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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커선 Jun 05. 2021

깜깜한 새벽에 길을 나서면

아직 해뜨기 전, 깜깜한 새벽에 길을 나설 때면 스물 초반 호주가 떠오른다. 미니버스에 실려 포도 농장으로 향하던 새벽, 춥고 깜깜하고 그러면서도 고요하고 애잔하던 그 새벽 공기가 느껴진다.


포도 농장으로 유명한 밀두라의 백패커에 머물고 있다. 여기는 여행자를 위한 숙소가 아니라 노동자를 위한 숙소이다.

농장으로 출근하려면 새벽 4시 반, 알람 소리에 맞춰 일어나야 한다. 찌뿌듯한 몸, 미칠 듯이 쏟아지는 잠과 씨름하며 아직 온기가 남아있는 따뜻한 침대를 박차고 일어나야 한다. 매일 반복되지만 매일 괴롭다.

잘 떠지지도 않는 뻑뻑한 눈을 비비며 주방으로 향한다. 어제저녁 먹다 남은 음식을 찾아 아침밥을 챙겨 먹는다. 하루 종일 농장일을 하려면 모래처럼 까끌까끌한 밥알을 억지로라도 위장에 쑤셔 넣어야 한다.

가장 큰 문제는 화장실이다. 호스텔에는 농장으로 일 나가는 이들로 바글거렸다. 미니버스 한 대에 꽉 들어찰 정도다. 여유 있게 욕실을 사용하려면 어쨌거나 남들보다 먼저 일어나고 먼저 움직여야 한다.

 

허름한 작업복을 찾아 입으면 출근 준비가 끝난다. 아직 하늘에 총총한 별을 따라 미니버스에 몸을 싣는다. 1월의 남반구는 여름이 한창이지만 밤새 식은 사막 공기는 매서운 바람을 동반할 만큼 차갑다. 그렇다고 옷을 양껏 껴입을 수도 없다. 일단 해가 뜨면 공기는 금세 달아올라서 섭씨 40도에 육박한다. 일하랴, 벗어둔 옷 간수하랴 매우 번거로워진다. 다들 내 마음 같은 게, 얇은 긴팔 옷 하나만 입고서 이를 딱딱 부딪치며 새벽 추위를 참고 있다. 덕분에 밀두라의 포도는 밤새 당을 한껏 비축하며 달디 단 포도로 거듭난다.


몸을 한껏 웅크리고 버스에 자리를 찾아 앉으면 이제부터 한 시간 동안 휴식이다. 못다 한 잠을 잘 시간이다. 피곤하고 춥고 다시 잠드는 게 쉽지 않을 법도 하지만 다들 눈만 감으면 잔다. 내 앞, 옆, 뒤로 매일 함께 농장일을 나서는 아일랜드, 캐나다, 영국 그리고 한국 친구들이 앉아 있다.

머리를 창문에 쿵쿵 찧으면서도 정신없이 잠에 취한다. 문득 잠을 깨어 밖을 살피면 먹지처럼 까맣던 길이 어느덧 불그스름하게 변하고 있다. 저어 멀리 지평선 너머, 요란한 빛을 뿜어내며 서서히 떠오르는 해를 바라보고 있노라면 온갖 상념에 시달린다. 헤어진 남자 친구는  지내고 있을까, 그리운 영국의 친구들을 다시 만날  있을까, 그나저나 학교를 계속 다녀야 할까, 앞으로 무슨 일을 해야 할까, 나는 어떻게 살아야 하나.

 

아직 깜깜하고 고요한 새벽 공기, 해가 뜨기 직전의 차가운 공기를 맞닥뜨리면 버스에 실려 농장으로 향하던 그 시절이 아련히 생각난다. 번민에 시달리던 서늘한 새벽 공기가, 끝없이 반복될 것 같던 고단함이 그리고 고개를 창문에 기울여 밖을 바라보던 내 얼굴이 영화의 장면처럼 떠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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