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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앳원스

너의 우주, 그리고 나의 우주

by 채이

현재에 집중하지 못하고 과거에 대한 후회나 미래에 대한 고민에 사로잡힐 때가 더러 있다. 이런저런 생각들로 어영부영 시간을 보내다 보면, 시간이 훌쩍 흘러 밤늦게 잠든 적도 있었다.


그때 이 선택을 했더라면, 그때 그 선택을 하지 않았더라면, 나는 더 나았을까?


바쁜 일상 속 문득문득 떠오르는 과거는 빠르게 미련 철철, 후회 가득한 감정을 쉽사리 차오르게 한다.


그리고 다니엘 콴의 영화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앳원스>이 익숙한 감정—후회—를 향한 태도에 관한 하나의 길을 아주 성의 있게 제시한다. “다르게 살았다면 어땠을까?”라는 뻔하고 미련한 질문에, 영화는 뜻밖에 다정한 대답을 건넨다.

첫 장면은 엉망진창인 에블린의 일상으로 시작한다. 세탁소의 뒷문, 산더미 같은 영수증과 어질러진 집, 거동이 불편한 권위적인 아버지와 딸의 여자친구, 세금 감사와 남편의 이혼 신청서, 고장 난 세탁기까지. 괴물이나 지진, 세계 종말 같은 거창한 재앙이 아니라도, 에블린의 일상은 턱턱 숨이 막힌다.


영화는 이 휘청거리는, 불만 가득한 일상을 별안간 펼쳐지는 다중우주와 연결시킨다. 세무조사를 받으러 가는 도중, 평소와는 전혀 다른 남편 웨이먼드가 나타나 다중 우주의 존재를 알린다.


그가 에블린에게 낯선 기계를 씌우자, 엘리베이터 문에 그녀의 일생이 주마등처럼 펼쳐진다. 출생부터 웨이먼드와의 만남, 미국으로의 이민, 임신과 출산까지—특별할 것 없는 에블린의 일생. 에블린은 그 파노라마에 빨려가듯 눈을 떼지 못하고, 웨이먼드는 장치 사용법을 휘갈겨 적는다. 엘리베이터 문이 다시 열리자 그는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다시 예전의 표정으로 서 있다.


“필요한 능력을 가진
다른 우주로 점프할 수 있어. “


에블린은 장치를 작동시키는 법을 익히고, 다중 우주의 ‘다른 나’들과 마주한다. 셰프, 액션 배우, 손가락이 소시지인 세계의 나까지. ’별 볼 일 없는‘ 그녀와는 달리 각자의 자리에서 특별하게 살아가는 다양한 ‘나‘의 모습. 일상의 여러 가지 선택은 매번 다른 결과를 낳아 무수히 많은 우주를 만들고, 각각의 우주 안에 다채로운 에블린이 존재한다.

웨이먼드는 에블린이 거대 악 ’조부 투파키‘와 맞서 싸울 것을 종용하지만, 에블린의 시선은 다른 것을 본다. 무수히 많은 ’나‘의 수많은 ‘가능성’이 그녀 앞에 온다. 처음에 그것들은 ’후회의 목록‘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러 다중우주의 능력과 이어진 에블린은, 이제 프로레슬러와도 맞설 수 있다.


세무서 복도에서, 주방 한가운데서, 계단참 모서리에서—각각의 에블린이 현재의 에블린을 밀어 올린다. 다중우주 속 다른 삶의 모습은 ‘내’ 삶을 깎아내리는 증거가 아니라, 품고 있던 가능성의 지도이다.


세금 감사와 이혼 위기라는 생애 최악의 순간, 에블린은 다중우주 속 ‘나일 수도 있었던’ 수많은 자신과 마주 선다. 세탁소가 세상의 전부인 줄 알았던, 삶의 무게를 혼자 삼키기만 하던 에블린은 사실 원하는 무엇이든 될 수 있었음을 깨닫는다.


뭐든지 해낼 수 있는 나. 단 하나로 고정되어 있지 않은 나. 웅크리지 않고 다른 선택을 했더라면 열렸을 새로운 인생들.

세탁소 카운터에 멍하니 앉아 하루를 감내하던 에블린의 모습은, 일상의 반복에 갇혀 나아가지 못한다고 느끼는 수많은 우리들의 모습과 겹쳐진다. 시시하지만, 지독한 매일의 고민거리들. 그에 대비되는 스크린 속 누군가의 빛나는 얼굴.


에블린의 영수증 더미처럼 해야 할 일에 파묻혀 발이 묶였다고 느낄 때면, 다중우주 어딘가에 존재할 또 다른 ‘내 모습’을 떠올린다. 절체절명의 순간에도 에블린은 다른 우주의 에블린에게서 가장 필요한 능력을 건네받는다. 그렇다면 지금 여기의 나 역시, 오늘 하루를 조금은 다르게 선택할 수 있지 않을까?


나의 우주, 너의 우주, 우리의 우주. 무한한 우주 속 내가 될 수 있는 모습은 결코 단 한 가지는 아닐 것이다. 다른 우주의 내가 했다면, 나의 우주도 가능하다.


‘나’를 고정하던 핀을 조심스레 뽑아 들고, 또 다른 나를 바라볼 때다. 손가락이 소시지인 ‘나’마저 있다면, 우리는 바라는 무엇이든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 에블린의 다중우주가 우리에게 미소를 보낸다.




작가의 말: ‘후회의 목록’을 ‘가능성의 지도’로 접어보려 했습니다. 당신의 ‘다른 우주’는 어떤 모습일까요?

<에브리띵, 에브리웨어, 올앳원스>는 제가 참 애정하는 작품입니다. 2편(다정함의 고찰)으로 돌아올게요!


사진출처: 영화 스틸컷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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