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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볼파란 Jun 08. 2019

나는 무엇을 캡쳐하고 있을까

에릭 요한슨의 사진전에 다녀왔다. 이른 아침부터 비가 부슬부슬 내리고 있었고 혼자였다면 비 핑계를 대고라도 집에서 무려 1시간 30분 이상 걸리는 예술의 전당에 가질 않았겠지만 만날 약속을 한 터라 꾸역꾸역 일어나 갔다. 올림픽대로를 탈 때면 나는 항상 강남에 적을 두고 다니던 시절을 생각한다.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노스탤지어 같은 거다. 그래서 올림픽대로에서 고속버스터미널로 넘어올 때면 항상 특유의 향이 난다. 무슨 향인지 설명할 수는 없다. 내 오각이 먼저 반응하는 기억 속의 향이다. 


사진전은 충분히 재미있었다. 백화점 마네킨에서 옷을 걸치고 뚜벅뚜벅 걸어 나온 듯한 에릭 요한슨이 직접 방문해서 TV 프로그램 촬영을 했다. 함께 온 제작진이 <문화산책>이라고 직접 밝혀줬으나 미안하게도 안 볼 거 같다. 그래도 덕분에 사인도 받고 사진도 찍었으니 고마울 일이다. 에릭 요한슨은 스웨덴 출신의 초현실주의 사진작가다. 사진으로 초현실을 보여줘야 하다 보니 당연히 포토샵 킹 마스터다. 심지어 사용한 포토샵 레이어만 사람 키만 하게 붙여 놓은 곳도 있다. 어마 무시하게 사용한 레이어를 보다가 나도 모르게 소리 내어 웃어버렸다. 같은 프로그램을 사용하는 직업을 가진 이의 동질감이라고 해두자. 단순하게 합성하는 사진이 아니라 떠오르는 아이디어를 스케치하고 사진 속 모든 요소를 아날로그 방식으로 직접 제작해서 하나씩 사진으로 찍어낸 후 환상적인 포토샵 스킬로 합성해낸다. 


작품 퀄리티를 보고 있자니 내가 가르치는 학생한테 미안해졌다. 그래도 난 시간당 페이가 에릭 요한슨의 몇십 분의 일일 테니 그리 미안해할 일도 아니다. 원래 세상이 돌아가는 원리는 기브 앤 테이크다. 심지어 팸플릿에도 '포토샵을 이용한 이미지 조작에 관한 한 세계 최고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라고 쓰여있다. 캬. 이것이야말로 자신감! Baam~~~!


이것은 사실상 순간을 담는 것보다
아이디어를 캡쳐하는 것의 문제이다.


사진이 순간을 캡쳐하는 예술이라면 그가 하는 일이란 사진은 아닐지도 모른다. 순간을 담는 것보다 그의 머릿속에서 떠오른 아이디어를 캡쳐하는 것이 그에겐 더욱 의미 있는 일일 것이다. 환상적인 에릭의 사진들 속에서 정신없이 핸드폰 카메라 셔터를 눌러 대다가 벽면에 레터링 되어 있는 이 문구를 보고 한참을 서있었다. 


나는 어떤 순간을 캡쳐하면서 살고 있나. 매일마다 글을 쓰기로 한 것도 뭘 먹었는지 기록하는 것도(알리오 올리오와 컵케이크 두 개를 해치웠다. 다시 죄책감과 후회의 버튼을 누르고 있다.) 노출되는 글에는 쓰지 못하는 우울한 내 오프라인 일기들도 모두 내 어떤 순간을 캡쳐하는 일이다. 에릭이 아이디어를 캡쳐해 옮겨놓는 데 선수라면 나는 아마도 반대일 것이다. 좋든 싫든 캡쳐한 그 모든 순간을 주르륵 펼쳐놓고서야 무엇을 옮기려고 했는지 알 수 있을 것이다. 



-사진출처 : photo by Erik Johans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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