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 시대에 셋째 출산을 싱가포르에서 하기로 마음을 먹은 후 걱정이 가득했다. 무엇보다 싱가포르엔 산후도우미는 많지만 산후조리원이 없기 때문이었다. 출산 후 2박3일을 병원에서 보내고, 산후조리원에서 첫째는 2주, 둘째는 10일 보냈었다. 태어나자마자 신생아를 24시간 케어한 경험이 없었던 나는 덜컥 겁이 났다. 배꼽도 때지 않은 아이를 어찌 관리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이었다. 밤에도 계속해서 한두시간 단위로 깰지도 모를 신생아를 잠들면 아무소리도 못듣는 남편과 함께 잘 돌볼 수 있을까? 내 산후조리는 누가 해주지? 출산 직후 띵띵 부어 있었는데 산후부종이 빠지기까지 아이셋과 함께 집에 있을 수 있을까? 아들 둘이 뼈도 약한데 올라타면 어쩌지? 난 하루에도 여러 번 한국행을 택하고 싶었다.
한 줄기의 빛, 싱가포르에 럭셔리 산후조리원이 생겼다고 한다. 남편이 우연히 접한 뉴스기사는 나에겐 희망을 줬다. 출산이 얼마 남지 않을 무렵 열심히 검색한 결과, 싱가포르에는 세 군데의 산후조리원이 있었다. 첫 번째는기사를 통해 처음 알게 된 곳으로, 집에서 가까웠기에 최종적으로 선택하게 되었다. 두번째는 중국식 산후조리원은 생긴지 얼마 안되어서 프로모션 중이었으나 이미 첫 번째 산후조리원을 계약하고 늦게 알아서 패스, 마지막 세 번째 또한 중국식 산후조리원이었는데, 이는 산후도우미 업체랑 연관되어 있었는데, 28일 있어야 한다고해서 패스, 한달동안 아이들을 안보기는 불가능 하였다. 결과적으로 첫번째 럭셔리 산후조리원만 방문 해보았고, 비용적인 측면에서는 한국에서보다 훨씬 더 가격이 나갔으나, 매일 미역국을 해준다고 하여 바로 그곳으로 정했다. 딱 일주일만 짧고 굵게 나를 위해 지내다 오는 것으로. 정말 아무생각 말고, 푹 제대로 쉬고 오는 거로. 오랜만에 밤잠도 푹 자고말이다.
그건 나의 망각으로 인한 착각이었다. 신생아가 있는 산모가 어찌 푹 쉴 수 있다고 생각했을까? 조리원 생활 내내 또 모유수유에 온 힘을 쏟고 있는 나 자신을 발견하고 있었다. 그 전 조리원 생활은 답답함 가득함이라 마치는 날까지 뛰쳐나가고 싶어서 곤욕이었는데, 이번에는 몸은 편하지만 날마다 눈물로 지새우는 첫째 덕분에 마음이 불편했다. 아이는 하루에도 몇번 엄마를 만나기 위해서 몇밤을 자야 만날 수 있을지에 셈하며 손꼽아 기다렸다. 매일 밤 1시간도 넘게 영상통화도 했지만 울면서 잠들었다. 더군다나 아이들 때문에 남편과 떨어져 있으니, 그것도 나의 심심함과 외로움에 한몫하였다. 전엔 조리원 와서 남편이 나대신 조리하는지 생각이들어 얄미웠는데, 이번엔 그가 없으니 아쉬웠다. 게다가 집에서 끓인 미역국 배달, 그 밖에도 아이들 픽업과 방과 후 육아를 하느라 당연한 거지만 고생하는 것 같아서 짠함 가득하였다. 그동안 안 했던 걸 하는 거라 고맙기도 하고, 나의 노고를 조금이라도 알 수 있을 것 같아서 다행이라 생각하기도 했다. 육아에 지쳐 항상 조리원에서 미역국 배달와서는 낮잠만 자고 가는 모습을 보며 안타까웠지만, 서운하기도 했다.
처음 조리원으로 향한건 피곤할 대로 지쳐서였다. 모자동실인지 모르고 출산직후 회복실에서부터 아이를 신생아실로 안데리고 가고, 낮에도 내내 왜 계속 아이가 내 옆에 있는것일까의 의문만 품은 채, 병원 2박 3일 내내 모자동실의 생활을 남편없이 홀로 한 후였다. 출산 후 아이는 신생아실에서 맡아줄지 알았는데 여긴 또 달랐다. 밤 10시에 겨우 신생아실로 보낸 아이를 첫날은 새벽 2시, 5시, 둘째날은 새벽 1시, 4시에 계속해서 데려와 모유수유를 시도하는지라 거부할 수도 없었다. 게다가 여기 싱가포르는 모유수유를 선호하여 우리처럼 젖이 안돌때는 분유를 먹이는 게 아니었기에, 나의 모유수유로의 항해는 계속되었다. 더불어 수시로 나의 몸상태를 점검하러 드나드는 간호사 덕분에 난 밤샌 것처럼 멍한 기분이었다. 정말 한 시간을 풀로 쭉 잠든적이 없는듯한 느낌이었다. 그래도 약 10분정도의 거리밖에 안되었지만, 조리원에서 보내준 편안한 리무진과 아이 카시트는 편안하게 조리원으로 입실할 수 있었다.
처음 한국인 산모를 맞는 조리원은 마치 신혼여행의 호텔처럼 우리 부부와 아이를 반겨주었다. 조리원 입성 후 웰컴 사진까지 찍으면서 우리는 셋째딸과의 시간을 만끽했다. 고급호텔 같은 기분에, 싱가포르식 산후조리 방식인 한방 사우나식 목욕을 할 수 있는 공간까지 구비되어 있었다. 아이 둘을 한겨울에 출산한지라 처음 28도의 보일러가 빵빵한 곳에서 땀 흘리며 조리를 했는데, 여긴 시원한 에어컨이 있는 곳이라 좀 달랐다. 뭔가 뜨끈하게 지져야 할 거 같은데. 그래도 침대의 이불과 구비되어 있는 두툼한 가운은 따뜻했고, 냉장고에 매번 채워주는 음료수는 시원했다.
신생아실은 24시간 CCTV 카메라로 언제든 아이의 상태를 볼 수 있었고, 어디서나 멀리서 아이 우는 소리가 들릴 때면, 휴대폰으로 우리 아이를 확인했다. 수유 콜이 없는 곳이라, 아이가 울면 방으로 데려다주는 시스템이었고, 원하는 시간 동안 아이와 함께 할 수 있었다. 그전엔 2시간 단위로 수유 콜을 받는가 싶어서 정말 조리원 생활 자체가 쉼이 없었는데, 이번엔 쉴 수 있을 것 같아서 마음이 편했다. 아이가 배고파서 울면 분유를 먹여도 된다고까지 얘기해놓았다. 그렇지만 난 어느새 종일 아이를 데리고 있었다. 젖을 먹다 지쳐 잠들어서 계속 내 옆에서 잠들어 있어서 나도 함께 쉴 수 있었다. 엄마 품이 포근한지 너무 자서 어째야 하나 싶었는데, 아이는 계속해서 모유 수유를 하면 이내 잠들었다. 그러고는 아이는 점점 노래져 갔다. 인정하고 싶진 않았지만, 황달이 찾아왔다. 병원 검진에서 아이가 잘 먹으면 황달이없어진다고 하여, 그 후로는 모두 다 유축해서 젖병으로 모유를 먹였다. 잠시 아이와의 거리를 두니, 아이는 다시 포동포동해지며 하얘져 갔다. 그리고 모든 엄마의 바램인 황금 똥을 보며 뿌듯했다. 덕분에 간만에 푹 쉬었던 마지막 이틀이었다. 그리고 황달은 사라져갔다. 쉼 뒤에는 엄마를 일주일이나 못 본 두 아드님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난 전투의 세계로 들어가기 전에 마지막 쉼이라도 갖듯, 잠속으로 빠져들었다.
유일한 요청이었던 미역국 때문인지 나의 국에는 미역이 조금씩 들어가 있었다. 어느날은 조금은 특이한 소스를 가미한 된장국에 미역이 들어가기도 했다. 나랑 맞지 않은 음식을 먹지 않으면 바로 맞춤식 식사도 고쳐줬다. 처음엔 나오는 미역국인지 모를 요리가 맞지 않아 집에서 미역국을 공수받아 배고플 때 먹었는데, 어느 순간 한국 셰프를 초빙하여 미역국을 전수 받았다고 한다. 덕분에 끝나는 날까지 맛있는 미역국을 매끼 함께할 수 있었다. 더불어 백김치도 반찬에 올라왔다. 갑자기 한국 셰프와 미팅을 하자 했지만, 조리원서 너무 오버하는 것 같아서 거절했다. 매번 나의 남긴 식사를 보고는 연구하는 것 같아 약간 당황할 때도 있었지만, 세심한 캐어에 감동도 받았다. 음식은 호텔식사처럼, 한국 조리원 식사처럼 정갈하게 나왔다. 모유 수유에 좋은 간식과 차도 챙겨줬다. 젖 돌게하는 쿠키를 남편이 모르고 먹어 당황할 때도 있었다. 음식 자체가 한 폭의 그림 같았다. 무엇인가 각 나라의 산후조리 음식을 먹는 기분이라 신선했다.
보통 조리원에서 모유 수유를 도움을 받았었다. 전문가분들이 있으셔서 뭔가 힘든 상황이 생길 때마다 SOS를 요청했다. 그렇지만 모유 수유 권장 나라인 싱가포르지만 조리원에선 모유 수유에 대한 특별한 도움을 받기는 힘들었다. 산모들이 다 수유실에 앉아 가슴을 드러내놓고 보여주는 일은 없었다. 홀로 방안에서 사투해야 했다. 그나마 아들 둘 완모를 했던지라 경험은 있었어도 모유 수유는 언제나 어려웠다. 조리원서 여유롭게 책도 읽으며 쉼의 삶을 가지려 했는데 난 또 공부했다. 모유 수유를 어떻게 하면 편하게 시작할 수 있을까 하고 말이다. 첫째는 쓰디쓴 유두 상처로 고생했고, 둘째 때는 점점 딱딱해지는 유방울혈로 당황했던지라, 셋째는 당황하지 않고 공부했고, 불어나는 가슴에 놀라, 아직 제대로 나오지도 않는 모유를 나오게 하고자 열심히 유축 하면서 나의 손가락을 혹사하지 않았다. 타이레놀 한 알과 함께, 전문가분들이 올려놓은 모유 수유의 과정에 따라 나의 상황을 대입해보며 생각했다. 결론은 시간이었다.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주었다. 젖이 풀리는 과정이 지나가고, 점차 유선이 뚫려갔다. 그리고 나의 세 번째 완모생활이 시작되었다.
싱가포르는 이제 조리원이 생겨나서 그런지 아직 어설픈 점은 많았지만, 모유 수유의 전투에 참여하지 않아도 돼서 그런지 쉼의 하루가 있었던 것 같다. 뭐든지 자연스럽게 하는 것이 좋은 것, 나에겐 여유도 생겼다. 두고 온 아이 둘 덕분에 매일 밤 눈물바다여서 당장 나가고 싶었지만, 그래도 나에겐 밤잠도 허락되었다. 푹 자고 일어난 산뜻한 아침에 창문으로 들어오는 따사로운 햇살은 행복했다. 그리고는 몸은 편했지만, 마음은 불편했던 조리원은 짧고 굵게 퇴소하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껏 아이가 백일이 되도록 한 번도 경험하지 못했던 조리원 애프터서비스까지 받고 있다.
집으로 돌아왔다. 몸은 힘들지만, 마음은 편했다. 아들 둘은 엄마를 만나고 웃음꽃이 피었다. 나도 그랬다. 누군가의 도움을 받고자 했으나, 코로나로 인해 산후도우미 인력이 입국을 못 해 인력 제한이 있는지라, 벼락치기로 구하려고 한 나의 실수 덕분에 산후도우미도 못 구했다. 결국 조리원 퇴소 후 난 남편과 합심하여 셋째 신생아를 키워나갔다. 코로나로 재택근무가 필수인 덕에 남편의 육아 참여는 아이가 백일이 넘도록 계속되고 있다. 아이가 처음 배꼽이 떨어지는 것도 직접 경험하였고, 남편의 신생아 목욕은 적극 참여를 보며 고마웠다. 너무나도 잘 자서 걱정될 정도였지만, 지금을 즐기라는 얘기에 낮에도 잘 자고, 일찍부터 통잠을 자는 아이를 보며 감사하다. 셋째 딸이 본인만 보면 까르르 웃는다고 딸바보에 등극한 남편을 보면서도 웃음 짓는다. 이 순간, 이 하루가 나에겐 행복이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