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의 이중 정체성과 그 속에 숨은 이야기
같은 포도 다른 이름, 와인 속 숨겨진 이야기
와인은 역사, 지역, 문화, 언어가 얽힌 예술 작품입니다. 특히 동일한 포도 품종이 지역이나 전통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현상은 와인의 매력을 더욱 깊게 만듭니다. 이 현상은 와인을 이해하는 중요한 단서이자 탐구의 대상으로 만듭니다. 본 글에서는 같은 포도 품종이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이유와 대표적인 사례, 그리고 그에 얽힌 흥미로운 이야기를 설명합니다.
같은 품종이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이유
동일한 포도 품종이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이유는 지리적, 언어적, 문화적 차이에 기인합니다. 포도 품종은 지역의 언어와 재배 방식, 기후에 따라 각기 다른 이름을 얻습니다. 또한 지역 특유의 클론이나 양조 스타일로 인해 새로운 정체성을 부여받습니다.
유럽의 구세계 와인에서는 품종명보다 지역명이 와인의 정체성을 정의합니다. 예를 들어, 프랑스 보르도(Bordeaux)에서는 카베르네 소비뇽(Cabernet Sauvignon)을 “보르도 블렌드(Bordeaux Blend)”로 부르며, 이탈리아 키안티 클라시코(Chianti Classico)는 산지오베제(Sangiovese) 품종을 기반으로 하지만 지역명으로 불립니다. 이는 토양, 기후, 양조 전통이 와인의 개성을 결정짓기 때문입니다.
같은 포도, 다른 이름의 대표적인 사례
다음은 동일한 포도 품종이 지역에 따라 다르게 불리는 대표적인 사례들입니다.
산지오베제(Sangiovese): 이탈리아 토스카나(Tuscany)에서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Brunello di Montalcino), 모렐리노 디 스칸사노(Morellino di Scansano), 프루뇰로 젠틸레(Prugnolo Gentile) 등으로 불립니다.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Brunello di Montalcino)는 몬탈치노(Montalcino) 지역의 산지오베제 클론으로 유명합니다.
시라(Syrah): 프랑스 론(Rhône) 지역에서는 시라(Syrah)로, 호주에서는 쉬라즈(Shiraz)로 불립니다. 프랑스는 우아하고 스파이시한 스타일, 호주는 진한 과일향의 강렬한 스타일이 특징입니다.
템프라니요(Tempranillo): 스페인에서 틴타 델 파이스(Tinta del País), 틴타 데 토로(Tinta de Toro), 센시벨(Cencibel) 등으로 불립니다. 리오하(Rioja)와 리베라 델 두에로(Ribera del Duero)에서 스타일 차이가 뚜렷합니다.
그르나슈(Grenache): 스페인에서는 가르나차(Garnacha), 이탈리아 사르데냐(Sardinia)에서는 칸노나우(Cannonau)로 불립니다. 지역별 풍미 차이가 큽니다.
피노 그리(Pinot Gris): 프랑스 알자스(Alsace)에서는 피노 그리(Pinot Gris)로, 이탈리아에서는 피노 그리조(Pinot Grigio)로 불립니다. 알자스는 풍부한 스타일, 이탈리아는 가볍고 상큼한 스타일입니다.
진판델(Zinfandel): 이탈리아에서는 프리미티보(Primitivo)로 불립니다. 미국은 달콤하고 진한 스타일, 이탈리아는 전통적이고 구조감 있는 스타일입니다.
말벡(Malbec): 프랑스 루아르(Loire)에서는 코(Côt)로 불립니다. 아르헨티나는 진하고 과일 중심, 루아르는 스파이시하고 가벼운 스타일입니다.
이름뿐 아니라 스타일도 다릅니다
동일한 품종이라도 지역과 양조 방식에 따라 와인의 성격이 달라집니다. 예를 들어, 프랑스 북부 론(Rhône)의 시라(Syrah)는 후추와 스파이스의 풍미가 두드러지고 섬세한 구조감을 가집니다. 반면, 호주 바로사 밸리(Barossa Valley)의 쉬라즈(Shiraz)는 블랙베리와 초콜릿 같은 진한 과일향과 높은 알코올 도수를 특징으로 합니다. 또한, 프랑스 알자스(Alsace)의 피노 그리(Pinot Gris)는 복숭아와 꿀의 풍부한 향과 부드러운 질감을, 이탈리아의 피노 그리조(Pinot Grigio)는 레몬과 사과의 상큼한 향과 가벼운 바디를 제공합니다. 미국의 진판델(Zinfandel)은 잼처럼 달콤하고 진한 반면, 이탈리아의 프리미티보(Primitivo)는 건조하고 흙 내음이 두드러집니다. 이러한 차이는 와인 선택의 재미를 더합니다.
와인 속 숨겨진 에피소드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Brunello di Montalcino), 전쟁 속 보물
1860년대 이탈리아 토스카나(Tuscany)의 몬탈치노(Montalcino)에서 비온디 산티(Biondi-Santi) 가문은 산지오베제 그로소(Sangiovese Grosso)라는 특별한 클론을 발견합니다. 알이 크고 갈색을 띠는 이 포도는 ‘브루넬로(Brunello)’라 불리며, 장기 숙성으로 깊은 풍미를 내는 와인으로 발전합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이 가문은 독일군의 약탈을 피해 귀중한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Brunello di Montalcino) 와인을 지하실 깊숙이 숨깁니다. 전쟁이 끝난 후, 1945년 빈티지는 기적적으로 살아남아 경매에서 천문학적 가격에 거래되며 전설이 됩니다. 오늘날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Brunello di Montalcino)는 프랑스 부르고뉴(Burgundy)의 로마네 꽁티(Romanée-Conti)에 비견되며, 산지오베제(Sangiovese)의 왕좌로 불립니다. 한 모금에 몬탈치노(Montalcino)의 역사와 열정이 담겨 있습니다.
키안티 클라시코(Chianti Classico), 검은 수탉의 승리
중세 토스카나(Tuscany)에서 피렌체(Florence)와 시에나(Siena)는 키안티(Chianti) 지역의 영유권을 두고 다툽니다. 전설에 따르면, 전쟁 대신 독특한 해결책이 제안됩니다: 새벽에 닭이 울면 각 도시에서 기수가 출발해 만나는 지점으로 경계를 정하자는 것입니다. 시에나는 잘 먹인 흰 수탉을, 피렌체는 굶주린 검은 수탉을 준비합니다. 굶주림에 지친 피렌체의 수탉은 새벽이 오기 전에 울었고, 피렌체 기수는 일찍 출발해 더 넓은 영토를 차지합니다. 이 전설 덕분에 키안티 클라시코(Chianti Classico)의 상징은 ‘검은 수탉(Gallo Nero)’이 되며, 병목에 붙은 이 마크는 산지오베제(Sangiovese)의 자부심을 상징합니다. 와인 한 잔에 중세의 기묘한 이야기가 녹아 있습니다.
비노 노빌레 디 몬테풀치아노(Vino Nobile di Montepulciano), 귀족의 사랑
비노 노빌레 디 몬테풀치아노(Vino Nobile di Montepulciano)는 ‘귀족의 와인’이라는 이름답게 르네상스 시대 토스카나(Tuscany) 귀족들의 사랑을 받습니다. 1685년 시인 프란체스코 레디(Francesco Redi)는 시 Bacco in Toscana에서 “모든 와인 중 비노 노빌레 디 몬테풀치아노(Vino Nobile di Montepulciano)가 최고”라고 극찬합니다. 이 와인은 이탈리아 왕실의 국빈 만찬에서 자주 서빙되었으며, 1961년 영국 엘리자베스 여왕의 이탈리아 방문 시 공식 만찬에 등장해 세계적 명성을 얻습니다. 몬테풀치아노(Montepulciano)의 산지오베제(Sangiovese) 클론, 프루뇰로 젠틸레(Prugnolo Gentile)은 부드러운 타닌과 섬세한 과일향으로 귀족적 우아함을 뽐냅니다. 이 와인은 토스카나(Tuscany)의 고귀한 유산입니다.
와인 구매 시 유의할 점
같은 품종이 여러 이름으로 불리는 와인 세계에서 현명한 선택을 위해 다음 사항을 고려해야 합니다.
레이블을 꼼꼼히 확인합니다: 구세계 와인은 품종명 대신 지역명을 사용합니다. 예를 들어, 샤블리(Chablis)는 샤르도네(Chardonnay), 키안티 클라시코(Chianti Classico)는 산지오베제(Sangiovese) 기반 와인입니다.
국가별 스타일을 이해합니다. 시라(Syrah)와 쉬라즈(Shiraz)처럼 같은 품종도 지역에 따라 풍미가 달라집니다. 프랑스 와인은 우아하고, 신세계(미국, 호주 등) 와인은 과일향이 강하고 진합니다.
클론과 지역의 영향을 고려합니다.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Brunello di Montalcino)는 산지오베제(Sangiovese)지만, 몬탈치노(Montalcino)의 독특한 토양과 기후로 깊고 장기 숙성에 적합합니다.
구체적인 검색 키워드를 사용합니다. “시라 와인” 대신 “노던 론 시라(Northern Rhône Syrah)”나 “바로사 쉬라즈(Barossa Shiraz)”로 검색하면 원하는 스타일을 쉽게 찾습니다.
전문가와 상담합니다. 와인숍이나 소믈리에에게 문의하면 취향에 맞는 와인을 추천받습니다.
이름보다 와인의 본질을 찾아서
같은 포도 품종이 다른 이름으로 불리는 현상은 와인 세계의 복잡함이자 매력의 핵심입니다. 브루넬로 디 몬탈치노(Brunello di Montalcino), 키안티 클라시코(Chianti Classico), 시라(Syrah)와 쉬라즈(Shiraz)처럼 이름은 다르지만, 그 뒤에는 각 지역의 토양, 기후, 그리고 사람들의 손길이 담겨 있습니다. 이름에 속지 말고 지역, 생산자, 양조 스타일을 종합적으로 살펴야 합니다. 와인은 음료일 뿐만 아니라 시간을 초월한 이야기입니다. 한 잔의 와인 속에서 토스카나(Tuscany)의 햇살, 중세의 전설, 귀족의 품위를 느낍니다. 와인은 한 병에 담긴 세상이며, 와인을 마시는 것은 역사와 문화를 탐험하는 여행입니다.
� 이 글은 조동천 저 『또 한 잔의 와인, 또 한편의 이야기』의 일부 내용을 참고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