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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깟 완두콩, 그 깊은 온도

월간 에세이 10월호 게재 글

by 숲song 꽃song
*이 글은 원고청탁을 받아, 월간 에세이 10월호에 게재된 글입니다.

그깟 완두콩, 그 깊은 온도



완두콩 꼬투리가 제법 통통해졌다. 조만간 갓 지은 완두콩 밥을 싸 들고 엄마에게 갈 생각을 하니, 마음이 벅차다. 완두콩은 어릴 적부터 내가 가장 좋아하는 콩이었다. 하얀 쌀밥 위에 드문드문 섞인 초록 완두콩은 보기에도 예뻤고, 입안에서 톡 터질 때의 고소한 풍미는 유독 고급스럽게 느껴졌다.


엄마는 그런 딸의 취향을 잊지 않으셨다. 해마다 가을이면 잘 보관해 둔 씨앗을 꺼내 텃밭에 심으셨고, 이듬해 봄이 되면 종자로 쓸 한 줌만 남기고 나머지를 모두 내게 보내주셨다. 냉동실에 고이 넣어두고, 나는 1년 내내 실컷 완두콩 밥을 지어먹을 수 있었다. 그 완두콩이, 올해는 우리 집 뒤뜰에서 여물어 가고 있다

지난가을, 시골에서 혼자 지내시던 엄마가 넘어져 엉덩이뼈가 부러지셨다. 연세가 있어 장기 입원이 불가피했다. 큰딸인 나는 오빠와 번갈아 병문안을 다녔다. 마침 은퇴 후 인생 2막을 분주하게 시작하던 시기라, 엄마의 갑작스러운 입원은 내 마음을 무겁게 짓눌렀다. 통증에 지쳐 있던 엄마는 어느 날, 완두콩 이야기를 꺼내셨다.


“완두콩은 가을에 심어야 혀. 시골집에 씨앗 있으니, 그거 가져다가 너희 집 뒤뜰에 심어라. 그게 토종 완두여. 귀한 거다. 지금 심어두면 내년 봄에 따먹을 수 있어. 네가 좋아하잖냐. 아무 데나 아무렇게나 심어도 잘 자라니까, 늦지 않게 얼른 갖다 심어라.”

그게 나를 위한 말이라는 걸 알았지만, 병문안과 새 일상에 지친 내게는 여유가 없었다. 한편으론 병상에 누워서까지 ‘그깟 완두콩’을 걱정하는 엄마가 못마땅하게 느껴졌다. 평생 농사일로 허리와 무릎을 다 망가뜨리고도, 이제는 뼈가 부러진 와중에도 농사를 놓지 못하는 엄마가 밉고 안쓰러웠다. 마뜩잖은 표정으로 "알겠어요"대답은 했지만, 마음이 움직이지 않아 차일피일 미루다 결국 까맣게 잊고 말았다.


12월을 앞두고 첫눈 소식이 들려왔다. 그제야 잊고 있던 완두콩이 떠올랐다. 땅이 얼면 심을 수 없다는 생각에 부랴부랴 시골집에 들러 씨앗을 챙겼고, 집 뒤뜰 빈 땅에 대충 꽂아 두었다. 이미 때를 놓친 듯해 싹이 날 거라 기대하지 않았다. 그저 엄마에게 "심었다"라고 말할 수 있는 구실이 필요했을 뿐이다. 첫눈은 예년에 없던 폭설이었다. 무릎까지 쌓인 눈은 채 녹기도 전에 몇 번이나 다시 내렸다. 겨우내 뒤뜰은 발길이 닿지 않는 고요한 땅이 되었고, 나는 완두콩을 잊은 채 겨울을 보냈다.

완두콩 싹

봄이 되어 눈이 모두 녹았을 무렵, 문득 뒤뜰에 나가보았다. 거기엔 처음 보는 연둣빛 싹들이 여기저기 얼굴을 내밀고 있었다. ‘이게 뭐지?’ 고개를 갸웃하다가, 한참 만에야 깨달았다. 작년 가을, 대충 심어둔 완두콩이 눈 속에서 살아남아 기어이 싹을 틔운 것이다. 미안함과 고마움이 한꺼번에 밀려와, 그 자리에 주저앉아 한참을 있었다. 그 작은 새싹들이, 자신의 생명력과 엄마의 사랑을 외면한 나를 향해 보란 듯 고개를 쳐들고 항의하는 것만 같았다. 그날 이후로 하루의 시작은 완두콩을 들여다보는 일로 바뀌었다.

봄이 지나고 여름이 오는 동안, 완두콩은 줄기를 뻗고 꽃을 피우고 꼬투리를 맺으며 천천히 여물어 갔다. 병문안과 안부 전화가 이어지는 동안, 엄마와 나 사이에도 애틋한 정이 조금씩 꽃을 피우고, 꼬투리를 맺고, 마침내 여물어 갔다.

5개월의 병원 생활 끝에 엄마는 퇴원하셨고, 농사일에서는 완전히 손을 떼셨다. 뒤뜰에서 여물어 가는 완두콩은 이제 엄마가 내게 물려주신 생명의 선물이 되었다. 앞으로는 내 손끝에서 해마다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어 우리의 밥상과 마음을 채울 것이다. 무심한 딸은, 그동안 찍어 둔 완두콩 사진을 엄마에게 보여드리며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다가, 얼마 전에서야 알게 되었다.

엄마도, 나처럼 완두콩을 좋아하셨다는 사실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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