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잔타 / 엘로라 / 고아 / 함피
아잔타
아잔타 석굴. 중고등학교 때 교과서에서도 몇 번은 봤기 때문에, 인도에 와서 아잔타 석굴을 보지 않는다는 건 왠지 죄악처럼 느껴졌다. 그래. 인도에 왔으니 아잔타 석굴 정도는 봐줘야지. 기원전 2세기부터 5세기에 걸쳐 만들어진 30여 개의 동굴은 한눈에 보기에도 영험해 보이는 골짜기에 줄지어져 있었다. 말발굽 모양으로 빙 둘러진 지형에 석굴이 있는 구멍이 송송 보였다. 불교의 힘이 약해진 뒤 승려들이 사람들의 눈을 피해 살러온 곳이라더니 속세와의 단절이란 말이 여기서 나왔겠구나 싶었다.
정교한 프레스코화를 보고 있자니 경이로운 기분이 들었다. 기원전의 인류라면 뭔가 서투를 것 같은 느낌인데, 인간의 손재주는 기원전이나 지금이나 큰 차이가 없는듯하다. 이렇게 경건하게 프레스코화를 감상하고 있는데 플래시가 팡팡 터진다. 빛이 바래고 있는 프레스코 화를 보호하기 위해 노 플래시 사인이 큼직하게 걸려있는데, 그 앞에서 플래시를 팡팡 터트리는 너네는 대체 어떤 인간들이니. 저렇게 하다가는 후손들은 이 자리에 프레스코화가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모르게 되겠다 싶었다. 팡팡 터지는 플래시에 이어 이번엔 손전등이다. 어둡다는 얘기를 듣고 준비해왔는지 손전등을 켜고 아주 대놓고 감상 중이다. 정말 총체적 난국이다.
경건함이 물 건너간 건 당연하고 이번엔 발 냄새가 밀려왔다. 아잔타 석굴은 신성한 곳이기 때문에 누구든 신발을 벗고 들어가야 했다. 하지만 그 덕분에 석굴은 전 세계인들의 발 냄새 집합장이 되어버렸다. 부처님은 이 사실을 알고 계신가 몰라.
그렇게 아잔타 석굴 관람은 경이로움에서 플래시 세례를 지나 발 냄새로 끝이 났다.
도미노 피자
아잔타 석굴과 엘로라 석굴을 보기 위한 관광객들은 대부분 아우랑가바드라는 도시에 머물렀다. 하지만 우리는 아잔타 석굴에 조금 더 가까운 잘가온이란 도시에 먼저 숙소를 잡았다. 잘가온은 인도를 여행한 이래 가장 먹을 게 없는 도시였다. 관광객이 없다 보니, 깨끗해 보이는 식당이 보이지 않았다. 또 설사할까 무서워 아무거나 먹지는 못하겠고, 참 난감했다. 이래서 다들 아우랑가바드에 머무는구나 싶었다.
그런데, 도미노 피자가 눈에 띈다. 정말 죽으란 법은 없구나. 신이 이렇게 도미노 피자를 내려주시다니. 도미노 피자집이 이렇게 반가울 일인가 싶었다. 작은 도시에 눈에 띄게 번쩍이는 전광판을 가진 도미노 피자는 아주 인기가 많았다. 게다가 디왈리 이벤트로 하나 사면 하나를 더 주는 이벤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아주 맛있는 피자는 아니었지만 익숙한 맛은 정말 너무 반가웠다. 파리가 들끓는 음식점도 아니고, 깨끗한 실내에서 에어컨 바람을 맞으며 피자를 먹을 수 있다니. 조서방도 나도 빵빵해진 배를 두드리며 만족스럽게 도미노 피자를 나올 수가 있었다.
먹는 게 이렇게 중허다.
엘로라
엘로라는 불교, 힌두교, 자이나교의 석굴이 서른여 개 모여 있는 유적지. 7세기부터 10세기에 걸쳐 차례대로 지어졌다고 한다. 참 놀라운 대목이다. 대부분의 종교는 개종을 명분으로 이전의 종교를 탄압하고 그 흔적을 파괴해버리는 게 보통인데 엘로라에는 사이좋게, 시간의 흐름을 보여주는 것처럼 불교, 힌두교, 자이나교의 사원이 사이좋게 나란히 자리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더 놀라운 건 카일라쉬 석굴. 이 힌두교 석굴은 하나의 암산을 파서 모든 걸 만들었다. 일반적인 건물은 밑에서 위로 쌓아가는데, 카일라쉬 석굴은 반대로 깍아내려오면서 만들어 낸 것. 기계 하나 없었을 8세기. 오직 사람의 손으로만 이런 거대한 사원을 지어냈다는 게 그저 놀랍기만 했다. 얼마나 오랜 시간이 걸렸을까.
몇백 년에 걸쳐 만들어진 엘로라의 2km 남짓한 석굴 사원 군에는 구경하러 온 사람들이 가득했다. 모두들 같은 생각을 하진 않았겠지만, 암석 굴이 주는 시간의 무게와 폭포의 물소리가 주는 편안함은 모두가 느꼈을 거다.
내 친구의 집
조서방의 고등학교 친구가 인도 고아에 취직이 되었다. 우리가 세계일주를 떠나기 직전의 일이었는데, 웃지 않을 수 없었다. 우리는 분명 인도에 갈 것이고, 그때쯤엔 그 가족들이 모두 고아에 있을 테니까. 얼마나 반가운 소식이었는지...
아우랑가바드에서 고아로 가는 나이트 버스를 타는 날, 조서방은 계속 콧노래를 불러댔다.
'친구 집에 간다니까 그렇게 좋아?'
사실은 내가 더 신이 났다. 지칠 대로 지친 인도 여행을 버티게 해 준 버팀목은 고아에 가면 반겨줄 누군가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언니, 오빠와 귀요미 셋을 볼 생각을 하니 신이 나지 않을 수가 있나. 그날의 나이트 버스는 역대급으로 힘들었다. 돌부리라도 만나면 온몸이 공중부양을 했다 떨어지는 바람에 허리가 너무 아팠다. 하지만 괜찮았다. 고아에 가면 그들을 볼 수 있으니까.
이른 아침, 버스가 고아 터미널에 도착했다. 릭샤꾼과 택시기사들이 달려들어 어디 가냐며 흥정을 해댔지만 우리는 당당하게 뿌리쳤다. 친구가 올 거라며... 저어 기서 활짝 웃으며 다가오는 반가운 얼굴. 정말 그때의 기분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오빠는 기사를 대동하고 나타났고, 그 시각 이후로 나는 배낭을 짊어진 여행자에서 기사가 모는 차를 타는 마담으로 급격한 신분상승을 할터였다. 그렇게 고아에서의 휴식이 시작되었다.
인도 부자 조서방 친구 덕에 우리는 랍스터와 왕새우쯤은 매일 즐기며, 언제든 마사지를 받을 수 있는 호화로운 생활에 젖어들었다. 이러다 다시 배낭여행 못하는 거 아니야 싶을 정도로 위험하고도 즐거운 나날들이었다.
우리가 머무는 동안, 핼러윈이 있었다. 언니 오빠는 아들 둘, 딸 하나 뒀는데 막내는 아직 어리고 오빠 둘은 어린이집에 다니고 있었다. 인도 인터내셔널 어린이집의 핼러윈 분위기는 어떤가 싶어서 등원에 따라나섰다. 입구부터 핼러윈 분위기가 물씬이다. 많은 아이들이 이미 코스튬을 입고 어린이집 정원에 나와있었다. 이미 귀여움 한도 초과.
오빠네 가족은 인도에서 3년을 살다 다시 한국으로 왔다. 아이들은 인도에서의 생활을 기억할까? 혹시 기억 못 한다고 해도 내가 기억하는 인도에서의 모습을 이야기해줘야겠다.
인도 국제 필름 페스티벌
우리가 고아에 머무는 동안 인도 국제 필름 페스티벌 기간이 시작되었다. 인도 국제 영화제가 있는지도 몰랐는데, 찾아보니 꽤 역사가 깊다. 1952년부터 개최된 영화제. 영화를 좋아하는 우리는 신이 났다. 영화는 볼 수 없더라도 영화제 분위기나 한번 보자 하고 시내로 나섰다. 규모는 생각보다 컸다. 빤짐 시내 일대가 떠들썩했다. 시내 대로를 따라 전시, 공연, 길거리 음식 부스가 즐비했다. 아이들은 좋아하는 캐릭터와 사진을 찍기 바빴고, 어른들은 공연을 보느라 즐거웠다. 축제의 분위기는 어느 나라든 비슷하구나.
그렇게 시내 구경을 하며 돌아다니고 있는데, 오빠에게 전화가 왔다. 당장 시다 데 고아라는 리조트로 오라는 것. 지금 한국인의 밤 행사가 열리고 있어서 고아에 있는 한인들은 다 모여있다는 것이다. 초대장이 없는데 어떻게 가냐고 했더니, 너네 얼굴이 초대장이란다. 한국인이라면 그냥 입장이 가능한 분위기라고...
우리는 바로 시다 데 고아로 향했다.
입구부터 한국영화 포스터가 즐비했다. 이렇게 자랑스러울 수가 없다. 정말 아무도 우리를 제지하지 않았고, 우리는 바로 행사장으로 들어갔다. 바로 그때부터 본 행사가 시작되었다. 사물놀이와 비보이 공연을 시작으로 임권택, 이준익 감독을 비롯한 한국영화 관계자들의 인사가 이어졌다. 한국에서도 보기 힘든 사람들을 인도 고아에서 보다니. 이게 대체 무슨 일인가 싶었다.
마지막은 한국 음식 뷔페. 한국인 셰프님들이 계신다. 활짝 웃으며 한국에서부터 공수해온 한우 불고기니까 많이 먹으라고 하신다. 정말 주책없이 울뻔했다. 덕분에 너무 그리웠던 한국 음식을 실컷 먹을 수가 있었다. 이게 대체 무슨 횡재인지. 귀빈이라도 된냥 우리도 한국인의 밤 행사를 즐겼다.
그리고 찾아보니 그 해 Country of Focus가 바로 한국이었다 [2016]. 게다가 임권택 감독이 평생 공로상, 이준익 감독이 사도로 심사위원 특별상을 수상했고, 폐막작이 김지운 감독의 밀정이었다. 이렇게 특별한 해, 바로 그 날짜에 인도 고아에 있었다니. 다시 생각해도 우리는 너무 운이 좋았다.
신권 대란
갑자기 인도 단톡방이 시끄럽다. 인도 정부가 갑작스러운 화폐 개혁을 발표했다는 것이다. 고액권인 500루피, 천 루피의 통용을 2016년 11월 9일 자정부로 금지하고 11월 10일부터 신권으로 교환해 준다는 것. 문제는 인당 바꿀 수 있는 금액이 하루 4천 루피에 불과하다는 것. 게다가 교환 가능 기간은 고작 50일 그리고 25만 루피 이상의 금액을 은행에 예치하려고 할 때, 출처가 불분명하다면 높은 세금과 벌금을 적용해서 인도 사람들 뿐 아니라 여행객들까지 대혼란에 빠진 것이다.
인도 정부의 변은 숨겨져 있는 블랙머니를 지상으로 끌어내겠다는 건데, 아무리 그렇다손 치더라도 이렇게 짧은 시간에 단행하는 건 말이 되지 않았다. 여행자들은 인도 은행 계좌가 있는 게 아니라면 무조건 현금을 교환해야 했는데, 그마저도 인당 하루에 4천 루피까지만 이었다. 그마저도 원활하지 않아서 은행에 줄을 하루 종일 선다 해도 4천 루피를 바꿀 수 있을지 없을지 모르는 상황이었다.
그런 상황에 우리는 인도 고아에 있었다. 인도 회사에 다니는 조서방 친구의 도움으로 우리는 가진 돈을 무사히 신권으로 교환할 수가 있었다. 만약 우리 둘이 인도 어딘가에 있었다면 신권 교환에 며칠을 허비했을지 생각만 해도 아찔했다.
나중에 뉴스를 보니 한평생 모은 돈을 침대 밑에 모아둔 인도 시골의 많은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분신자살을 했다고 한다. 대체 누구를 위한 화폐개혁이었는지. 참 극단적인 나라다, 인도는...
고아의 해변
고아주에는 수많은 해변이 있다. 조서방 친구의 현지인 기사 덕에 우리는 유명한 해변들 뿐만 아니라 현지인들이 많이 가는 고아의 해변들도 돌아볼 수가 있었다. 아주 예쁜 물색은 아니지만 바다를 볼 수 있다는 자체가 기뻤다. 인도 내륙인들도, 인도 내륙을 여행하던 여행자들도 똑같이 느끼지 않을까 싶다.
게다가 물가는 또 어찌나 저렴한지. 해변 바로 앞 숙소도 저렴했고, 랍스터나 큼직한 타이거 새우를 먹는 것도 부담이 없었다. 이런 상황이다 보니 고아의 해변엔 장기로 눌러앉은 히피 유러피안들이 그득그득했다. 그들의 심정이 아주 이해되었다.
우리도 하루 정도는 해변이 보이는 숙소에서 머물러줘야 할 것 같았다. 전에 봐 두었던 팔로렘 비치로 향했다. 큰 배낭은 조서방 친구네 집에 두고 1박 2일 짐만 챙겨 나왔더니 기분이 아주 새롭다. 어깨가 가벼운 게 이런 거구나. 우리는 팔로렘 해변가에 위치한 2층 테라스 방을 잡았다. 테라스에는 비치베드도 놓여있는, 예쁜 숙소였다. 테라스에 서면 팔로렘 비치가 한눈에 내려다보였다. 킹피셔를 홀짝이며 해가 지는 팔로렘 비치를 내려다보고 있자니, 이 해변이 내 땅인 양 느껴졌다.
코로나 이후의 고아의 해변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수요일마다 열리던 마켓은 여전할까? 꼬질꼬질한 유러피안 히피들도 여전히 있을까? 랍스터와 타이거 새우는 여전히 저렴할까?
다시 배낭여행자 모드 ON
고아에서의 꿈같은 2주가 끝났다. 무거운 배낭을 다시 짊어졌더니 기분이 이상하다. 언니는 우리에게 우황청심환 2개를 건넸다. 몸이 안 좋으면 하나씩 먹으라고... 그리고 힘들면 언제든 여기로 돌아오란다. 결국 눈물이 터졌다. 언니 오빠의 극진한 대접에 2주를 쉬었기 때문에 그 뒤로도 더 여행할 힘이 생겼다.
그렇게 인도에서의 마지막 여행지, 함피에 도착했다. 이른 새벽, 버스에서 내리려 했으나 내릴 수가 없다. 릭샤꾼들의 호객행위로 버스 입구가 막혀버린 것. 다시 배낭여행자가 된 것이 실감 난다. 이제 다시 모든 것에 흥정 시작이구나! 단단히 힘을 내야 한다.
함피
드디어 인도에서의 마지막 여행지 함피에 도착했다. 함피의 첫인상은 조금 무서웠다. 체크인을 하는데 숙소 주인아저씨가 짐을 풀고 나면 바로 경찰서에 가서 투어리스트 등록을 먼저 하란다. 작고 조용한 마을이었지만 사건사고가 계속 있어 왔는지, 모든 여행자는 경찰서에 투어리스트 등록을 해야 했다. 사람들이 없어지거나 죽는 걸 대비해서 신원확인을 해두는 것 같은 분위기. 심지어 카메라 기종까지 적어야 했다. 시체가 없으면 카메라로라도 유추하는 건가. 정말 무서운 동네 구만. 그래서인지 한낮에도 한산한 골목으로 들어가는 건 왠지 뒷목이 서늘해지는 느낌이었다. 정말 여기서 누구 하나 죽어나가도 모르겠구나 싶은 분위기. 오히려 작고 조용한 마을이 주는 공포가 있달까.
하지만 스산한 뒷골목을 제외하면 함피는 전반적으로 너무 마음에 드는 동네였다.
동글동글한 돌들이 쌓인 함피만의 지형은 다른 행성에 떨어진 기분을 주기도 했고,
노을이 질 때면 물이 자작한 논에 반영이 생겨 세상이 온통 핑크빛으로 물들기도 했다.
양치기 아낙네들은 양과 염소 떼를 몰고 다니다 낯선 이방인을 보면 활짝 웃어줬다.
밤이 되면 함피의 카페들에서는 라이브 음악이 흘러나왔다.
우리는 스쿠터를 한대 대여해서 여기저기를 쏘다녔다. 그러다 저녁이 되면 일몰을 보고, 밤이 되면 분위기 좋은 카페에서 밴드의 라이브 음악을 들으며 밥을 먹고 맥주를 마셨다. 다들 카페에 드러누워 물담배를 피워대는 늘어지게 여유로운 동네였다. 우리도 그 여유에 젖어 긴장 없는 편안함을 즐길 수가 있었다.
함피는 다사다난했던 인도 여행을 마무리하기 좋은, 완벽한 도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