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는 오래전부터 울고 있던 사람처럼
끊어지지 않는 소리를 내며 떨어졌다.
김하린은 우산을 들고 서 있었다.
이미지는 선명한데, 마음은 아무것도 느끼지 못한 채.
비가 차갑다거나, 습기가 싫다거나,
이 비가 길어질지 말지
그 어떤 감정도 떠오르지 않았다.
언제부턴가 그녀의 마음은
늘 무해했고, 늘 평평했고, 늘 무뎠다.
누군가 말하길,
“하린아, 너는 참 조용하다”라고.
하지만 하린은 알았다.
그건 조용함이 아니라 비어 있음이라는 걸.
그런 그녀의 앞에,
낯선 남자가 섰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지만,
그의 존재는 설명할 수 없는 균열처럼
공기 속에 은근한 진동을 남겼다.
그가 먼저 우산을 기울였다.
비가 그녀의 어깨에서 사라졌다.
아무도 모르게 따뜻해지는 순간.
하린은 이해할 수 없었다.
왜 이 남자는,
아무런 이유도 없이
자신의 공간 안으로 한 걸음 들어오는 걸까.
그 순간만은
감정이 없던 그녀의 마음에도
아주 작고 미세한 떨림이
조용히 스며들었다.
그 떨림이 온기인지, 불편함인지,
또는 시작인지도 모르면서
그녀는 그를
‘낯선 그 남자’라고 기억하게 되었다.
그리고 그때는 알지 못했다.
그와의 만남이
자신의 무딘 세계를
서서히 깨울 거라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