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말문이 꽤 늦게 터진 아이였다. 엄마 말로는 네 살이 될 때까지 말을 못 했다고 했다. 할머니는 어릴 적 열병을 앓은 후 청각 기능이 떨어져 말을 잘하지 못하는 외삼촌의 아들을 들먹이며 유전이라도 되는 양 엄마 탓을 했다고도 했다. 내가 성인이 되어 그 얘기를 들었을 땐 내가 말이 많이 늦었구나 하는 생각과 가뜩이나 힘든 시집살이에 속앓이가 심했을 엄마의 마음을 헤아려보는 정도였다. 그러다 나도 아이를 낳고 기르며 두 돌만 지나도 말문이 터지는 게 순리라는 것을 체감하고 나니 당시 엄마의 심정이 어땠을지 구구절절 와닿았다. 네 살까지 말을 안 한다니 누가 봐도 발달 상 문제가 있는 게 틀림없어 보였을 테다. 동네 아주머니들은 나를 앉혀놓고 뒤에서 이름을 부르고 반응을 살폈다. 호명했을 때 돌아보고 눈을 맞추니까 장애가 있는 건 아니라며 엄마를 안심시켰다고 했다.
다행히 네 살이 되어 말문이 트였지만 말을 심하게 더듬었다. 특히 첫 음절 반복이 심했는데 예를 들어 “주스를 주세요.”라는 말을 할 때 “주스”라는 말이 입에서 잘 안 떨어져 “ㅈㅈ즈주스”라고 하는 식이었다. 유치원에 다닐 때도 말을 거의 하지 않는 조용한 아이였고 초등학교에 입학해 중학년 정도 되었을 때야 제법 말을 하고 친구를 사귀었다. 학교 친구들은 내가 말을 더듬는다는 걸 잘 몰랐다. 말을 거의 안 했으니까. 놀림을 당할까 봐 말을 안 한 것도 아니었고 원래 나의 천성이 그랬다.
조금씩 성장하며 말을 더듬는 정도가 덜해졌고 이제는 말하기에 대한 관심이 커졌다. 내향적인 데다 말수도 적다 보니 낯선 사람과의 대화가 참 어색하고 어렵다. 일단 시원스럽게 뱉고 보는 게 아니라 머릿속에서 예쁜 구슬 고르듯, 주름진 옷감을 말끔하게 펴듯, 해야 할 말을 고르고 또 골라 완성된 문장을 만들어 본다. 상대방의 입장과 마음을 배려하며 신중하게 말하는 게 어느새 습관이 됐다. 가급적이면 기분 좋은 단어를 골라 긍정적으로 말하기. 말의 어조도 편안하고 따뜻해야 한다. 화살을 꽂듯 찌르는 듯이 직선적으로 말하는 게 아니라 예쁜 포장지에 말을 싸서 동글게 포물선을 그린다. 상대의 마음에 선물을 놓듯이 말이다.
이제 말을 더듬는 일은 없지만 그래도 사람들 앞에서 말을 하면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가 없다. 천천히, 한 마디, 한 마디, 진심과 체온을 담아 말을 하지만 그래도 여전히 말보다 글로 쓰는 게 마음이 더 편하다. 그러다 보니 언제나 화자를 자처하기보다 묵묵히 경청하는 청자의 자리에 앉는다. 입이 아니라 귀로 소통하는 셈이다. 상대의 눈과 미간을 바라보며 온몸의 감각을 예리하게 세우고 흡수하듯 이야기를 듣는다. 집중하며 잘 듣고 있다는 표시로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아”, “네” 같은 취임새를 적당히 하는 것도 잊지 않는다. 다만 적극적인 경청을 할 때의 힘든 점은 방전이 빠르다는 것이다. 신경을 곤두세워 듣다 보니 금세 피로해진다. 예민한 감각으로 상대의 표정과 어조를 느끼고 그에 맞춰 반응하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일이기도 하다. 사람들을 만나 소통할 때마다 나의 집중력과 에너지를 신속하게 충전해 줄 휴대용 보조 배터리 같은 게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상상해 본다.
마음이 여리고 예민해서, 말을 더듬었던 어린 시절이 있어서 말을 잘하고 싶은 어른이 됐다. 또박또박 천천히 말하기, 온기를 담아 따뜻하게 말하기. 매일 실천하는 나만의 말하기 비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