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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Bohye Jan 20. 2023

마지막 직장이 될 거라 생각했던 조직이 문을 닫았다.

그리고 스타트업/소셜벤처 노동자로서의 커리어를 일단 멈췄다.

마지막 직장이 될 거라 생각했던 조직이, 문을 닫았다.


2022년 6월, 다니던 회사가 문을 닫았다. 회사가 하고자 하는 일의 방향에 깊이 공감했기에, 대학생 때부터 응원하며 '언젠가 꼭 함께 일해보고 싶다'고 느꼈던 곳이었다. 졸업 후 다른 여러 직장에서 근무한 뒤, 마침내 그 회사에서 내가 해온 일과 연관이 있는 포지션의 채용공고가 열렸다. 당연히 지원했고, 다행히도 운영&커뮤니케이션 파트로 함께할 수 있게 됐다.


입사 날 '이곳이 나의 마지막 회사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던 직장은, 그로부터 1년 뒤에 "회사의 재정난, 이곳에서 오래 일해온 주요 멤버들의 소진된 상태로 인해 회사를 지속할 동력이 없다"는 요지의 이야기를 전했다. 그리고 2개월 뒤 회사는 종료되었다.


내가 회사를 좋아하는 마음은 여러 겹의 레이어로 구성되어 있었다. 조직이 하는 일이 내가 속한 사회에 꼭 필요한 일이라고 생각했고, 동료들을 진심으로 아꼈고, 회사가 하는 일을 통해 연결되는 사람들을 좋아했다. 법인 종료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는 회사를 사랑하던 마음이 여러 갈래로 쪼개져 각자 다른 감정이 됐다. 우선은 구독자, 후원자로서 오래 사랑해 왔던 브랜드가 닫는다는 상실감이 있었고, 이 조합의 동료들과 더는 일터에서 함께하지 못한다는 아쉬움이 있었으며, 거의 통보에 가까운, 갑작스러운 법인 종료 이야기를 들으면서는 노동자로서 화가 났다. 쉼 없이 달려온 멤버들의 번아웃에는 공감하는터라 마음이 아팠고, 후원자 커뮤니케이션 담당자로서 후원자들에게 미안했고, 나도 아직 상황에 대한 이해가 덜 됐는데 담당자로서 외부에 종료 소식을 전해야 하는 상황에 혼란스러웠다. 생계가 걱정이 됐고, 이 조직에 온 이유 중에서는 일 외에도 내가 책임져야하는 생활(개를 키우고 있기 때문에 재택근무 및 개를 데리고 출근이 가능한 조건이 필요했다)을 유지하기 위한 조건이 맞기 때문이 있었는데 '앞으로 그런 조직을 만날 수 있을까'도 까마득했다. 소모된 동료들에 비해 나는 비교적 최근에 채용됐기에, '이렇게 닫을 거였다면 나는 왜 채용됐을까'라는 생각에 허무하기도 했다.


어느 날에는 슬픔이 어느 날에는 막막함과 허무함이 어느 날에는 미안함과 애틋함이 밀려오며 총체적 난국의 애도의 시기를 보냈고, 멤버들 대부분이 그런 감정을 겪고 있는 것 같아 조직에 폐업으로 인한 심리상태 정리를 위한 심리상담제도를 지원 요청하기도 했다.


법인 종료 이후에도 한동안 나는 '멘붕' 상태에 놓였다. 앞으로는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일에 스스로를 많이 투영하는 편이라서 '목적에 공감할 수 있는 일'을 하고 싶어 했던 나는, 앞으로도 그런 조직을 만날 수 있을까? 아니, 애초에 그런 마음으로 하는 노동이 지속 가능한 걸까? 결국 이렇게 진심으로 일했던 사람들이 모두 소진되어 회사는 닫았는데. 앞으로 일은 그저 일로서만 건조하게 대할 수 있는 일을 해야 하는 건 아닐까? 근데 내가 그렇게 일할 수 있는 사람인가? 애정을 담아 일했던 회사가 닫거나 인원을 대폭 감소해 내가 하던 일 자체가 없어진 경우가 두 번째였기에(다녔던 회사 중 마음을 다해 일했던 곳이 딱 그 두 곳이다), 기존과 같은 일하기 방식은 더 이상 나에게 안정적인 선택지가 아니었다.



조직과 조직이 하는 일을 좋아했지만, 행복하지는 않았던 일상


회사를 다니는 동안,  "너는 좋아하는 일을 하니까 부럽다", "의미와 변화를 좇는 일을 해서 보기 좋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내가 동의할 수 있는 일을 좋은 사람들과 할 수 있다는 점에서, 분명히 일에 대한 만족도도 높은 편이었고, 의미 있는 시간이었다. 그런데 그 시간 동안 "나는 대체로 행복했는가"라고 질문한다면, 그건 아니었다.


회사 다닐 때 썼던 일기를 되돌아보면, "이건 뭔가 잘못됐다"는 이야기들이 반복해서 쓰여있다. 마지막 직장은 사회문제를 깊게 파고드는 미디어였고, 기존에 내가 일했던 곳들도 주로 비영리단체나 '사회문제 해결을 직/간접적으로 돕는 것'을 조직의 주요 목적 중 하나로 두는 소셜벤처였기 때문에 늘 '세상의 변해야 하는 부분'에 주목할 때가 많았다. 필요한 일이고, 하고 싶었던 일이기도 했고, 그 과정에서의 연대감에 자주 감동하기도 했지만, 변화해야 하는 부분에 계속 주목해야 하는 일은 분노와 무력감을 빈번하게 맞아야 하는 일이기도 했다. 또 일했던 곳들의 동료들 대부분이 사회에 대한 자신만의 비판적 시간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위주였기에, 나의 경우 타인이 관심 가지고 있는 주제와 문제의식을 좇아가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쓰거나 자기 검열의 늪에 빠질 때가 잦았다. 일터와 연결된 사람들과 토론할 때면 딱 아래의 노래 가사 같은 심정이 될 때가 많았다.  


너는 나보다 낫고 발라서
나의 흠과 실수를 다 알 것 같아서
아니 항상 난 네 앞에 서면
행복한 마음만큼 무서웠어
- 천용성의 노래 '보리차' 중 일부


 게다가 주로 스타트업 정신으로 일했기 때문에, 나는 늘 퍼블리 혹은 롱블랙 등의 콘텐츠를 읽고 커뮤니티에 속해있다고 느끼며 '트렌디한', '사업을 잘하고 있는' 브랜드와 조직문화 이야기, 새로운 전략 용어, 직무 용어를 익혀가며 남들을 좇아야 할 것 같은 압박감을 느꼈다. 회사의 메신저에는 수없이 많은 채널이 있었고 그 안은 늘 사회에 대한 기사와 영감을 주는 스타트업 콘텐츠로 차고 넘쳤다. 프로젝트 레퍼런스를 모으는 채널, '오 이거 좋다'라고 새 아이디어를 모으는 채널, 여러 소식을 모으는 잡담방, 아이디어가 던져지면 만들어지는 TF방... 퇴근 후에도 기사를 보다가, 콘텐츠를 보다가 공유하는 메시지들이 슬랙에 쌓였고, 인스타그램을 습관적으로 스와이프 하는 것처럼 나는 늘 습관적으로 슬랙(메신저)을 켜서 새 메시지가 온 채널들을 눌렀다. 그것은 기존 직장들에서 일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다녔던 직장들에서 주로 법인운영, 커뮤니케이션, 프로그램 기획운영을 담당하는 제너럴리스트로서 일했기에 남들보다 더 두루두루 알아야 한다는 압박이 심했다.


회사가 하는 일을 좋아한다고 해도, '그 일을 위해 내가 매일 시간을 보내는 방식이 이게 맞을까'라는 생각은 오래 지속됐다. 스타트업, 소셜벤처 분야에서 일하는 동안 나의 머릿속은 늘 쏟아지는 정보들과(그로 인해 주의력 결핍이 심해지고) 불안이 메웠다. 똑똑하고 열정적인 사람들과 일하는 시간은 재미가 있었고, 새로운 성장 감각을 주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압박감으로 내 일상에 여백을 점점 조여 가는 일이기도 했다.


 이제는 일이 주는 의미와 보람보다, 머릿속에 여백을 확보할 수 있는 일상을 회복하는 게 나의 우선순위라는 생각이 들었다. 직전까지 해왔던 일들과 관련된 채용 공고를 찾는 일을 그만두고, 포트폴리오를 위해 내가 해왔던 일들에 맥락과 의미를 부여하는 작업을 멈췄다. 폐업으로 인한 실직이었기 때문에 구직급여 수급 자격이 내게 주어졌다. 수급 시간 동안은 이직에 대해 급하게 생각하지 않고 천천히 에너지를 회복하며, 30살인 지금 시점의 나의 욕구를 기준으로 내가 살고 싶은 미래의 장면들은 무엇인지, 나는 하루하루 어떻게 시간을 보내고 싶은지, 일을 통해서는 내 어떤 욕망을 이루고 싶은지, 그간 해왔던 일들의 어떤 요소들을 나는 좋아했고 힘들어했는지, 각각의 활동에서 나의 에너지 소진 정도는 어땠는지 등에 대해 다시 생각하기 시작했다.


2023.1

회사 닉네임이었던 ‘랄라'라는 이름과 안녕하던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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