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을 나누는 시간, 마음을 잇는 이야기

와인 한 잔이 만드는 사람과 사람의 이야기

by 보나스토리

혼자서는 열리지 않는 병

좋은 와인 한 병을 마주하면, 이상한 일이 벌어진다. 병을 열기도 전에, 우리는 이미 누군가를 떠올린다. 함께 마실 사람, 이 순간을 나눌 사람. 혼자 마시기엔 아까운 느낌이 든다. 아니, 혼자 마시면 안 될 것 같은 기분마저 든다.

미국의 저명한 문학평론가이자 에세이스트 클리프턴 페이디먼(Clifton Fadiman)은 이렇게 말했다. "한 병의 와인은 나눠지기를 간절히 바란다. 나는 지금까지 인색한 와인 마니아를 만난 적이 없다." 정말 그렇다. 좋은 와인 앞에서 사람들은 이상하리만치 관대해진다. 아끼고 또 아끼던 빈티지 와인도, 소중히 모셔두었던 한정판 보르도도, 특별한 순간이 오면 기꺼이 코르크를 뽑는다. 그리고 그 순간은 언제나 누군가와 함께할 때다.

와인은 본질적으로 나눔을 요구하는 음료다. 한 병은 750ml, 대략 다섯 잔 정도. 한 사람이 마시기엔 많다. 두세 사람이 나누기엔 적당하다. 마치 와인 자체가 혼자가 아닌 함께를, 고독이 아닌 연대를 전제로 만들어진 것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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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누는 순간 시작되는 대화

와인을 따르는 행위는 단순한 액체의 이동이 아니다. 그것은 일종의 의식이고, 초대이며, 약속이다. "이 시간을 당신과 함께하겠습니다"라는 무언의 선언.

잔을 채우고, 건배를 하고, 첫 모금을 마시는 동안 대화가 시작된다. 와인에 대한 이야기일 수도 있고, 그날 있었던 일일 수도 있고, 오래 묵혀둔 고민일 수도 있다. 중요한 건 와인이 그 대화를 부드럽게 만든다는 것이다.

고대 그리스에서 ‘심포지엄(symposium)’이라는 말은 syn-(함께)과 posis(마시다)가 합쳐진 단어로, 문자 그대로 “함께 마신다”는 뜻이었다. 플라톤의 대화편 《향연》은 바로 이 심포지엄에서 벌어진 철학적 토론을 기록한 것이다. 소크라테스와 그의 제자들은 와인을 나누며 사랑과 미덕, 지혜에 대해 논했다. 와인은 마음을 열게 하고, 진실한 대화를 가능하게 했다.

현대의 철학자 로저 스크러턴(Roger Scruton)은 와인에 대해 이렇게 썼다. 와인은 단순히 생물학적 욕구로 살아가는 삶과, 삶을 선물로 받아들이며 감사하는 삶의 차이를 보여준다고. 와인을 나눈다는 것은 단지 음료를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삶 자체를 선물로 인식하고 그것을 함께 축복하는 행위다.


관대함이 피어나는 순간

좋은 와인은 사람을 관대하게 만든다. 이것은 단순히 알코올의 효과가 아니다. 오히려 와인이 담고 있는 시간과 정성, 그리고 그것을 나누는 행위 자체가 주는 심리적 효과다.

대만의 저명한 수집가이자 미식가인 피에르 첸(Pierre Chen)은 자신의 방대한 와인 컬렉션에 대해 이렇게 말했다. "와인 감상에서 가장 중요한 과정은 나누는 것입니다." 그에게 와인은 소유의 대상이 아니라 나눔의 도구였다. 그는 자신의 와인을 셰프들과 나누며 그들이 직접 음식과 와인의 페어링을 경험하도록 했고, 젊은 소믈리에들에게 교육적 경험을 제공했다.

미국의 철학자 드와이트 퍼로우(Dwight Furrow)는 그의 블로그 'Exploring the Philosophy of Food and Wine'에서 우리의 관대함은 영감에서 비롯되며, 아름다움은 우리를 가장 깊이 움직이는 힘 중 하나라고 말했다. 아름다움은 우리로 하여금 더 나누고, 더 아끼며, 더 정성스럽게 행동하게 만든다. 좋은 와인은 그 자체로 아름답다. 오랜 시간 공들여 만들어진 예술작품이자, 자연과 인간의 협업이 빚어낸 걸작이다. 그 아름다움 앞에서 우리는 자연스럽게 나누고 싶어진다.

값비싼 와인일수록 이 효과는 더 강렬해진다. 역설적이게도 더 귀한 것일수록 사람들은 더 기꺼이 나눈다. 혼자 마시기엔 너무 아깝기 때문이 아니라, 그 특별함을 누군가와 함께 경험하고 싶기 때문이다.


경계를 허무는 힘

와인을 나누다 보면 어느 순간 경계가 허물어진다. 처음엔 조심스럽게 건배하던 사람들이 점차 편안해지고, 형식적이던 대화가 진솔해지고, 거리감이 사라진다.

이것은 단순한 취기의 효과만은 아니다. 물론 알코올이 긴장을 풀어주는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와인을 나누는 행위 자체가 갖는 상징성이 더 중요하다. 같은 병에서 따른 와인을 마신다는 것, 같은 순간을 공유한다는 것, 그 시간을 함께 보내기로 선택했다는 것.

보르도의 전설적인 와인 생산자 크리스티앙 무에(Christian Moueix)는 이렇게 말했다. "음식 페어링보다 더 중요한 것은 함께 와인을 마시는 사람이다." 아무리 훌륭한 와인이라도, 함께 마시는 사람이 없다면 그 가치는 반감된다. 반대로 평범한 와인이라도 좋은 사람과 함께라면 특별한 경험이 된다.

와인 한 병이 다 비워질 때쯤, 테이블에는 웃음이 넘치고 목소리는 높아진다. 이야기는 깊어지고, 위트는 더 재미있어지고, 때로는 눈물도 흐른다. 와인은 이 모든 감정을 허용하고, 안전하게 표현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준다.


선물이 되는 와인

와인만큼 완벽한 선물도 드물다. 초대를 받았을 때, 감사를 표할 때, 축하할 때, 위로할 때. 와인은 언제나 적절하다.

하지만 와인을 선물한다는 것은 단순히 물건을 건네는 것 이상이다. 그것은 "이것을 당신과 함께 마시고 싶습니다" 또는 "이것을 당신이 소중한 사람과 나누셨으면 합니다"라는 메시지를 전하는 것이다.

와인 애호가들 사이에는 이런 말이 있다. "좋은 와인은 두 번 즐긴다. 한 번은 선택할 때, 또 한 번은 나눌 때." 특별한 와인을 고르는 순간의 설렘, 그리고 그것을 누군가와 나누는 순간의 기쁨. 이 두 가지가 합쳐져 와인의 진정한 가치가 완성된다.

와인 생산자의 입장에서도 마찬가지다. 철학자이자 와인 비평가인 드와이트 퍼로우는 와인 제조에 대해 이렇게 말한다. 와인을 만드는 것은 자신의 시간과 노동뿐 아니라 열정과 감수성을 주는 것이며, 와인을 마시는 것은 그 열정과 감수성을 함께 감상하는 것이라고. 와인 한 병에는 만든 사람의 마음이 담겨 있고, 그것을 나눈다는 것은 그 마음을 함께 나누는 일이다.


빈 병이 간직한 기억

와인을 다 마시고 나면 빈 병이 남는다. 어떤 사람들은 이 빈 병을 버리지 않고 보관한다. 특별했던 순간을 기억하기 위해.

빈 병은 단순한 유리 용기가 아니다. 그것은 함께했던 시간의 증거이고, 나눴던 대화의 기록이며, 공유했던 웃음과 침묵의 흔적이다. 라벨을 보면 그날의 기억이 되살아난다. 누구와 함께였는지, 무슨 이야기를 나눴는지, 어떤 기분이었는지.

와인 애호가들은 종종 이렇게 말한다. "빈 와인병은 채워진 병보다 낫다. 그것은 성취를 보여준다." 무엇의 성취인가? 좋은 와인을 마신 성취가 아니라, 그 와인을 누군가와 나눈 성취. 함께한 시간을 완성한 성취.

좋은 와인이 정말 좋은 이유는 그것이 나눔을 부르기 때문이다. 혼자 마시면 그냥 좋은 와인일 뿐이지만, 나누면 이야기가 된다. 그 순간은 와인이 다 사라진 후에도 오래 남는다.


테이블 위의 작은 공동체

와인을 나누는 테이블은 작은 공동체가 된다. 그곳에서는 직함도, 나이도, 배경도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같은 와인을 마시고 있다는 것, 같은 시간을 공유하고 있다는 것.

고대 그리스 철학자들이 심포지엄을 중요하게 여긴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와인을 함께 마시며 나누는 대화는 단순한 수다가 아니라, 서로의 생각을 이해하고 공감하며 새로운 통찰에 이르는 과정이었다. 와인은 이 과정을 촉진하는 매개체였다.

현대 사회에서도 마찬가지다. 와인 한 병을 사이에 두고 앉으면, 낯선 사람도 금방 가까워진다. 첫 잔을 따르며 인사를 나누고, 두 번째 잔에서 이야기가 깊어지고, 세 번째 잔쯤 되면 오래 알던 친구처럼 편해진다.

이것이 와인이 가진 마법이다. 단순히 취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사람과 사람 사이의 거리를 좁히고, 진정한 연결을 가능하게 한다. 와인 생산자들이 자신의 와인을 "나누기 위해" 만든다고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나눔으로 완성되는 와인

결국 와인은 나눠질 때 비로소 완성된다. 아무리 훌륭한 와인이라도 병 속에만 있다면 그저 잠재력일 뿐이다. 코르크를 뽑고, 잔에 따르고, 누군가와 나누는 순간, 와인은 진정한 의미를 갖게 된다.

좋은 와인은 좋은 사람을 부른다. 그리고 좋은 사람들은 그 와인을 나누며 더욱 가까워진다. 와인 한 병이 다 비워질 때쯤, 테이블에는 그저 잔을 비운 사람들이 아니라, 무언가를 함께 나눈 사람들이 앉아 있다.

빈 잔을 들여다보며 우리는 깨닫는다. 와인의 진정한 가치는 병 속에 담긴 액체가 아니라, 그것을 나누는 과정에서 만들어지는 순간들에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 순간들은 와인이 다 사라진 후에도, 우리의 기억 속에 오래오래 남는다는 것을.

좋은 와인이 부르는 나눔. 그것은 단지 음료를 공유하는 것이 아니라, 시간과 마음과 삶을 나누는 일이다. 그리고 그렇게 나눈 순간들이 모여, 우리의 삶을 더욱 풍요롭게 만든다.



참고 서적《와인에서 빚어지는 삶의 지혜》조동천 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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