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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볼파란 Nov 28. 2017

잡지에서 발견한 문장들.

더 자주 좋은 순간들로 데려가자

병원에서

병원 대기실에는 저마다의 사연을 가지고 온 사람들로 넘쳐났다. 대학병원이라 입원한 환자가 외래 진료를 보고 있어서 대기시간은 계속 늘어나는 중이다. 나는 처음부터 예약한 시간에 들어갈 거라 생각하지 않아서 미리 준비해온 잡지를 꺼내 읽지 못한 뒷부분을 느긋하게 읽었다. 내 담당의는 선택진료 교수이며 매번 대기자 수가 많다. 맞은편에 앉은 여자는 코트 깃을 세우며 한숨을 내쉬고 간호사에게 가서 얼마나 기다려야 하는지 물어보았다. 그렇게 물어본다 한들 간호사가 해줄 말은 한정적이다. 간호사들은 쉴 새 없이 종종거리며 대기명단을 체크하고 이름을 부르고 진료 후 안내를 해주고 있었다. 병원에서 일하는 사람은 병원 세균에 항시 노출되어 있어서 오히려 병에 대한 면역력이 생긴다고 했던가. 내가 병원에서 일하는 직업이었다면 지금보다는 건강했을까?


내 오른편에 앉은 아줌마는 고개를 뒤로 기대고 무언가를 계속 중얼거렸다. 아마 기도문 같기도 하고 주문 같기도 하다. 눈을 감고 입 밖으로 내지는 않고 입만 움직여 무언가를 간절히 이야기하고 있었다. 내 왼편에는 항암치료를 받고 있는지 머리카락이 없어 털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어그부츠를 신은 아줌마가 아예 벌렁 누워서 함께 온 딸 무릎 위에 부츠 신은 발을 올려놓았다. 딸은 엄마에게 담요를 덮어주고 스마트폰을 들여다보며 지루한 시간을 견뎌내고 있다. 여기에 있는 모두가 이 시간을 묵묵히 견뎌내고 있다. 


맞은편 아저씨는 부인과 함께 왔는데 일에 관련한 전화를 하느라 여념이 없다. 제품에 대한 카탈로그라도 만드는 것 같았다. 속으로 나한테 맡겨주지, 라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큰 목소리로 다리를 쩍 벌리고 앉아 병원 대기실에서 상관없이 전화를 받는 사람이라면 어쩐지 좋은 클라이언트는 아닐 거라는 예감이 들어 별로 아쉽지는 않았다. 


잡지에서 문장 하나를 발견했다. 얼마 전 서점에서 보았던 심보선 시집 '슬픔이 없는 십오 초'에 나오는 구절이었다. '늙어가는 모든 존재는 비가 샌다' 이 얼마나 맞는 소린지. 여기저기 비가 새고, 새는 구멍을 막느라 여념이 없지 않은가. 병원에 온 모두는 비가 그치지 않고 새어 나오고 그 비를 맞고 있었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이라니.


담당의는 오랫동안 봐왔는데 변함이 없다. 피를 수혈하며 늙지 않는 드라큘라 같다. 세련된 검은 단발머리에 하얀 피부에 레드 립은 강렬하다. 얇고 길게 굳게 닫힌 입술은 결연하며 검은색 눈동자가 유난히 커서 들여다보고 있으면 새까만 호수 속으로 빨려 들어갈 것 같다. 그 호수는 얼음장 같다. 차디찬 얼음 같은 검은색 눈동자는 내게 '무엇이 중요한지'에 대해서 물었으며 '선택'하라고 했다. 내가 느끼는 의사란 목마른 사슴에게 물을 먹여주는 사람이 아니라 계속해서 나오는 양갈래 길에서 선택을 강요하는 사람이었다. 두 갈래 길 중에서 어느 길에 물이 있는지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왜냐면 책임을 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의사가 책임지지 않는 길을 가는 기분은 어쩐지 캄캄한 터널길을 홀로 랜턴 빛에 의지하며 걸어가는 것 같다. 그 길 끝에 무엇이 기다리고 있을지 알 수 없기 때문이다. 



짜이를 마시며

버스에서 내려 집으로 꺽지 않고 일부러 더 올라갔다. 내 존재가 너무 가벼워져서 그대로 하늘로 포실포실 올라가 사라져 버릴 것 같았다. 이런 날에는 내 존재를 땅 아래로 붙잡아 줄 만한 일을 해야 한다. 자주 가지는 못해도 가면 늘 기분이 좋아지는 카페에 갔다. 카페는 여름엔 라씨를 팔고 겨울엔 짜이를 판다. 라씨도 짜이도 모두 자주 마시는 음료는 아니었다. 갈 때마다 작은 매장엔 사람이 없다. 그동안 많은 가게들이 내가 마음을 붙이면 꼭 얼마 안가 없어졌다. 이곳은 좀 오랫동안 있어주면 좋으련만. 


짜이를 시켰다. 인상 좋은 주인 여자가 처음 마셔보는 짜이에 마샬라를 조금만 넣어주었다. 여자는 몇 개월만에 갔는데도 내가 전에 와서 어떤 라씨를 마셨는지 알고 있었다. 풋사과 라씨를 추천받아 마시고 맛있어했다는 것 까지 알고 있다. 어쩌면 자영업의 필수는 '기억력'이 아닐까. 


인도의 국민차라는 짜이는 너무 따뜻하고 너무 맛있다. 아주 오래전에 인도 바람이 불 적에 갠지스 강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혔었다. 지금은 인도에 가보고 싶다는 생각 같은 건 하지 않는다. 단지 멀리 떨어진 우리 동네의 찻집에 앉아 짜이를 마실 뿐이다. 이것으로 족하다. 통 유리창으로 보이는 하늘엔 당장 눈이라도 내릴 것 같이 우중충하다. 아, 제발 눈이라도 펑펑 내려주면 좋을 것 같다. 펑펑 내리는 눈을 바라보며 마시는 짜이차는 더 맛있을 것 같다. 뜨거운 짜이 한 모금을 목구멍으로 넘기니 뱃속까지 따뜻하다. 추웠던 몸과 마음이 녹는 것 같다. 30분 동안 짜이를 마시며 잡지를 끝까지 읽었다. 그러다가 다시 문장 하나를 발견했다. '나를 더 자주, 좋은 순간들로 데려와야지. 어쩌면 그게 내가 바라는 일상의 전부지'


짜이를 마시며 나도 다짐했다. 나를 더 자주 좋은 순간들로 데리고 오겠다고. 그게 일상의 전부니까. 그러니 나는 다음에 또 짜이를 마시러 와야지. 일어서며 인상 좋은 주인에게 말했다. 


"다음엔 마샬라 더 넣어주셔도 좋을 것 같아요. 다음에 또 올게요"



♬ BGM : 박효신 '숨'

'고단했던 내 하루가 숨을 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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