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BTI 검사를 하면, 모든 항목이 중간으로 나오는데, 유난히 J/P 만 극단적인 J, 즉 계획형으로 나온다. 예기치 않은 상황을 좋아하지 않고 많이 불안해하는데, 갑자기 백수가 된 지 3주쯤 됐다. 그 사이에 있었던 복잡다단한 생각들, 경험들을 일기 쓰듯이 적어본다.
누군가에게 도움이 될 리는 없다고 생각한다. 그저 그간 애쓴 "내 마음" 을 내가 좋아하는 "글쓰기" 를 하면서 위로하고 싶고, 그간 도움이 된 것들에 감사해하고 싶은 마음이다. 공개 일기장 같은 거라는 게 좀 유치하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시니어 회사의 꿈
오랫동안 시니어 회사를 만드는 꿈을 꿨었다. 직장에서 은퇴한 후, 경제적인 목적 말고, "재미" "보람" 같은 목적으로 공동체가 필요한 친구들이 모여서 자유롭게 일할 수 있는 그런 회사. IT 경로당, IT 치킨집... 그런 식으로 혼자 불렀다. 55살 정도가 적당하지 않을까 내심 생각했는데, 49살에 덜컥 기회가 왔다. 5년 정도는 경제적인 목표를 병행하며 탄탄하게 만든 후에 자연스럽게 구성원이 나이 들면 되겠구나... 라는 생각으로, 그 기회를 잡기로 했다.
올림픽 경기 시청은 4년에 한 번씩 오는 나의 가장 큰 취미생활이라, 올림픽 시작하는 날 퇴사하고, 올림픽 끝나는 날 새 회사에 join 하는 완벽한 일정이었다. 멀쩡한 회사 다니던 대학 동기 녀석도 꼬여냈고, 그렇게 시니어 회사를 향한 나의 소중한 꿈이 시작되었다.
두 주만에 깨진 꿈
그런데 그 꿈이 두 주만에 끝나버렸다. "마케팅 직원 어린 사람 채용하면 안 되나요?" 이 말이 파국의 시작이었다. 나는 시니어 회사를 만드는 게 꿈이었고, 상대방은 나를 리쿠르트 하는 게 꿈이었었나 보다. 그래서 그냥 서로 듣고 싶은 말만 듣고, 자기 좋은 대로 이해한 모양이다.
예를 들면... 레스토랑 경영자가 리쿠르트 한 셰프와 "건강한 음식을 파는 게 꿈이라 모든 식자재를 국내산 유기농으로만 한다" 라는 약속을 했는데, 경영자는 Main 식재료 정도만 그렇게 할 거라고 생각했고, 셰프는 모든 재료를 다 그렇게 하겠다고 생각한 상황이랄까...
어차피 나도 여기가 절벽이기 때문에 고심 끝에 "이것들만 ok 하면 나머지는 다 괜찮다" 는 마지막 내용을 협의했고 매우 흔쾌히 합의가 되었다. 흔쾌하면 안 되는데 흔쾌한 게 마음에 몹시 걸렸는데 아니나 다를까 다음날, "협의한 내용들은 합리적이라서 문제가 없지만, 앞으로 계속 다른 것들을 더 요구할 것 같아서 같이 못 하겠다" 라는 얘기를 들었다.
마지막까지 의사 전달이 완벽하게 실패했다는 사실이 씁쓸하기도 하고, 엉뚱하게 재밌기도 했다. 당연히 자기 회사인데 자기 맘대로 하는 게 맞고, 두 주간 옆에서 보니 이 친구는 사람의 신뢰를 얻는 것에 재주가 있어서, 어린 친구들을 뽑아 투자를 받으면서 성장하는 것이 더 어울리겠다 싶었던 관계로, 쿨한 척 알겠다고 하고 짐 싸서 나왔다.
그렇게, 백수가 되었다. 이러려던 건 아니었는데...
친구의 구직
나의 꼬드김에 사표를 던지고 이곳으로 온 내 친구는 망연자실이었다. 부끄럽게도, 이 친구를 꼬드길 때, 나는 이 회사의 owner 도 아니면서 마치 owner 인 양 책임지지 못할 엄청난 말들을 쏟아냈었다. 오랜 꿈이었다 보니, 내가 너무 철없이 설렜었다... 속죄하는 길은 어떻게든 일자리를 구하는 방법밖에 없어서, 연락하기 껄끄러운 관계든 뭐든 상관없이 닥치는 대로 전화를 했다.
짐 싸서 나오던 날 친구가 그랬다.
"우리 그럼 이제 동료에서 다시 친구가 된 거지?"
드라마 대사 같은 멋진 말이긴 했지만, 친구로 남으려면 취직에 성공해야 하는데 싶어 걱정이 쌓였다. 친구는 다행히 내가 소개해 준 회사 하나와 얘기가 잘 되어 취직이 확정되었다. 다행이다... 정말...
은퇴를 할까?
나는 경제적인 이유 때문에 직장을 더 다닐 필요는 없었다. 엄청 많은 돈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부양할 가족이 없고 소비가 많지 않기 때문이다.
2년 반을 다닌 나의 전 직장은 나쁘지 않았다. 하지만, 나에게 근본적으로 문제가 된 것은, 민감도/특이도의 문제였다. 인공지능이 판독을 하고 그걸 b2c 서비스로 제공한다고 할 때, 가끔 인공지능이 병인데 병이 아니라고 할 수도 있고, 병이 아닌데, 병이라고 할 수도 있다. 당연하다. 대부분의 사람이 그걸 당연하다고 생각한다는 것도 안다. 그런데 나는 그게 무서웠고, 그 문제에서 빠져나오질 못했다. 서비스를 만들 때 내 의견이 마이너 하다고 느껴지는 순간 자신감을 잃게 되는데, 그 상태에서는 스스로 만족을 느끼기가 어려웠다.
올해는 안 좋은 일들이 너무 많았다. 그런 일들 때문인지, (나중에는 좀 나아지긴 했으나) 기억력이 특히 많이 안 좋아졌다. 릴리즈를 했는데 너무 뻔한 버그를 만들기도 하고, 그 버그를 고치다가 또 버그를 만들기도 했다. 원래 걱정이 많아서 프로그램 짜면서 테스트를 많이 하는 편이라 버그는 거의 안 만드는데, 구현을 하다가 "이걸 테스트해야지" 라는 생각은 하는데, 그 생각을 순간적으로 잊어버리다 보니 실수가 반복됐다. 좀 오래된 기억이 나지 않는 건 너무 당연했고, "과거의 나라면 어딘가에 잘 적어두지 않았을까?" 싶어서 Confluence 를 뒤져보는 게 일상이었다. (과거의 나는 어김없이 어딘가에 글을 써 두었고, 내 글은 쏙쏙 잘 이해가 되기는 했다. ㅎㅎ 그게 유일한 위안이었다.)
현실적으로 리크루트 이외의 일반적인 프로세스로는 이직이 불가능한 49의 나이. 어렸을 때 충분히 경험한 매니저 생활은 하고 싶지 않고, 현역으로 은퇴하고 싶은데, 아직은 평균보다야 낫겠지만, 이제 성장보다는 퇴보가 남은 느낌... 그럼 나는 이제 여기서 만족하든 만족하지 않든, 그저 안 짤라주셔서 감사하다는 마음으로 하루하루를 보내야 하는 걸까? 생각이 여기까지 이어지자 내 운명을 내가 결정하고 싶다는 생각, 박수칠 때 그만하고 싶다는 생각이 강해졌다. 마침 그때 시니어 회사를 만들 수 있는 솔깃한 제안이 있었고, 모든 행운이 나에게 온 것인 줄 알고 너무 설레어 버렸다. 바보같네. ㅎㅎ. 그럴 수 있어. 괜찮아.
의도치 않은 백수가 시작된 날 멍하니 리액트, 프론트엔드 따위의 검색어를 타이핑해보다가, 이건 아니라고 이내 깨달았다. 돈을 벌고 싶은 욕구가 없으니, 그 회사가 풀고 있는 문제에 공감하고 함께 그 문제를 풀면서 행복을 느끼는 것만이 나를 지탱해 줄 수 있는데, 내가 공감하는 문제이면서, 내가 잘할 수 있는 문제를 찾기도 어렵고, 사실 그보다 상대 (회사) 입장에서 굳이 구성원들보다 구성원들 부모님 나이에 더 가까운 "모르는 사람" 을 데려다가 risk taking 을 할 이유가 없었다.
선택지는 둘 중 하나다. 직장 생활을 은퇴하던지, 아니면 아는 사람들에게 연락을 하던지. ... 핸드폰을 집어 던지고 멍하니... 취직은 이제 관두고 은퇴한 후, 1인 기업이든 뭐든 해 볼까... 라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1인 기업
2년 반 동안 창업팀에서 일한 적이 있었다. 초심자의 행운으로 서비스는 꽤나 크게 성공했다. 월화수목금금금 으로 일하고, 잠자는 시간 말고는 계속 일만 했고 너무 힘들었다. 그 와중에 정말 기뻤던 때가 아주아주아주 가끔 있었다. 앱을 출시하던 날, 고객이 "고맙다" 고 한 날, 아이디어가 떠올라서 얼른 기능 개발해서 배포했는데 다음날 매출이 30% 뛰던 날... 따지자면 1년에 두 번 정도...? 그런데 그 두 번이 너무 좋은 거다. b2b 할 때는, 365일 중에 200일이 40-60점이고, 165일이 61-80점이었다면, b2c 할 때는, 365일 중에 363일이 0-30점이고, 이틀이 99점인 것 같은...
그런데 문제는, "99점" 이라는 기분이 있다는 걸 알아버려서, 다음부터는 뭘 해도 그렇게까지 기쁘지 않은 거다... 전에는 70점인 날은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었는데, 99점을 맛보고 돌아와서는, 70점인 날도 "아 좋네" 로 끝나는 느낌... 일을 되게 하려는 과도한 집착이 낳은 중독 같은 것이었다.
1인 기업에 대해서 많은 것들을 읽어보고 생각해 보았다. (아이템 뒤져보다가 하고 싶은 게 생겨서 가슴이 하도 쿵쾅대고 설레어서 진정시키느라 꽤 오래 힘들기도 했다. 흐흐...)
하다가 잘 안 되면 초조해 할 것 같다. 반대로 잘 되면, 과도한 집착으로 선 넘는 무리를 하게 될 것 같고, 또다시 목적을 잃고 영혼을 팔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그냥 예전 생각대로, 55살이 되어서, 은퇴한 친구들끼리 "심심하니까 프로그램을 좀 짜 볼까" 같은 가벼운 시작이 훨씬 좋게 느껴졌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네라고 생각되자 불안이 고조되기 시작했다... 어떡하지?
불확실성을 받아들이는 연습
불안한 마음에 몇몇 사람을 만나서 주저리주저리 얘기를 했다. 1인 기업 잘할 것 같은데 한번 해 보라고 응원해 주면서도, 마지막에 늘 공통적으로 하는 말이 있었다.
"천천히 해"
작년에 엄마가 암 정밀 검사를 받으러 입원했는데, 검사 결과 폐암 4기이고, 더 자세한 건 2주 후에 병원 와서 얘기하자고 했었다. 2주... 난 그 시간 동안 폐암과 여러 가지 치료방법에 대해서 열심히 공부를 했다. 마치 일할 때처럼, 2주 후에 의사가 얘기할 수 있는 결과의 경우의 수와, 각 경우의 수에 대한 대응 방법을 머릿속에 그려나갔다. 보호자로서 해야 할 일을 했다기보다, 내가 너무 불안해서였을 것 같다.
만약에 내가 병원에서 2주 후에 보자는 얘기를 들었다면 어땠을까? 나의 노력으로 결과가 변할 수 있는 것이 아닌데, 2주라는 시간도 소중하게 생각하며, 최대한 마음 편히 여행을 가서 즐길 수 있을까? 겁에 질려서 2주를 보내고 싶진 않은데... 그런 생각이 들었을 때, 언젠가는 "불확실성" 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연습을 해야 하지 않을까란 생각을 했었다.
천천히 하려면, 불확실성을 받아들여야 한다. 지나치게 부정적인 생각으로 불안에 떨지도 말고, 지나치게 긍정적인 생각으로 기대 앞에 무너지지도 말고, 그저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지금 할 수 있는 일들에 오롯이 집중할 수 있는 능력...
모든 성격은 장점이 있으니 장점을 살려서 태어난 대로 살아야 한다고 생각하는 주의였지만, 나의 불안 해소와 평안한 노후를 위해서, 단점을 극복하는 노력을 이제 해야 할 때가 되었다고 느꼈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 그래... 이 기회에 살 빼고 건강을 되찾자.
제대로 다이어트
전에도 살을... 약간... 빼려고 한 적은 있었다. 딱히 어떤 공부를 하거나 약을 먹거나 한 건 아니고, 배달 음식 안 먹고, 야식 안 먹고, 조금 먹고, 많이 걷는 그런... 30대 때 한번 했을 때는 꽤나 감량을 했었고, 40대 때는 감량은 그리 되지 않았다. "이렇게 적게 먹는데 왜 안 빠지지?" 라는 생각이 가끔 들었지만, 그때는 다이어트에 진심은 아니었던 터라 그냥 그렇게 지나갔다.
올림픽 기간에 우연히 유튜브에서 "아무리 적게 먹어도 살이 빠지지 않는 이유" 를 보고 눈에 번쩍 떠졌었다. (나도! 이렇게 조금 먹는데 이상해!)
- 적게 먹으면 몸이 반응해서 기초대사량이 떨어진다. 한번 떨어진 기초대사량은 잘 복구되지 않는다. 그래서 오히려 조금만 많이 먹어도 살이 찌는 체질로 바뀐다. (잠깐 적게 먹어 살이 빠지더라도, 요요가 필연적으로 온다.)
- 적게 먹는 상태에서는 운동을 아무리 해봐야 먹는 게 적으니 근육이 생기지 않는다.
- 탄수화물, 특히 당류를 많이 먹게 되면 인슐린이 당을 제대로 처리 못하는 인슐린 저항성이 생기고, 이 때문에 몸은 "아 몸에 당이 많구나" 라고 생각하고 지방을 쓰지 않는다.
- 몸에 지방이 점점 많아지면 지방세포들이 포만감을 뇌에 주려고 해도, 뇌에서 "입이 심심하지? 더 먹어~~" 라며 유혹한다.
- 이렇게 지방을 대사하지 못하는 상태가, 대사가 무너져서 조금만 먹어도 살이 찌는 상태이다. 체중을 줄이려고 하지 말고, 몸의 대사가 정상이 되도록 노력하고, 그리하여 지방이 대사가 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비만은 이로 인해 생긴 질병이다.
그래서 여러 영상들이 합의하는 내용은 이렇다.
- 설탕, 밀가루는 안 좋다. 먹지 마라.
- 탄수화물은, 재료 그대로 먹는 쌀 같은 걸 적당히 먹어라.
- 과일 너무 많이 먹지 마라. 야채는 많이 많이.
- 튀긴 음식이나 나쁜 기름은 먹지 마라.
- 단백질 잘 챙겨 먹어라. 그래야 기초대사량 안 떨어지고 근육도 생긴다.
- 결과적으로 지방 대사까지 하려면 잠을 잘 자는 게 필수다. 밤에 잘 자야 한다. 커피는 오전에만 먹어라.
일부 합의가 되지 않은 내용은 이렇다.
- 쌓여 있는 지방을 짜내려면, 숨이 가빠지는 고강도의 운동을 해야 한다 vs. 물과 소금만 먹는 단식을 단계적으로 해야 한다
- 단백질 셰이크를 포함해서 하루 4끼를 충실히 먹는다 vs. 한두 끼만 잘 먹어라
어렸을 때, 나는 내가 40 넘어까지 살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하늘에서 "하루 더 살래, 이 버그 해결할래?" 하면 한순간의 망설임 없이 "버그 해결할래요" 라고 말하는 아이처럼, 그냥 일이 되는 게 좋았고, 밤새면서 일하는 것도 일상이었다. 특별히 자기 관리 같은 건 생각도 해본 적 없었고, 1년에 1kg 씩 서서히 늘어가는 그런 패턴을 밟아나갔다. 그나마 단 음식을 즐기지 않았던 건 다행이었는데, 몇 년 전부터는 단 음식이 너무 땡겨서, 밥 먹고 과자나 아이스크림을 주워 먹는 버릇이 생겼다.
결과적으로 아주 뚱뚱해졌고, 아침에 심장약, 고혈압약, 고지혈증약을 챙겨 먹는 처지였다. "재밌게 일하느라 이렇게 된 거니까 받아들여야 해" 라고 머리는 생각했지만, 마음은 공포에 질려 있었다. 작년부터는 주변에 죽는 사람 아픈 사람이 많아져서인지, 심하게 우울해지기도 하고, 유튜브 영상 리스트가 온통 아프고 치료하는 얘기일 정도로 공포에 질린 삶을 살고 있었다.
다이어트는 "적게 먹고 운동해도 안 빠지던데..." 라는 생각 때문에 하고 싶은 마음이 안 들었는데, 어쨌든 다르게 해 볼 수 있는 가능성을 발견하게 되어 굉장히 기뻤다. 지금이라도 최선을 다해서 건강해져보자... 그러면 공포도 당당하게 탈출할 수 있지 않을까?
백수 되기 전에도 탄수화물을 슬슬 줄여 보고 있었는데, 백수 된 김에 제대로 다이어트를 한번 해서, 초고도비만에서 과체중으로 가자! 는 목표가 생겼다.
그래, 일단 이걸 하자!
시작, 스위치온 다이어트
몸이 지방대사를 킨다는 스위치온 다이어트를 하려고 맘을 먹고 책도 읽고 영상도 보고, 단백질 셰이크도 사고, 요리하려고 새벽배송도 신청하고 등등... 여러 가지 준비를 했다. 시작한 지 이제 10일 정도 지났다.
첫 3일은 단백질 셰이크만 하루 4번 먹는다. 후기를 보면 보통 여기서 꽤나 많은 감량이 이루어지는 듯했으나, 나는 그리 큰 감량이 없었다. 백수 된 이후 마음이 복잡하여 이미 굉장히 적은 양만 먹고 있었기 때문에, 단백질 셰이크 4번은 평소 먹는 것 대비해서 오히려 든든하게 먹는 느낌이었다.
스위치온 다이어트가 3-4주간 하는 프로그램인데 이때 한꺼번에 엄청나게 감량될 거라고 기대하지 않기로 했다. 생각해 보면, 30년 동안 1년에 1kg 씩 착실하게 늘려온 몸인데, 3주 만에 뭔가 엄청나게 좋아지는 것도 비양심적이지 않나.
착실하게 하라는 대로 완수한 후에 그리 큰 감량이 없더라도 실망하지 말고, 다른 선생님의 방법도 한번 따라가 보자는 계획을 세웠다. (아... 계획병...ㅠ.ㅠ)
스위치온 다이어트에서 강조하는 것이 "운동" 이다. 몇 년 전부터 하루에 만 걸음 채우기를 대부분의 날에 실천했었는데, 이번에 공부하면서 알게 된 것은, 걷는 건 활동이지 운동이 아니라는 거다 ㅠ.ㅠ 숨이 가쁘게 움직여야 진짜 운동이니까, 어지간하면 헬스장 가서 PT 받으라고 했다.
근데 뭔가 부끄러워서 헬스장은 가고 싶지 않아서, 유튜브에서 운동하는 영상을 한참 찾았다. "1시간 걷지 말고 이걸 하세요" 라는 영상들이 너무나 많았고, 거기서 내가 할 수 있고 땀이 많이 나는 것들을 찾아서 나름대로 열심히 따라 했다. 집 앞 양재천에 나가서 사람이 없는 명당자리에서 나름대로 여러 가지 루틴도 했다.
원래도 침대에 좀 오래 누워 있으면 허리가 아팠다. (그래서 침대도 바꿔봤는데 마찬가지였다.) 일어서서 걷다 보면 괜찮아지고, 또 아침에 눈뜨고 나면 다시 아프고.
나름의 빡센 운동을 한지 며칠 지났을 때, 오래 안 누워 있어도 새벽이 되면 허리가 아프네 싶다가, 심으뜸 선생님의 마라맛이라는 루틴을 따라한 다음날은, 자려고 누운 지 1시간 만에 허리가 불편하기 시작했다.
운동을 하고 잠을 자야 하는데, 운동을 하면 잠을 잘 못 자는 딜레마... ㅠ.ㅠ 이 안타까운 상황에 열심히 검색해서 인터넷에서 정선근 교수님을 만났다.
자고 일어났는데 허리가 아픈 건 전날 허리에 안 좋은 무언가를 한 것이다 라는 걸 배웠다. 아... 무턱대고 아무거나 찾아서 하면 안 되는구나... 라고 깨닫고, 허리가 괜찮은 운동 방법을 찾기 시작했다. 따라 했다가 다음날 허리가 어제보다 더 아프면 그만하는 식으로 하고, 허리를 구부리는 자세는 피하고, 너무 무리하지 않기로 했다. 내가 가진 무기는 "시간이 많다" 는 것이니, "1시간 걷지 말고 이것하세요" 류는 보지 말고, 시간이 오래 걸려도 허리에 무리가 가지 않는 것들을 찾아보려고 했다. 그런 식으로 어느 정도 나의 루틴을 완성했다.
아침에 일어나면 양재천에 나가서 8000보 정도 걷고 온다. 걷는 것이 "활동" 이 아니라 조금이라도 "운동" 이 되려면 빨리 걸어야 한다고 했다. 그러려면 보폭을 넓혀서 걸어야 한다는데, 아직 머리에 잡생각이 많다 보니, 보폭을 넓히는 것을 오래 지속하지 못한다. 멍 때리며 산보하다가 할머니한테 추월당하면 "앗" 하고 다시 보폭을 넓히고... 어쨌든 우리 집이 양재천 바로 앞에 있는 건 너무 큰 축복인 듯하다. 매일 걸어도 전혀 지겹지 않다.
9월 양재천
두 번째 식사 이후에는 홈트를 하고 싶은데 시도해 본 대부분의 홈트는 허리가 아팠다. 이 와중에 허리가 아프지 않은 루틴 하나를 찾았다. (중간중간 허리 구부리는 자세는 자세를 좀 변형시키며 따라 했다) 나처럼 시간이 넘치는 아이에게 어울리는 긴 시간의 루틴이라는 것도 맘에 들었다.
마지막 네 번째 식사 이후에는 양재천에 나가서, 정선근 교수님이 알려주신 푸시업이랑 발뒤꿈치 들기를 하고, 2-3분 뛰고, 1분 걷는 걸 여러 차례 반복한다. 아, 그리고 아침에도 저녁에도 엘리베이터 대신 계단으로 올라간다.
이렇게 하면...!! 잘 때 무릎이 아프다. 무릎은 20대 때부터 좋은 편이 아니었다. 워낙 초고도비만이라서 조심한다고 해도 무릎이 안 아프게 운동하는 건 불가능할 것 같은데, 문제는 무릎이 아프면 잠을 자기가 어려워서 파스를 붙여야 하는데, 대부분의 파스가 붙여두면 피부병이 생겨서 이내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태가 된다는 거다.
평소 같으면 이 문제를 미리 예상하고 깊이 고민했을 텐데, 약간 닥치는 대로 발생한 문제에만 집중하기로 마음을 바꿨었다. 예상한 대로 무릎이 아파오자, 미국에서 친구가 사다 준 파스가 크기가 작지만 양이 많아서 부담 없이 한 무릎에 두장씩 잘 때 붙이고 일어나자마자 뗐더니 피부병이 생기지 않았다. 이게 그렇게 기쁠 수가 없었다.
미국에 사는 친구가 사다 준 파스
요리하기
어렸을 때 그다지 집이 풍족하지 않았기 때문인지, 돈을 쓰는데 다소 저항감이 있었다. 두부 한모를 샀는데 5500원이라서 깜짝 놀라 봤더니 "100% 국내산 콩" 이라고 적혀 있어서 "다음부터 국내산 콩 두부는 사지 말아야 겠다" 라고 다짐을 해 버린다거나, 내가 젤 좋아하는 "TV 보기" 라는 취미를 위해 작정하고 TV 를 사는데 LG OLED 를 못 사고 중소기업걸 산다거나... 돈이 없어서 아끼는 게 아니라 이상한 소비 저항감 같은 것이 있었다.
기본적으로 "좋은 재료로 만든 걸 잘 먹어야 한다" 는 다이어트 방식들이라서 직접 요리를 해야 했다. 내가 젤 먼저 이겨내야 할 건 나의 이런 소비 장벽이었다. 무조건 국내산 야채만 사기로 하고, 유기농은 걸러내던 습관도 없앴다.
문제는 야채 요리였다. 샐러드나 단백질 요리는 대충 씻고 삶으면 되는데, 야채 요리는 씻고 썰기만 할 수 없으니 말이다. 역시 여러 고수님들의 도움을 받았다.
영상을 찾고, 레시피를 보고 재료를 사고, 삶고 볶고 무쳐서 나름 반찬통을 채웠다. 여기저기에 뭔 통장, 뭔 통장들이 몇 개나 있는데, 그 통장들보다도 더 뿌듯한 나의 반찬통이었다.
4종 반찬 완성
마무리
앞으로 뭘 해야 할지는 모르겠고, 일단 건강을 되찾자고 생각했지만, 마음이 좀 울적했었다. 그때 갑작스럽게 머릿속에 (내가 좀 바꿔서 지어낸) 문장 하나가 스쳐갔다.
"오늘 내가 살고 있는 이 하루는, 수많은 직장인이 그토록 원하는 완전한 자유다"
뭔가 갑자기 엄청 열심히 행복해야 할 것 같았다. 그 이후로 생각이 좀 바뀐 듯하다. 미래에 대한 걱정 불안은 내려놓고, 내일은 뭘 해 먹지? 내일 해 먹을 재료가 냉장고에 있나? 숙주나물을 먹고 싶은데 요리하는 방법이 뭐지? 머 이런 것들을 고민하고 찾아보느라 바쁘다. 원래 요리를 싫어하지 않아서 이 시간들이 꽤나 즐겁다.
어제는 너무 놀기만 하나 싶어서 주문한 IT 관련 책이 하나 도착했는데, 변요한 여자 친구는 누가 죽인 건지 궁금해서 (백설공주에게 죽음을/ MBC 금. 토 드라마 ㅋㅋ) 흥미진진하게 드라마 보느라 책 포장지도 뜯지 못했다.
가끔 옛날 생각을 하면 숨 막히게 즐거웠던 순간들이 참 많았다. 그때는 그 순간순간을 위해서 최선을 다하며 살았었는데... 어느새 그 순간들을 다 잊어버리고, 지금의 건강하지 못한 내 몸과 결정되지 않은 미래를 한탄하는 것은 내 즐거웠던 과거에 대한 배신일테다.
천천히 하자. 다이어트는 박 선생님 방법으로 안 되면, 최 선생님 방법으로 해 보고, 그것도 안 되면 머 또 어딘가 어떤 선생님이 계시겠지. 천만금을 줘도 못 바꿀 건강이라는데, 49살에 갑자기 백수가 되어, 그 덕에 건강을 되찾는다면 엄청난 경제활동 아닌가.
내 성격은, 주어진 상황에서 올 수 있는 "최악" 을 구체적으로 상상하고, 그걸 해결할 방법을 머릿속에서 찾아낸 후에, "괜찮아" 라고 말하는 성격이었다. 이제 내 앞에 펼쳐질 문제들은 "이 기능 구현을 이번주까지 다 못하면 어떡하죠?" 처럼 쉽고 간단한 문제들이 아니다. 내버려 두는 연습을 하자. 뻔한 얘기지만, 걱정한다고 안 될게 되겠는가. 차라리 이 순간을 즐겁게라도 보내자. ... ...
이렇게 매일매일 스스로에게 얘기한다. 마음이야 습관처럼 불안하다. 하지만, 이마저도, "천천히 해결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