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년 10월 3일.
피터를 납치했다. 너무 쇠약해진 피터는 박스로도 잡을 수 있는 상태였다. 그렇게 병원에 갔다. 내가 결심만 하면 될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상태는 더 안 좋았다.
병원에서는 궤양이 목까지 퍼졌다고 했다. 유의미한 수술은 아니었다.
2024년 10월 9일.
피터가 퇴원했다. 강한 진통제를 잔뜩 받았다. 병원에서 밥을 거의 먹지 않았다던 피터는 퇴원한 이래 내가 내미는 약밥을 아주 잘 먹었다. 그에게는 그 작은 빌라 주차장이 가장 마음 편한 보금자리였던 것 같다. 그가 살아온 곳에서 숨을 거두길 바랐다. 그를 위한 호스피스 공간이 없기도 했지만, 무엇보다 그는 인간을 좋아하지 않았다. 싫어하는 것에 가까웠다. 3년 동안 나는 피터와 닿아본 적이 없다.
약밥을 내미는 족족 먼저 화를 내고 먹었다.
약밥과 깨끗한 물을 주기 위해 장거리를 오갔다. 한 번씩 상태가 나빠지기도 했지만 삐쩍 말랐던 피터는 살이 붙었고, 털에 윤기가 흘렀다. 그렇게 우리는 한파를 견뎠고, 봄을 보내고, 여름이 왔다. 그 사이 나는 그 동네에서 돌보는 동물의 수와 깊이가 말 그대로 주렁주렁 늘어났다.
6월의 어느 시기부터, 피터는 내가 내미는 약밥을 더는 먹지 않았다. 으레 더워지면 길고양이들의 사료 섭취량은 줄어든다. 그 때문인지, 어디가 아픈 것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내가 내미는 약은 잠시 상태가 좋아지는 약이었다. 피터도 알았을 것이다. 하루, 이틀, 삼일에 한 번 불쑥 나타나는 내가 내미는 약밥을 먹고 나면 그날은 통증이 줄고, 컨디션이 조금은 나아졌음을.
피터가 약밥을 거부하기 시작한 후 상태는 빠르게 나빠졌다. 앞에 놓인 그 약밥이 뭔지 8개월의 만남을 통해 피터는 알고 있었을 것이다.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 피터는 주차된 트럭 위에서 침을 흘리며 나를 똑바로 보았다. 나는 약밥을 고집스레 내밀고, 그는 자리를 조금 옮기고, 나는 다시 권했다.
먹어야 안 아파.
피터의 눈빛은 단호했던 것 같다. 그만이라고 말하는 것 같았다.
음식을 입에 넣고 이로 씹어서 삼키는 행위는 당사자만 할 수 있으며 타인이 대신할 수는 없다. 끼어들고 싶어도 어쩔 수 없는 영역이 존재하는 것이다. 최후의 주체가 있음을 느꼈다.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먹을까’ 혹은 ‘먹지 않을까’하는 의사를 확인하는 것이 아니었다. ‘먹지 않는다’는 것을 알면서도 밥을 짓고 할머니에게 밥상을 차려주었다. (중략) 할머니는 ‘먹지 않겠다’는 선택을 이어갔다. 올바른 것도 그릇된 것도 아니었다. 받아들인다거나 받아들이지 않는다고 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다. 긍정도 부정도 할 수 없는 세계가 있는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다. 할머니는 따님이 지켜보는 가운데 죽었다.
『돌봄, 동기화, 자유』
작년, 피터를 박스로 납치해 병원에 데려가지 않았다면 피터는 며칠 안에 숨을 거두었을 것이다. 나의 개입은 피터의 통증을 조금은 줄였겠지만 시간을 늘렸다. 8개월.
그 시간 동안 피터에겐 친밀한 관계가 생겼고, 풍족한 음식, ‘길고양이 치고는’ 안락한 잠자리를 가졌다.
그렇지만 내내 아팠을 것이다. 진통제는 일시적이고, 진통제를 먹지 않은 날이 더 많았던 8개월이었다.
피터를 돌보느라 일상이 무너지면서, 생각보다 ‘오래 버티는’ 피터를 보며 마음이 복잡했다. 피터를 처음 본 이래, 나는 한결같이 피터가 빨리 숨을 거두길 바랐다. 매번 피터에게 약밥을 내밀면서도, 복잡한 마음이었다. 긴 간병, 나아지지 않는 상태, 고통스러운 환자.
이런 끝이라는 걸 알고 있었기에 피터의 상태를 처음 들었을 때, 안락사를 고민했다. 동물 안락사는 어쩌면 간병 살해인 걸까. 아픈 것을 지켜보고 싶지 않았다.
27일, 30일, 7월 4일. 피터를 세 번 연속 만나지 못했다. 집 안에 깔아 두었던 배변패드에는 침, 오줌, 피 같은 것이 묻어있지 않았다. 내가 새로 깔아 둔 그대로였다. 6월 27일부터 피터는 이 집에 들어온 적이 없었다. 피터의 시신을 찾아보았지만 없었다.
피터는 사라졌다. 피터의 마지막을 상상하고 준비했다. 집 안에 죽어있을 피터의 시신을 수습하는 것. 이런 엔딩은 예상 밖이었다.
오랜 투병 끝에 안락사를 부탁했던 별이 때와 다른 선택을 했지만, 그때도 이번에도 옳았다는 확신은 들지 않았다.
7월 4일, 여전히 깨끗한 집 안의 배변패드. 피터가 물을 마셨다면 침으로 걸쭉하고 누레졌어야 할 물그릇은 꽤 깨끗한 상태로 있었다.
그리고 피터처럼 침을 흘리는 또 다른 고양이를 만났다. 돌보던 동물이 떠난 자리에는 신기하게도 곧바로 다른 동물이 자리를 채운다.
어둠 속에서 씽씽을 본 것 같았다. 언어가 통한다면 피터에 대해 물어보고 싶다. 늘 내가 부고를 전하고 싶다는 입장이었는데, 반대가 되었다.
그리고 이번에도 무거운 죄책감이 남았다. 간병 노동으로부터 해방되었다는 감각 때문이다. 피터의 삶을 애도하는 마음과 함께 가벼워진 어깨.
반려동물과 함께 한 사람들이 좋아하는 말이 있다. 보호자가 죽으면 먼저 간 반려동물이 천국에서 마중 나온다는 뭐 그런 아름다운 이야기.
별이를 떠나보내고, 몇 달 간 심리상담을 받았다. 별이를 만나게 되면, 별이가 나를 외면할 것 같다고 펑펑 울었다. 7월 2일은 별이의 생일이었다. 이제는 덤덤해진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