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낮에 산책을 나갔다가 바람에 실려온 향기에 깜짝 놀라고 말았다. 벌써 그렇게 되었나? 주위를 싁하고 둘러보니 북악산과 인왕산 자락 가득히 아까시 꽃이 하얗게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숨을 들이켤 때마다 향기가 폐부에 들어차니 숨 쉬는 게 이렇게 행복할 줄이야. 라일락을 유난히 좋아하는터라 행복도 잠시, 또 어김없이 보랏빛 꽃잎이 향기와 더불어 지고 마는 게 아쉽다 느껴지기 무섭게 웬걸, 굳이 코끝을 킁킁 갖다 대지 않아도 사방천지 향기를 내뿜는 아까시꽃이 피었으니 다시 좋기만 하다. 라일락 꽃향기가 세련되고 새침하다면, 아까시 꽃향기는 화려하고 풍성하다. 따스한 햇살과 선선한 바람 그리고 나날이 짙어지는 녹음을 보며 왜 5월을 계절의 여왕이라 일컫는지 여실히 깨닫는다.
그런데 푸르른 날씨와는 별개로 요즘 나는 침체기에 빠져있다. 원래도 아무것도 하기 싫었는데 지금은 격하게 아무것도 하기 싫다. 해야 할 과제와 공부가 차곡차곡 쌓여 가지만 있는 힘껏 못 본 척 중이다. 그렇다고 누워 지내자니 허리 아프다. 뭘 보는 것도 재미없다. 돌아다니는 것도 의욕에 부친다. 그럼 아무것도 안 하면 되지 않나? 하 이게 또 말처럼 쉽지 않은 게, 그런 꼬락서니를 두고 보는 게 나에겐 가장 힘든 일이라 할 수 있겠다.
그래서 뭘 어쩌자고?
어제저녁 무거운 몸과 그보다 더 무거운 정신을 이끌고 도장에 나갔다. 제대로 몸을 풀지 않은 상태에서 낙법을 시작하자마자 연이어 기초체력 단련과 호신술을 중점 연마했더니 끝날 무렵엔 뭔가를 불태운 기분마저 들었다. 자고로 합기도란 말 그대로 상대와 나의 기(氣)가 합해져서 자연스럽게 흘러가야 하는 무술이다. 바짝 긴장하면 몸에 힘이 들어가고, 상대의 기를 이용하기는커녕 힘으로 어떻게 해 보려 하지만 상대적으로 작은 체구와 작은 힘으로 그게 될 리가 있겠나? 어떤 운동을 하더라도(악기도 마찬가지다) 첫 번째 주문은 늘 그거다. "일단 어깨에 힘을 빼시고"
사실 내 몸에 그렇게 힘이 들어가 있는지는 전혀 자각하지 못했었다. 그러고 보니 근래 관장님이 계속 같은 말씀을 하는 중이다. "왜 이렇게 힘을 주냐? 자연스럽게 걷다가, 그렇지 그냥 돌면 돼." 회전낙법에 앞서 긴장한 나의 걸음걸이는 무슨 로봇처럼 어기적거렸다. 영상으로 찍은 걸 보고 나서야 내가 얼마나 무의식적으로 긴장하고 있는지 깨달았다. 나는 나를 모르고 있었다.
나는 욕심이 크다. 첫 술에 잘하고 싶다. 완벽하게 해 내고 싶다. 그러자면 응당 많은 시간과 노력을 쏟아야 하는데 또 그러기에는 물리적 한계가 있다. 성에 찰 때까지 붙잡고 있다 보니 끝맺지 못한 일들이 하나, 둘 쌓여 이제는 세는 것조차 포기할 정도로 과적 상태이다. 그러는 사이 어김 없이 새로운 일들이 닥치고 있다. 내뱉기만 하고 지키지 않은 약속들이 떠오른다. 마음이 초조하고 불안해진다. 이쯤 되면 그만 gg를 치고 싶다(너무 올드한 표현...).
어떡해야 몸에 들어간 긴장이 힘이 자연스럽게 빠질까? 명상을 가열차게 해야 하나? 향소산을 복용할까? 될 대로 되라고 반쯤 포기할까 그냥? 전전두엽에 문제가 생긴 것 같다. 나의 언행이 마음에 들지 않고 그래서 나를 두고 지켜보기가 괴로운 시절이다. 아무래도 떠나야 할 때가 다가온 것 같다. 조만간 설악산으로 가서 산에서 먹고 자고 하루 종일 걸으며 생각을 좀 해 봐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