방 속으로 들어갔다. 참치도 인간도, 결국은 밀실에서 죽어간다.


그 후 겨울이 왔을 때, 나는 북극곰만큼이나 말이 없는 인간이 되어 있었다. 김검사는 그해의 고시에서 낙방을 했고, 한 아가씨는 취객에게 폭행을 당해 코뼈가 부러졌으며, 주인아줌마는 은행 바로 앞에서 오토바이 날치기를 당했고, 나머지 사람들은 여전히 스스로를 부끄러워하며 눈을 마주치려 하지 않았다. 그 겨울의 어느 날, 고시원 ㅡ히터가 고장을 일으켰다. 수리를 위해 - 또 각 방의 통풍구를 점검한다는 이유로 삼십 분가량 모두가 방을 비워야 했다. 담배나 필까 싶어 옥상으로 올라가니,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곳에 몰려 있었다. 더러는 잡담을, 더러는 담배를, 더러 언 손을 부비며 먼 하늘을 쳐다보기도 하는 사람들을 쳐다보며 -나는 문득


누구에게나 인생은 하나의 고시와 같은 것이 아닐까.


라는 생각을, 했다...




고시원에 절도 사건이 발생하면서 <386 DX-Ⅱ>를 잃어버릴까 주인공은 고시원으로 돌아옵니다. 돌아오는 길에 김검사가 연인과 이별하는 장면을 우연히 목격합니다. 방귀를 참치와 백상어, 통조림으로 비유하는 표현이 재미있습니다. 김검사의 다면적인 모습을 보여주고, 형이 죽는 커다란 사건을 갑작스레 짧은 문장으로 꺼냅니다. 이어 겨울 고시원 옥상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광경이 펼쳐집니다.







그 특이한 이름의 고시원이 아직도 그곳에 있었으면 좋겠다.


세월이 흘렀다. 그 후 나는 그곳에서 일 년 반을 더 살았다. 도합 이년 육 개월이란 세월을 그곳에서 보낸 것이다. 그런 곳에서 이 년 육 개월을 살다니, 거짓말 같은 얘기가 아닐 수 없다. 그리고 십 년이란 세월이 지나갔다. 이래저래 죽은 사람도, 죽은 고시원도 있겠지만 -나는 살아남았다. 살다 보니, 말이다.


김검사는 다음 해의 고시에서도 낙방을 했다. 그리고, 그다음은 알 수 없다. 언젠가 시골에서 그의 부모님들이 올라왔고, 마지막 고시생은 울면서 짐을 쌌다는 얘기를 전해 들었다. 즉, 전해 들었을 뿐이다. 늦은 밤 돌아오니 그의 방은 텅 비어 있었다.


코가 무너졌던 아가씨는 수술로 코를 일으켜 세웠다. 아마도 다음 해의 여름방학 때였을 것이다. 나는 그녀의 소개로 그쪽 업소의 웨이터 일을 하기도 했는데, 생각보다 수입이 좋았다. 넉 달 남짓 나는 그곳에서 일을 했고, 어느 날인가 몹시 취한 상태에서 그녀와 자게 되었다. 그것이 나의 첫 경험이었다. 인생은 참으로 이상한 것이다.


절도사건은 엉뚱한 곳에서 실마리가 풀렸다. 범인은 건물 이층의 속셈학원 원장이었고, 마찬가지로 건물 일층 중국집의 간이금고에 손을 대다가 덜미를 잡혔다. 경찰에서 그는 순순히 범행을 시인했고, 돈이 목적이 아니었다는 둥 실은 그 여자를 사랭했다는 둥 전혀 속셈을 알 수 없는 말들을 늘어놓았다고 -했다. 물론 합의를 빌미로 세 배의 돈을 뜯어냈다는 그 여급이, 살 만하다는 표정으로 떠든 말이었다.


<386 DX-Ⅱ>에 대해서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말이 필요 없다는 생각도 들고, 아주 많은 말이 필요하다는 생각도 든다. 그것은, 저절로 버려졌다. 언제 어느 때였는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 삶이란, 무엇이란, 말인가.


빚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의 생각이다. 역시나 시간이 지나면서 빚은 저절로 사라졌다. 세상은 그런 식으로 우리의 죄를 사해준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아니면 형이 -죽음으로써 그 빚을 모두 갚았을 거란 생각이 들기도 한다. 어떤 쪽도, 결국은 빚이란 생각이다.


<중략>


그리고 나는 졸업을 하고, 취직을 하고, 결혼을 했다. 셋 중 어떤 일을 떠올린다 해도 간신히, 간신히, 안간힘을 다해 할 수 있었다는 생각뿐이다. 과연 인생은 고시를 패스하는 것보다 힘들었고, 그나마 나는 운이 좋았다는 생각뿐이다. 오로지?


오로지.


그리고 그사이, 역시나 간신히 -나는 작은 임대아파트 하나를 마련할 수 있었다. 비록 작고 초라한 곳이지만 입주를 하던 날 나는 울었다. 아마 당신이라도, 울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마치 꿈처럼 -나는 두 발을 뻗고 자고, 아주 자주, 내 몫의 계란후라이를 먹으며 살고 있다. 그리고 간혹, 아주 가끔


나는 그 고시원의 작은 밀실을 떠올리고는 한다. 그러니까 어제처럼, <몸에서 사람의 귀가 자라는 쥐>의 뉴스라도 보면서 말이다. 이제 그것은 먼 옛날의 일이고, 나는 비교적 긍정적인 마음으로 그 특이한 이름의 고시원을 추억할 수 있게 되었다. 마치 쥐의 몸에서 자라난 사람의 귀를 이해하듯, 엉뚱하게도, 말이다. 결국 시간은 우리의 편이다.


마치 정숙이란 이름의 여자와 동거를 하는 기분이었어. 늘 정숙, 정숙, 정숙해야 했거든. 놀랍게도 맥주를 마시며, 어젯밤 나는 아내에게 그런 농담을 던지기까지 했다. 아내는 웃었고, 그럼 지금은 어때? 라고 묻기를 결코 빼먹지 않았다. 글쎄, 지금은 어떨까?


물론 천국이지.


라고 말하던 그 순간 -나는 불현듯 그 특이한 이름의 고시원이 아직도 그곳에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유는 알 수 없다.


아내가 잠든 후, 나는 조용히 침대를 빠져나왔다. 베란다의 창을 열자 십오 층의 넓고 광활한 밤하늘이 시원하게 펼쳐져 있었다. 저 빛들은 무엇일까. 두둥실, 마치 기포와 같이 잔뜩 무리를 지어 떠 있는 저 빛들은 -어쩔 수 없이 이 세계를 빠져나가야 했던 죽은 이들의 동정 어린 시선일까. 아니면 가구와 같은 삶을 잠시나마 이탈한, 살아 있는 우리들의 지치고 고단한 영혼들일까. 담배를 피며 나는 생각했다.


어쩌면 나는 여전히 그 밀실 속에서 살고 있다는 기분이다. 또 혹시나, 우리가 소유한 이 모든 것들이 실은 <386 DX-Ⅱ>와 같은 것들은 아닐까 걱정이다. 물론 그럴 리는 없겠지. 이 모든 것들은 나나 당신에게 실로 소중한 재산이고, 또 우리는 누구나 그것을 모으고 지키기 위해 살고 있을 테니, 말이다.


어쨌거나

그 특이한 이름의 고시원이

아직도 그곳에 있었으면 좋겠다.

이 거대한 밀실 속에서

혹시 실패를 겪거나

쓰러지더라도

또 아무리 가진 것이 없어도

그 모두가 돌아와

잠들 수 있도록.


그것이 비록

웅크린 채라 하더라도 말이다.

<끝>





처음에는 문장이 재미있고 독특해서 좋아했지만, 다시 읽어보니 유머와 따뜻함이 베어 나서 자꾸 읽게 되는 것 같습니다. 고시원에 사는 여러 인간 군상들에 대해 가볍게 터치하며 여러 각도를 보여주고, 무거워지기 쉬운 소재와 회상 장면을 박민규 작가님 특유의 농담으로 재미있게 풀어냈습니다. 저는 특히 <386 DX-Ⅱ>에 대한 부분이 좋더라구요. <386 DX-Ⅱ>와 관련된 아무런 사건도 발생하지 않지만 소설에서 중요한 소재로 작용하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왜 행 뛰기를 그렇게 많이 하셨을까, 에 대해서는, 아마 소설자체가 시와 같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많은 일을 겪으셨지만 최근에 복귀하신 박민규 작가님의 건필을 기원합니다. 저는 박민규님이 현재 대한민국에서 가장 재미있게 문장을 쓰시는 분이라고 생각합니다.



keyword
이전 19화낙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