씨네아카이브 47. 스파이의 세계
언제나 로맨스를 가장 좋아한다고 이야기하지만, 마음 깊은 곳의 0순위는 다른 장르가 아닐까 싶을 만큼 추리 영화나 첩보 영화도 즐겨 본다. 극 중 인물과 함께 치열한 두뇌싸움을 벌이는 영화가 볼 때는 힘들지만 숨겨진 단서를 발견했을 때, 혹은 추리가 들어맞았을 때의 카타르시스 역시 크달까. 이번에 소개할 영화는 ‘진짜 스파이의 세계란 이런 것이다’를 보여주는 작품들로 골라봤다.
존 르 카레가 그린 스파이의 세계
‘첩보 영화’하면 제임스 본드의 007 시리즈, 에단 헌트의 미션 임파서블, 제이슨 본의 본 시리즈를 꼽는 이들이 많지만 나는 이번에 소개할 작품들을 보며 제임스 본드와 에단 헌트 그리고 제이슨 본은 환상(?) 속에서만 존재한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게 됐다. 바로 존 르 카레의 원작 소설을 영화환 작품들! 존 르 카레(John Le Carré)는 ‘007 시리즈’를 탄생시킨 이언 플레밍과 함께 영국을 대표하는 첩보 소설가로 실제 냉전 시대에 영국 비밀정보국에서 요원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그러나 일련의 사건으로 신분이 탄로 나면서 첩보 요원으로서의 생명이 끝나게 되자 완전히 소설가로 전향했다. MI6 요원일 때도 소설을 발표했기 때문에 존 르 카레는 그의 필명이기도 하다.
존 르 카레의 작품은 굉장히 사실적이라고 평가받는데 첩보물에서 기대하는 화려한 액션은 거의 없기 때문에 그의 작품을 원작으로 한 영화 역시 박진감 넘치는 장면은 보기 힘들다. 존 르 카레는 이념이 첨예하게 대립했던 냉전 시대에 개인이 느끼는 무기력함에 초점을 맞추고, 첩보 활동을 하면서 겪는 윤리적 혼돈이나 고독을 드러내는데요. 그의 작품 속 스파이 들은 옳고 그름이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 직업에 대해 고뇌하는 인물이 많다. 가장 대표적인 캐릭터가 ‘조지 스마일리’로 첫 작품을 시작으로 『추운 나라에서 온 스파이』와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 등에 연이어 등장하는 이언 플레밍의 제임스 본드와 같은 캐릭터. 조지 스마일리는 신중함, 민첩함, 추리력을 고루 갖춘 스파이 소설 역사상 가장 현실적이면서도 지적인 캐릭터로 평가받는다.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Tinker, Tailor, Soldier, Spy)>, 토마스 알프레드슨, 2011년 개봉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는 영국 비밀정보국에 침투한 러시아 스파이 ‘두더지(mole)’를 가려내기 위해 치열한 두뇌 싸움을 펼치는 과정을 그린 존 르 카레의 소설을 영화화한 작품. 로맨스 명가로 불리는 워킹타이틀에서 제작했고 게리 올드먼, 콜린 퍼스, 마크 스트롱, 베네딕트 컴퍼배치, 톰 하디, 키어런 하인즈, 존 허트 등 영국의 내로라하는 배우들이 대거 출연하며 어마어마한 캐스팅을 선보인 작품이기도 하다. 영화는 아카데미에서 각본상과 남우주연상에 노미네이트 되었고, 영국 아카데미(BAFTA)에서는 최고의 영국 영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처음 영화화가 논의 중일 때 박찬욱 감독이 연출자로 물망에 올랐었다고 하는데 최종적으로는 토마스 알프레드슨이 연출을 맡았고, 이후 박찬욱 감독은 존 르 카레의 작품을 드라마화한 BBC 시리즈 <리틀 드러머 걸>의 연출을 맡았다. 제목인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는 영국의 전래동요에서 따온 것으로 팅커(Tinker, 땜장이), 테일러(Tailor, 재단사), 솔저(Soldier, 군인), 세일러(Sailor, 선원), 리치맨(Rich man, 부자), 푸어맨(Poor man, 가난뱅이), 베거맨(Beggar man, 거지), 시프(Thief, 도둑) 순으로 자신의 미래를 예측하여 부르는 노래라고. 영화에서는 비밀 정보국 국장이 러시아 스파이를 가려내기 위해 체스 말에 스파이로 의심되는 간부들의 사진을 붙여두고 순서대로 코드네임을 부여하는 것으로 표현되었다.
원작 소설을 집필한 존 르 카레는 케임브리지 스파이로 유명한 ‘킴 필비’와 KGB 스파이 ‘조지 블레이크’에게서 영감을 얻어 작품을 집필했다고 하며 킴 필비는 수려한 외모에 엘리트 코스까지 밟은 영국의 인재로 아무도 그의 정체를 의심하지 않았으나 이후 소비에트 연방의 이중간첩으로 드러났고, 존 르 카레 역시 그로 인해 신분이 노출되어 MI6활동을 그만두게 되었다.
영국 비밀정보부 요원 조지 스마일리는 러시아 스파이 색출 작전이 실패한 여파로 인해 강제로 은퇴하게 되지만, 본부로부터 다시 비밀 작전을 맡아 달라는 요청을 받는다. 한편 러시아 고위 장교 감시 임무를 맡은 MI6현장 요원 리키 타르는 서커스로 불리는 MI6 고위급 간부 네 명과 정보부장을 포함한 고위 관료 중 한 사람이 러시아의 스파이임을 알게 되고 이를 본부에 알리려 한다. 리키 타르를 만나게 된 조지 스마일리는 어제까지 동료였던 이들을 상대로 자신의 임무를 들키지 않고 스파이를 가려내기 위해 작전에 돌입하게 된다.
영화는 플롯이 복잡해 따라가기 쉽지 않다. (나는 세 번째 감상 끝에 영화의 전체적인 흐름을 이해할 수 있었다...) 스파이로 의심되는 네 명의 인물인 팅커, 테일러, 솔저, 그리고 푸어맨에 대한 묘사와 이를 밝혀내기 위한 조지 스마일리의 고뇌, 스파이 때문에 죽을 위기를 겪고 배신당한 요원 짐 프리도의 이야기가 현재와 과거를 오가며 이어지기 때문에 한순간이라도 집중력이 흐트러지면 흐름을 따라가기 쉽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첩보 영화 하면 <팅커 테일러 솔저 스파이>를 가장 먼저 떠올릴 만큼 정말 흥미진진하게 본 작품이기도 하다. 무엇보다 첨단 장비를 내세운 화려한 액션 신 없이도 적절한 긴장감과 극의 몰입도를 이끌어낸다는 것이 인상적이다.
마리’s CLIP: “Ending Sequence”
등장인물들은 대부분 극명하게 대립하던 이념 아래 각자의 체제를 증명하려는 무감각한 존재로 그려지는데 이는 겉으로 드러나는 화려한 격투 장면이나 총격전보다 더 서늘하게 다가온다. 특히 영화의 엔딩 시퀀스는 ‘진짜 스파이의 세계’를 그린 작품의 진면목을 보여주는 장면이라고 할 수 있다. 이중간첩 ‘두더지(mole)’의 정체가 밝혀지고 이를 처단하는 과정과 이후의 모습이 훌리오 이글레시아스의 ‘라 메르(La mer)’가 흘러나오면서 비춰진다. 이는 기존의 첩보 영화들이 절정과 결말을 그리는 방식과 대비되어 결말이 더 비극적으로 느껴지게 한다. (참고로 영화에서 이중간첩을 지칭했던 두더지(mole)는 옥스퍼드 영어사전 편집자들이 존 르 카레에게 편지를 보내 작가가 만들어 낸 것인지 물어봤다고 하며 그가 정보원 활동을 하던 시절 KBG에서 쓰던 은어라고 한다.)
전지적 관찰자 시점, 가끔인 1인칭 주인공 시점의 영화 이야기.
시선기록장 @bonheur_archive
파리 사진집 <from Paris>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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